언론인 류근일
  • 홍선희 편집위원 ()
  • 승인 2007.01.18 14:2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증오심은 저항의 무기이지 통치 원리 아니다"

대통령의 일련의 발언으로 정국과 민심이 뒤숭숭하다. 언론인 류근일은 우리 사회가 개혁이냐 보수냐, 좌냐 우냐를 기준으로 가늠하는 데 좀더 근원적인 문제는 품위냐, 저질이냐라고 말한다. 정확성과 양심을 수호해야 될 지식인까지 천민민주주의의 부산물인 코드에 맞춰 생계형 운동가가 되는 오늘, 그는 지식인들에게 고독하게 살자고 외친다.


 

최근 대통령의 품위 없는 발언으로 국가의 품위에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는가?

1980년 이래 우리 사회의 갈등이 심해져서 나쁜 사람으로 지목한 상대방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갖는 상황이 되었다. 이유가 있건 없건 그것은 증폭되기 마련이다. 나쁜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괜찮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하다 보니 서로 극도의 증오심과 적개심, 경멸, 혐오감을 표출하게 되었고, 피차 간에 전반적인 품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적 격변과 갈등의 시대를 겪다 보니 너, 나 할 것 없이 거칠고 모질게 되어버린 것이다. 가려야 할 것, 자제력, 품위, 절제를 등한히 하게 되었기 때문에 각자 누가 먼저 그랬나를 따지지만, 결과는 공동체 전체의 삭막함과 황폐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노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볼 때, 그 분의 정치적 처지에 여유가 많이 없어진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났다 하면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막말’이 즉석에서 튀어 나오는 것 같다. 야당 정치인 시절에는 그래도 그냥 넘어가는 것이지만, 국정 최고 책임자의 신분으로서는 외교 문제나 국내 문제에 있어 화나는 대로 발언해선 안 될 줄 안다. 증오심은 저항의 무기는 될지 몰라도, 통치의 원리는 될 수 없다.

일반 국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권자는 자기 수준의 리더밖에 못 갖는다고 한다. 그런 리더가 그런 유권자나 대중을 낳고, 그런 유권자와 대중이 그런 리더를 낳는 식으로 서로 맞물려 있다고 본다. 근대화까지는 우리가 돈만 벌면 되었는데 선진화 단계에서는 국제사회에서 인정할 수 있는 신사도의 기준이 있다.  지도자와 국민들이 일정한 수준의 교양과 품위를 갖추는 것이 선진화의 필수조건이다. 요즈음 와서는 품격의 문제가 단순한 문화의 문제이기 이전에, 글로벌 시대의 국가적인 생존과 먹고사는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다. 국제 사회에서 문화국민, 문화국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 문명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품격의 문제는 오늘의 시점에서는 불가결한 국가적 생존의 요건이 되었다. 흔히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개혁이냐 보수냐, 좌냐 우냐의 기준으로 가늠하는데 그것도 물론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문제는 품위냐, 저질이냐 하는 기준이다. 전반적으로 우리의 국격(國格)이 떨어지는 것 같은 징후를 빚어내고 있다. 좌-우 문제만 하더라도, 품위 있는 ‘보수’와 품위 있는 ‘진보’가 자유민주 헌정질서 하에서 신사적으로 경쟁하는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구좌파적인 증후군이, 자신들이 매도해 마지 않던 상대방 못지않게 질적인 조악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과거에 그들이 권위주의에 저항한 명분 중 하나가 ‘도덕성’의 문제였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도덕적 명분을 내세워 저항했던 이들이라면 정권을 잡은 이후 마땅히 상대방보다 월등하게 높은 문화적 수준을 보여주었어야 하는데, 그것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국가의 품격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기적으로는 학교, 가정에서의 교육이다. 아버지, 어머니부터 천박한 언동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고 본다. 단기적으로는 법치주의의 관철이 필수적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군중의 힘이 실정법보다 우월하다는 그릇된 사고가 퍼져 있다. 폭력 시위대가 전경을 죽창으로 찌르고, 평택 대추리에서는 정규군을 죽봉 시위대가 공격한 적이 있다. 그것은 ‘거룩하고 신성한’ 행위를 하는 것이기에 당연하고 정당하다는 그릇된 풍조가 출렁이고 있다. 법을 어기는 것, 룰을 어기는 것이 ‘장땅’이라는 세태가 풍미하고 있다. 이 점에서 법치주의를 구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우리나라 법치주의에 문제가 많다는 뜻인가?

우리가 선진국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매뉴얼이 없기 때문이다. 앞선 나라에서는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매뉴얼이 있다. 몇 해 전에 서해 페리 침몰 사고가 났을 때 조사해 보니, 여객선 운항과 관련해 상세한 규정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무슨 사건이 났을 때 공무원들이 해당 규정이 없어서 그냥 놓아두었다고 답변하는 경우가 많다. 또, 법이 있어도 몸으로 밀어붙이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수틀리면 전국의 시·도청을 때려 부숴도 된다는 것이다. 법치보다 자기의 이익, 의지 관철이 우선할 수 있다는 무정부적인 심리이다. 그것을 조장하고 방치하는 것이 민주화인 양 오해하는 인식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 떼쓰는 사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것이다. 법은 멀고 몸으로 밀어붙이기는 가깝다. 어째서 품격을 논하다가 법으로 갔느냐고요? 한마다로 품격이 저질화되었는데, 그 대책이 무엇이냐니까 거시적으로는 교육이지만, 일차적으로는 법치주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는 무엇인가?

