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 최고 지혜는 중도"
  • 조규석 편집위원 ()
  • 승인 2007.04.0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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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말미에 그는 목이 메었다. 지난 삶을 반추하며 가족을 얘기할 때 그랬다. 나이 탓일까. 그의 말에서, 생명을 걸다시피 언어로 체제에 저항하던 혁명가적 면모는 찾기 어려웠다. 그의 답변들은, 담담했지만 시 <황토(黃土)>를 비롯한 그의 초기 시에 절절이 묻어 있던 ‘한’의 정서가 이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한으로 변용되었음을 알려주는 듯싶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바보였다’고 했다. 말로써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념 혹은 혁명의 허구성’을 말하려 했던 건 아닌지. 이제 ‘원로’로 대우받아야 하는 시인 김지하를 만나 이 혼란한 세상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듣고 나오면서 생각한 것은 그런 ‘추정’이었다. 체제 저항 운동가로서의 출발점이 된 그의 시 <오적(五賊)>에 대해서는 서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적은 이미 우리가 오래전부터 지겹도록 만나온 세력들이고 그래서 특별할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보통 명사’가 되어버렸으므로.

말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시대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언어나 시중 대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대통령의 말도 내용보다 언어의 품격에서 더 논란이 되고 있다.


일반화된 문제다. 뭔가 크게 바뀌고 있는 전환기다. 그래서 우선 감수성에 변동이 오고 감수성 변동과 함께 언어가 변화한다. 우아한 아름다움, 이것이 한 사회의 스타일을 결정하지 못하고 힘을 잃는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추(醜), 엽기, 망상, 비속이 유행한다. 그러나 나는 욕하기 전에 이것을 양식사적인 변동으로 본다. 언어 스타일의 문제인 것이다. 내가 예로 드는 얘기가 있는데, 바로 6·25 무렵의 경험이다. 그때 내 나이 열두 살(김시인은 1941년생이므로 열 살의 잘못인 듯)이었다. 그때 남북한 4백만명이 죽었다. 연좌제가 살아 있을 때니까 다들 발붙일 곳 없이 험악한 시대였다. 그래도 거지가 지나가면 불러서 상에 밥을 차려주기도 했다. 그게 그때의 스타일이다. 지금은 그런 거 없다. 10대에서 30대까지 인구가 75%가 넘는데, 이들이 (언어에서) 자기 스타일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젊은 세대와 함께 아날로그 세대마저도 민감한 사회적 문제가 터지면 비속어, 쌍소리를 막 한다. 그것의 본질은 그들이 신세대에게 어필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시에서도 언어의 타락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시각이 있는 게 아닌가?


지금의 시에는 세 갈래 흐름이 있다. 하나는 패륜적 상상력·비속·엽기·환상·죽음과 관련된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시, 그리고 미래파 경향으로는 생명·생태·환경주의 시, 불교를 배경으로 한 정신주의 시로 갈린다. 이 세 개의 흐름이 결합되어야 한다. 사실 이 시대의 가치관이 외적인 생명과 내면의 명상이라는 안팎의 상관 관계를 특징으로 하고 있기는 하다. 불교나 환경의 유행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단계로 가는 중에 괴기의 단계가 있다. 나는 그걸 ‘싸가지 없다’고 말하기 전에 화나는 걸 참고 객관적으로 짚어보려 한다. 추사(秋史)가 말하기를 “괴(怪·그로테스크)가 없이 어떻게 지예(至藝·지극한 예술)에 도달하겠느냐”라고 했다. 자기 서체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시대에 맞는지 검토해봐야겠지만, 나는 지금 이 시대의 ‘괴’가 어떤 숭고한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물론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공(空), 즉 텅 빈 마음이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 글이나 문장을 보면 꽉 차 있다. 여기에 텅 빈 마음이 들어와야 한다.


최근 어느 모임에서 내놓은 새 작품 <허공은 신>은 그 내용에 대한 이해에 앞서 아름다운 언어로 읽혔다.


