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여서 좋다" 위풍당당 '비혼'
  • 이재명 편집위원 ()
  • 승인 2007.03.1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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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나홀로 인생'을 택하는 비혼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10대 청소년 중 17%만 결혼이 꼭 필요하다고 여긴다는 조사 결과도 나와 이같은 추세는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자유롭고

 
"네가 결혼한다면 그건 일종의 범죄가 아닐까? 너 같은 스타일이 신랑 하나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준영) “결혼한 친구들 보면 다 비슷하더라. 걱정도 고만고만, 행복도 고만고만… 무슨 체인점 차린 것 같아.” “평생 이렇게 데이트나 하면서, 달콤한 말이나 실컷 듣고 살았으면 좋겠다.”(연희)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 나오는 대사들이다. 이들의 말처럼 결혼은 정말로 미친 짓일까? 요즘 들어 능력이 있으면서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비혼자(非婚者)’들이 부쩍 늘고 있다. 사회학이나 통계학적으로는 ‘미혼’에 속하지만 결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달라서 ‘비혼’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불린다.
프랑스에서 20년 가까이 ‘비혼’으로 살고 있는 김은영씨(45·가명). 한국에서 명문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뒤 대기업 건설회사에 취직해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최고의 엘리트 코스로 꼽히는 그랑제콜에서 건축학을 배웠다. 나폴레옹이 만든 이 학교는 에펠 탑을 세운 에펠을 배출하는 등 수료자들에게 평생 취업이 보장된다는 최고의 명문이다.
그녀는 졸업하자마자 프랑스 건설회사에 부장급으로 취직해 도로공사 책임자로 일했다.
이때부터 역마살이 끼었다. 틈만 나면 차를 몰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 유럽의 협곡까지 꿸 정도가 되었다. ‘세계 일주’는 그녀의 취미이자 목표이다. 컴퓨터와 기계 다루는 솜씨도 남자 전문가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뛰어나다. 30만km 넘게 달린 승용차는 자신이 직접 정비하고 수리한다. 침대·가구는 물론 화장품도 자신이 만들어 쓴다. “남자 없이 사는 데 아무 불편이 없다”라고 큰소리치는 이유이다.


 
“현 결혼 제도에서는 결혼할 생각 없다”


