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다 귀가 즐거운 뻔뻔한 '섹스 수다'
  • JES 제공 ()
  • 승인 2007.02.0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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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피기 좋은 날>

 
김혜수·윤진서 주연 <바람피기 좋은 날>(장문일 감독)은 눈보다 귀가 즐거운 섹스 코미디이다. 시각적으로 민감한 남자보다는 아무래도 감성적인 여자에게 많은 표를 얻을 것 같다. 관심을 모았던 김혜수를 포함해 배우들의 노출 수위는 예상보다 낮았고, 대신 영화는 남녀 네 배우들의 양기 오른 입에 주목해달라고 말한다. <연애의 목적>에서 강혜정에게 수작을 거는 박해일의 “5초만 넣고 있을게요” 같은 뻔뻔한 안면 몰수형 대사가 수도 없이 귀에 꽂힌다.
인터넷 채팅으로 알게 된 남녀 커플(김혜수·이민기)은 ‘번섹’을 앞두고 “해봤어?” “숫총각인데 제 물건 엄청 커요” “어디 탁자 밑으로 한번 꺼내봐” 같은 대사를 탁구 치듯 주고받는다. 어차피 서로 즐기고 보자는 것이 이들의 목적. 처음부터 섹스에 대해 암묵적 동의가 있었던 만큼 애피타이저의 주제 역시 섹스다.


윤진서·이종혁 커플의 연기 ‘기대 이상’


남자는 자신의 ‘스펙’에 대해 과장하고, 여자는 귀엽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접수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 되는 것이다. 이들은 만난 지 10분도 안 되어 모텔로 자리를 옮겨 대낮 정사를 벌인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두 번째 설정은 바로 익명성에 있다. 자신의 이름을 밝혀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잠깐이나마 ‘나 아닌 나’가 되어 느끼는 자유·해방감을 유인구로 선택했다. 우리는 실제로 주민등록증·학생증·명함에 갇혀 얼마나 많은 사회적 틀에 종속되는가. 채팅으로 만난 두 커플도 당연히 이름 대신 대화명인 ‘이슬(김혜수)-대학생(이민기)’ ‘작은새(윤진서)-여우 두 마리(이종혁)’로 서로를 규정한다.
<바람피기 좋은 날>은 제목에서 암시하듯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다 보니 여성 처지에서는 묘한 동지 의식과 통쾌함을 맛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영화를 넓은 의미의 페미니즘 계열 영화로 분류해도 손색없을 것 같다. 불륜 행각이 들통 나 남편들에게 쫓기게 된 두 유부녀가 차를 몰며 도주하는 장면에서 <델마와 루이스>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네 배우들의 능청맞은 연기와 수다는 이 영화를 한결 경쾌하게 해 주었다. 특히 윤진서·이종혁 커플은 기대 이상이다. 순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숭 100단인 윤진서는 많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살 수밖에 없는 현실적 캐릭터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결정적 순간마다 “잠깐만요”를 외치고, “귓속말을 해달라”며 남자의 애간장을 녹이지만 실은 네 명 중 가장 사랑을 신뢰하는 로맨티스트가 바로 그녀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선도부장으로 각인된 이종혁도 모처럼 진가를 발휘했다. 극중 바람둥이 증권맨인 그는 여자의 옷을 벗길 수만 있다면 어떤 짓도 다 할 것 같은 남자로 나와 가장 많은 유쾌함을 선사한다. 사랑 없는 섹스의 공허함과 섹스 없는 사랑의 허전함을 보여준 내면 연기도 가장 잘 드러냈다. 그는 네 배우 중 유일한 기혼 연기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람피기 좋은 날>은 8부 능선부터 의미와 재미 사이에서 길을 잃고 가쁜 숨을 내쉰다. 긴장감과 속도감도 이때부터 현격히 떨어진다.
수술 집도의가 야심차게 환자의 복부를 갈랐지만 예정된 치료를 끝내지 못하고 서둘러 봉합한 것 같은 인상이다. 감독은 차도에서 멈추어버린 자동차와 갈 곳 잃은 주인공들의 어정쩡한 모습을 통해 현대인의 외로움을 그리고 싶었다지만 이 역시 설득력이 부족하다.
아이필름이 웰메이드 영화 제작을 선언한 뒤 빛을 본 여덟 번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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