‘허공’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다. 공을 생각해야 할 시대다. 경제 성장은 해야 하지만 소비도 좀 줄이고 자제, 절제 같은 게 필요하다. 말하자면 ‘자발적 가난’도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불교적 개념이지만, 사실 기독교의 신이나 우리 전통 사상의 신도 결국 ‘공’이 아닐까. 그것을 중도라고 표현했다.


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양극단에서 중도를 얘기하는 건 반가운 일’이라고 말했다. 중도의 현실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쪽과 저쪽을 다 들어 올리면서 차원을 변화시키고 현실을 바꾸는 게 중도다. 현실에서는 성장을 말하다가 복지를 떠올릴 수 있고 복지를 내세우다 성장을 말할 수도 있다. 이런 모순적, 역설적인 발상이 필요하다. 사실 기독교도, 자기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아시아인의 입장에서 보면 중도 논리이고 동학의 논리학도 불연기연(不然其然;그렇지 않다면 그렇다는 뜻이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긍정하는 것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중도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헌데 웃기는 것은 극좌도 중도라 하고 극우도 중도라 하고 중도도 중도라 하고….


그럼 왜 하필 지금 중도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동북아 정세가 변하고 있다. 문명 변동의 조짐까지 보인다. 미국·중국·러시아·일본을 둘러싼 정세가 마치 한말(韓末)처럼 복잡하게 돌아간다. 내부적으로는 남북 관계가 광복 직후 정세와 비슷하다. 이런 경우 바깥으로나 안으로나 극단 사이에서 중도를 찾아야 한다. 이것과 저것이 싸워 하나가 이긴다는 변증법적 인식은 우리 안팎의 처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 이중성과 차원 변화다. 말하자면 철학적으로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다. 중도는 혼돈한 질서에 접근하기 위해 인류의 지혜가 생산해낸 가장 가까운 접근법이다. 지금 중도 얘기가 난데없다고 하지만 사실 내게 중도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우리 때 감옥 가면 그를 엄청난 혁명가로 이미지 메이킹해서 동원력을 확보했는데, 나는 그런 극좌 혁명가가 아니다. 사실 1970년대의 반유신 운동 과정에서 중도를 시도했어야 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린 민주주의가 외형적으로는 실현되었다. 시대 해석을 한다면?


민족 전체가 집단적 정신분열 상태다. 남과 북, 부자와 빈자, 진보와 보수, 영남과 호남, 기업과 노동자, 청년과 노년 등이 전부 갈등, 적대 관계다. 이 갈등은 서로 다른 것이 투쟁해서 승리하는 쪽으로 통합된다는 변증법적 사고 때문이다. 이 변증법적 시대가 가야 한다. 원래 똥과 밥은 함께 있는 건데 한쪽만 생각하니까 문제다. 이걸 이중 구속(더블 바인드)이라고 한다. 그 처방이 뭐냐 하면 이중 통합이다.


문제는 그런 정신분열적 현상이 대한민국에서 유난히 심하다는 데 있지 않은가?


세계 경제의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의 동아시아로 옮아왔다. 전문가들은 다 그렇게 본다. 그러니 여기가 부산할밖에. 그 와중에 ‘한국 전략’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시대를 모르고 반미니, 친중이니 하는 낡은 정치적 판단을 하니까 문제다. 우리는 미국과의 관계가 군사적 문제만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기업가·이민자·유학생·여행자가 다 연결돼 있다. 게다가 중국과 미국은 짝짜꿍하고 있는데 ‘반미 친중’ 하면 어쩌겠다는 건가. 현실적·객관적 판단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국운이 비약할 때인데, 그 직전의 어둠이 정신분열로 나타나는 거다. 이런 각축, 쏠림 현상을 넘어가야 한다. 싸우지 말고 평화적인 토론·제안과 격조 높은 논쟁을 하자는 것이다.


‘김지하 시인 구명을 위한 작가 101인 선언’을 계기로 결성된 민족작가회의와는 이념적으로 입장이 다른 ‘문화미래 포럼’이 발족했는데….