김씨는 얼마 전부터 파리 외곽의 소도시에 아파트를 사서 본거지로 삼고 ‘벌고 쓰고’를 반복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즐기고 있다.
요즘의 주업은 홈페이지 제작. 얼마 전 알래스카에서 컴퓨터 작업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갔다가 경비행기 조종법까지 배웠다. 그리고 경비행기를 몰고 알래스카부터 남미까지 비행하면서 남미 대륙을 여행했다. 인도에서 한 달간 살기도 하고,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 칭다오에서부터 베이징-모스크바를 거쳐 유럽까지 이르는 대륙횡단열차 여행도 했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 삶이 좋다. 이렇게 살다가 죽겠다”라고 자랑한다.
대학 교수인 박정목씨(53·가명) 역시 비혼이다.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강의를 맡고 있는데 학생들 사이에 ‘멋쟁이 교수’로 꼽힌다. 잘나가는 기업체의 대표 직을 겸하고 있어 외국 출장도 자주 다닌다. 서울 강남의 1백 평 가까이 되는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사업가인 김광걸씨(51·가명)는 미남형 외모에 돈도 잘 벌어 여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고학력·상류층의 여성들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혼자 산다.
박씨와 김씨, 두 남자가 하는 말은 똑같다. “혼자서 자유롭게 사는 게 불편하지 않아 좋다”라는 것이다.
<SBS 스페셜>은 지난해 11월26일 ‘결혼, 물음표를 던지다!’를 방송했다. 시나리오 작가이며 서양식 특급 요리사를 꿈꾸는 정성숙씨(31)는 이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될 수 없는 현재의 ‘결혼 제도’에서는 절대로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전희정씨(33)와 그의 친구들은 자신을 ‘미혼’이라 부르지 말고 ‘비혼’으로 부르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저명 인사 가운데서도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 한나라당을 이끌었던 박근혜 전 대표, 오지 여행으로 유명한 한비야씨 등 비혼자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3월10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는 제1회 ‘비혼여성축제’가 열렸다. 언니네트워크가 ‘세계 여성의 날’(매년 3월8일)을 기념해 개최한 행사인데 그 취지가 꽤 당당하다. “우리는 비혼 여성입니다. 결혼하지 못한 비혼 여성이 아닌,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선택한 비혼 여성입니다.…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자유를 열망하는 이들의 축복과 함께 비혼으로 홀로 또 함께 잘 살겠노라고 신성하게 선언합니다.’ 행사장에 내걸린 ‘비혼 선언문’이다. ‘비혼은 이래서 좋다’라고 쓰인 패널에는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을 때 하라!’ ‘내 일상이 내 맘대로…’ ‘자유로운 연애 할 수 있어 좋아!’ ‘아들 낳아라, 직장 관둬…결혼 제도 안의 부당한 차별 안 겪어 좋고’ 등의 글이 적혀 있었다. 이처럼 비혼자들이 급증하고 있음에도 아직 비혼에 대한 특정화된 통계나 사회학적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이들은 모두 미혼자 또는 독신자 속에 포함되고 있다.
통계청이 조사한 2005년도 시점에서의 미혼자는 남자 6백58만명, 여자 4백89만명으로 집계되었다. 15세 이상 인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연령별로 보면 결혼을 안 하거나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연령별로 보면 25~29세가 2백59만명, 30대가 1백77만명, 40대가 38만명, 50대가 8만여 명 등이다.
최근의 ‘늦은 결혼’ 세태를 반영하더라도 결혼을 할 수 있고, 또 사회 통념상 더 이상 결혼을 늦추기 어려운 30대 미혼자가 1995년 76만여 명에서 2005년 1백77만여 명으로 10년 사이 2.3배나 크게 증가한 데서 한국 사회에서 진행 중인 비혼의 확산을 실감할 수 있다.
미혼이든 비혼이든 싱글족의 증가에 따라 ‘나홀로 세대’ 또한 급증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에서도 1인  가구는 3백17만 가구로 2000년 조사 때 2백22만4천 가구보다 42.5%나 늘어났다. 다섯 가구 가운데 한 가구가 혼자 사는 세대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에서의 비혼자 증가가 유럽이나 미국 등 외국의 과거 추세를 빠르게 닮아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정확한 실태 파악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지난 1960년대 초 다섯 가구 가운데 한 가구가 ‘나홀로 세대’였던 것이 2000년에 이르러 세 가구당 한 가구로 늘어났다(20쪽 딸린 기사 참조). 미국 역시 인구조사국의 지난해 10월 발표에 따르면 비결혼 가구가 50.3%로 전체 가구의 절반을 넘고 있다.
이같은 비혼자들의 증가에 대해 인구학·사회학적 측면에서 우려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비혼의 증가가 저출산으로 이어져 결국에는 인구 감소에 따른 갖가지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권태환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1월5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의 저출산 현상에 대해 언급하며 “특히 비혼 여성이 임신하는 경우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나 법적 제도가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아 대부분 낙태로 이어진다”라고 지적하고 이들의 가족 구성을 법적·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비혼자들끼리 정보 공유하는 모임도 속속 등장


한편에서는 결혼의 장점을 강조하는 캠페인도 벌어지고 있다. <SBS 스페셜>은 결혼이 심장질환과 뇌졸중 발병을 낮춰주고 암과 우울증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등 행복한 생활과 수명 연장에 유익하다는 연구들을 소개하면서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건강한 결혼이 건전한 사회의 기초’라고 생각해 결혼 장려 정책에 연간 3억 달러를 쏟아 붓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앞으로 비혼의 증가가 더욱 가속화할 것임을 예견하게 하는 조사 결과도 나오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연간 혼인 건수는 지난 10년간 20% 이상 급감했으며, 이혼 건수는 1백% 이상 증가했다.
보건복지부 저출산고령사회정책본부가 지난해 전국의 19~69세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서도 미혼 여성의 41.9%가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미혼 남성은 71.2%로 그 비율이 높았다. 또 전체 미혼자의 62.7%는 ‘일에서의 성공을 위해 결혼을 안 할 수도 있다’라고 응답해 결혼보다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비혼에 대한 선호는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9~10월 전국 초·중·고교생 1만1천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국 청소년 결혼 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학생은 16.8%에 불과했다.
‘해도, 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응답한 학생이 29.3%에 달했는데 남학생(20.4%)보다 여학생(39.1%)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특히 ‘안정된 직장, 충분한 수입 등 결혼 여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에는 결혼을 연기하거나 포기할 수 있다’라는 의견이 3분의 2를 차지했다. 비혼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자신들을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내세우면서 정보를 공유하는 비혼자들의 모임이나 카페도 잇달아 생겨나고 있다. 언니네트워크가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 ‘언니네’의 ‘비혼으로 함께 잘 살기’ 살롱에는 3월15일 현재 1백50여 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다. 서울 여성의 전화에서는 1998년부터 매달 1~2차례 ‘싱글 여성 모임’을 주관하고 있다. 대구여성회는 지난 2002년부터 3차례에 걸쳐 ‘비혼 캠프’를 개최해 ‘혼자 사는 즐거움’과 ‘1인 1프로젝트’등에 대한 강연 및 교육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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