저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은 서유럽적 스펙트럼이다. 극좌와 파시스트가 문명 세력의 압도적인 위력으로 쇠퇴하고, 정치지형의 중앙지대에서 다양한 의회민주주의 정파들이 민주적 보수와  민주적 진보로서 공정하게 경쟁, 공존하는 판도가 그것이다. 한반도의 경우에는 그것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전체주의적 극좌파가 운동의 전략적 요충을 장악했고, 그것이 한국에서의 서유럽적 진보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결과를 빚었다.

자유주의 청년운동의 출현을 기대한다고 썼는데….

우파의 미래를 위해 우파의 다음 세대가 나오기를 기대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파 진영의 주력은 원로 세대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 분들뿐 아니라, 40대·30대·20대 우파 세대가 당연히 등장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대학생·청년·장년들의 자유민주 운동이 일어나기를 희망한 것이다. 마치 386 모두가 구좌파인 것처럼 인상지워져 있지만, 지금 386세대 내부에서도 많은 자성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자기들의 오류를 성찰하고 방향을 전환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40대들이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들이 빨리 마음의 정리를 하고 구좌파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들고 나왔으면 한다.

젊은 시절 좌파로 지칭되었는데, 어떻게 ‘보수 꼴통’으로 입장이 달라졌나?

여러 번 밝히기는 했는데, 무엇보다도 나는 극좌로 가본 적은 없다. 유럽 사회민주주의선까지 갔었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함께 다 의회민주주의 정파이다. 극좌, 다시 말해, 소비에트 모델이나, 김일성-김정일 모델까지 갔던 사람의 경우는 그 변화의 질량이 엄청난 것인지 모르겠으나, 나의 경우는 극좌로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에 과히 어렵지 않은 수정 정도의 과정이었다. 단지 큰 차이가 있었다면 우리의 산업화 과정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가 현저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물론 유신 등, 폭력적 긴급조치 시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비판적 평가를 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근대화 모델, 박정희 근대화 모델에 대해 그것을 ‘성공의 역사’로 평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좌-우, 어느 쪽이 강자라고 보는가?

지금 우익은 약자이다. 저해할 만큼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다양화되어가고 있고 좌파 진영도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김정일을 성경처럼 추종하는 파, 중도적인 온건한 좌파도 있을 것으로 본다. 우파 진영에도 스펙트럼과 개인차가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큰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옛날에야 특정한 성향을 가진 그룹이 다른 입장들을 탄압해서 문제가 되었지만, 요새야 뭘!

 

우리 사회의 다양성은 어떻게 보나?

이중적이다. 긍정성과 부정성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본다. 긍정적 측면에서는 정치적 신념으로 인해 모진 박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부정적 측면에서는 최소한의 합의도 없는 사회로 간다는 점이다. 영국에서는 보수당과 노동당 사이에 영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가 있다. 우리 사회에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다양성이라기보다는 국가의 분열이다.

‘폭민시대’ ‘반지성의 시대’ ‘천민주의 시대’ 같은 용어들은 극단적이지 않은가?

우리 사회가 너무 ‘홍위병’ 풍조로 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우파와 좌파로 분류하더라도, 아울러 지성적이냐 반지성적이냐의 기준으로도 분류해서 사회 전체가 수준 높은 지성적·이성적 경지로 올라가야 하겠다는 뜻이다. 민주주의가 일탈하면 그것은 폭민정치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이다. 민주정치는 교양과 예지에 의해서 밑받침되는 것이다. 이런 충정에서 좌, 우의 횡적인 분류와 함께, 종적인 수준의 문제도 아울러 성찰하자는 취지이다.

지식인의 태스크는 무엇인가?

지식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대중화하고 있다. 대중민주주의는 근대민주주의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대중화라는 것이 민주화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 부산물로 대중의 타락을 동반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볼 때 심지어는 지성의 본산이라는 대학까지도 대중화되고 있다. 코드 맞춘다는 것이 바로 이런 데서 나온 것 같다. 교수가 학생 눈치를 살피고, 선배가 후배 비위 맞추려 하고, 어른이 젊은이들에게 할 소리를 못하고, ‘젊은 세대의 말’이라는 마패만 들이대면 꼼짝도 못하고, 청와대에서까지 걸핏하면 “계급장 떼고 얘기하자”는 얘기가 나오고….  심지어는 정확성, 양심을 끝까지 수호해야 할 지식인들까지도 대중시대의 이러한 풍조에 주눅이 들어 있다. 정치도 그런 쪽으로 가고 있다. 정치를 하는 데도 몸짱, 얼짱, 꼭짓점 댄스, 이미지 정치, 감성정치. 뭐 이런 것들로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는 풍조가 있다. 이건  대중화에 지식인이 굴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민주의적 민주주의다. 지식인은 가능한 한 이런 풍조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한마디로 지식인은 고독하게 살자는 것이다.

자신의 글에서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에 품격이 있다고 보는가?

나는 초기에는 교양 있는 체 했다. 그러다가 근래에는 어떤 다급한 마음에서 상당히 격앙된 글을 썼다. 주위에서는 “왜 그렇게 격문처럼 쓰느냐?” “기분은 좋은데 표현이 너무 독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컨텐츠는 그대로 두고 스타일은 또다시 교양 있는 체 할까 생각 중이다. 2년 전에는 우리 상황에 대해 위기의식이 컸었다. 내가 다시 글쓰기 시작했던 2년 전에는 좌파의 거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지식인들이 돌 맞을까 봐 위축돼 있었고, 일부의 언어 폭력은 갈수록 심했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라도 그렇게 쓴 측면이 있다. 나에게는 누르면 더 튀는 성정이 있다. 예컨대 “6·25는 내전이요, 통일전쟁이었다”라고 말하는 분파들까지 판치는 세상이라 내가 반사적으로 튀었나 본다. 요새는 나와 입장이 같은 필자들이 많이 생겨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제는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외롭지 않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