민주주의 좋다는 게 뭔가. 표현·언론·결사의 자유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러 결사 안에서 작품을 경쟁하고 미학적 토론하고…. 좋다. 하지만 지금 내가 보기에 (보수적 작가라는) 복거일씨나 이문열씨가 하는 것이 이른바 진보라고 주장하는 쪽과 제대로 충돌을 못하고 있는 것도 같다. 사실 문학 이념, 정치 이념은 다 끝났다. 금강산 방문과 같은 것들은 다 이벤트이다. 진지하게 토론하고 싸우는 게 없다. 그래서 거기 안 나간다. 이북 가는데 3백만원 내야 한다. 내가 보기엔 가서 효과도 있을 것 같지 않고. 내가 늘 강조하는 것은 그런 데 작가나 예술가가 빠져들 때가 아니라 새로운 미학, 새 문명에 대한 예감, 새 사회에 대한 동경을 바탕으로 낡은 것들을 가차 없이 비판해야 한다는 것, 진짜 작품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내가 생명과 평화의 모토로 압축한 것이다.


김시인이 출간한 시집들을 연대순으로 보면 제목만으로도 내면의 변화가 감지된다. <황토> <애린(愛隣)> 등…. 시 정신-시혼의 변화인가, 아니면 시대 상황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자세의 시적 변용인가?


중요한 질문이다. 세 가지로 요약하겠다. 첫째, 감옥 독방에서만 내리 7년을 있는 동안, 거친 말로 하면, 정신이 좀 갔었다. 천장이 내려오고 벽이 좁혀 들어오고…. 그 당시에는 초기와 달라서 외국에서도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그룹이 많아지면서 내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처럼 돼 있었다. 그러니 내가 좀 힘들다고 손들고 나가기도 힘들어. 외국인들한테도 한국 놈 형편없다고 되어버리니까. 김 아무개라는 놈이 한국 사람 얼굴처럼 되어버린 거지.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거다. 그때 이상한 풀들이 감옥 철창에 솟아나오고 민들레 씨가 들어와 햇빛에 반짝이는 걸 보노라니 울음이 터지더라. 허공에서 생명, 생명, 하고 에코가 울리더라. 반 미친 거지. 기독교 신자라면 그것이 계시랄 수 있지만 내 생각엔 정신병이었다.
하여튼 풀도 감옥으로 들어오고 땅도 하늘도 담 안팎으로 연결되어 있고 생명이 밖에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도 고등 생명이니까 감옥 안에 앉아 있어도 가족과 함께 있는 거였다. 그때부터 거기서 100일 참선을 시작했다. 꼭 100일 만에 박정희씨가 죽었다. 참선하면서 ‘인생무상,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갑니다’ 이 세 마디 말이 물건처럼 밑에서 떠오르더라. 내 마음에 참선 내용이 물건처럼 형상화된 것이다. 용서라기보다 허무를 느꼈다. 그리 대단한 줄 알았던 당신도 가고, 나도 가고…. 생명과 허무(공), 그 얘기가 그때 나에게 들어왔다. 거기서 시작된 게 생명이다. 둘째,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애들처럼 손을 쥐암쥐암 하고 동그라미를 그리는 버릇. 그게 여성성, 부드러움, 말랑말랑, 동그란 것을 상징하는 것인데, 방은 차고 녹슬고 네모, 이런 것뿐이라 그 반대를 그리워한 거다. 그 안에서 <애린(愛隣)>이 튀어나온 것이다. 애린은 부드럽고 쓸쓸하고 슬픈 걸 말하는 것이다. 나를 알아준 유일한 평론가인 고 최광석이 그때 나에 대해 ‘곡선으로 직선을 포위한다. 여성성으로 당시 독재를 포위하고 있다’고 썼다. 최근에는 전남대 한 학생이 석사과정에서 내 초기 시의 생명성에 대해 논문을 썼다. 내가 스물셋에 쓴 <황토>라는 시 안에, 거적 밑에서 죽어가는 애비, 영산강 강물에 숭어가 뛰어오르는 걸 대비시켰더라. 저항에서 생명으로 ‘전환’한 게 아니라, 초기 이면에 있던 주제가 나이 들면서 표면적 주제로 ‘떠오른’ 것이다. 마치 시가 꽃이 피고 열매 맺고 땅으로 떨어져서 썩고 또 탄생으로 연결되는 것과 같다. 초기 시에 죽음과 생명의 대척적 관점이 이미 다 들어 있었다. 셋째, 그 안에서 생명을 느껴 독일 생태학 공부를 했다. 생태학이라는 객관적 학문만 가지고 환경 문제에 대응할 수 있다고 느꼈다. 문명의 큰 이동을 전망하기 위해서 불교, 간디즘, 인디언의 영적 전통…. 이걸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경도 외우고 참선도 했다. 유명한 고생물학자이자 진화론자인 테이아르 드 샤르댕이란 사람이 있다. 그가 말한 개체와 전체 사이의 원리란, 내면에 의식이 있고 외면에 복잡화가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개체가 전체를 자기 나름으로 깨달아서 조직화한다는 진화의 법칙이다. 감옥 내에서의 변화, 그리고 공부를 통해 그것이 확신으로 굳어지니 나와서 생명 타령을 시작한 거다.


생명 사상은 결국 휴머니즘인가라고 물어도 되나?


아니다. 휴머니즘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공성이라면, 나의 생명 사상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생태적 공공성을 말한다. 예를 들면 천성산 문제에 대해 대법원이 도롱뇽은 소송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대리할 수 있다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생명 계약이랄까(인간 간의 사회적 계약 말고), 이런 게 법·제도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법이 환경 문제에 대해 정당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우선 철학과 문명론이 바뀌어야 한다. 유럽은 이미 바뀌고 있다


요즈음의 학생 운동을 어떻게 보나?


우리 세대는 정치·경제가 키워드였지만 오늘의 젊은 세대는 문화가 키워드다. 문화가 국가 경쟁력이고 새 시대의 화두다. 그러니 ‘운동’하지 말고 문화를 통해 ‘활동’을 해야 한다. 소그룹이라도 좋으니까. 데모를 하더라도 청년실업 문제를 한류를 통해 해결하자는 쪽으로 가야지.


그렇지만 문화 콘텐츠의 부족이라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이제는 2기 한류(포스트 한류)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전문가들은 2기 한류에서는 작품성, 즉 콘텐츠하고 미학적 재능이 중요하다고 본다. 간단히 말하면 새로운 한류 브랜드는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이미지와 그 이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와의 결합이다.


당신의 삶을 스스로 어떻게 ‘해석’하고 있나?


하나는 ‘바보였다’는 생각이다. 바보니까 그렇게 살았다. 마누라 고생시키고 정신병으로 입원하고 그동안 애들 대학 못 가고. 두 놈 보기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내가 내 인생을 돌아보면 그렇게 안 해도 합리화할 수 있었고 지금 그렇게 안 한 놈이 판을 치는데 뭐 하러 사활까지 걸었나 싶다. 스스로 바보라고 하는 건 위선이 아니라, 내 과거를 내가 자랑할 게 하나도 없다는 거다. 나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은가. 가족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이 들수록 자꾸 느낀다(이 대목에서 그는 울먹였다). 둘째는 (‘이 말이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운동에 대해 해야 할 일 했다고 봐주면 고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보상을 바라지도 않았고 민주화됐다고 권력을 잡은 것도 아니다. 민주화 운동의 정점인 반유신 운동에서, 핵심은 헌정 질서 회복이었다. 그것은 민주 시민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의무였지 내가 잘난 사상가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런데 왜들 지금 폼을 잡는지. 집권자들이 경제학 숫자도 모르고 심지어 권력 내부의 어떤 이론가들은 맑스의 자본론도 제대로 안 읽은 것 같다. 무식하기 짝이 없고 겸손을 모른다. 가만히 좀 있자고 말하고 싶다. 우선 나부터 그렇게 하고 있다. 생명 운동 하고, 시 쓰고 그 정도만 하고 싶다.


파란 많은 삶을 산 시인·사상가로서 정의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꼭 얘기하고 싶은 건, 처음부터 내가 정치 지망생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로서의 정열 때문에 도전한 것이고 또 민주 시민의 의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시련이 너무 길었다. 내 나이 67세인데, 최근 내 시에 ‘외롭다’는 말이 많다. 시인으로서 내 삶을 돌아보면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을 통해서 알게 된 게 있다. 20대에는 공동체가 중요하고 민족이 중요하다 봤는데 이제는 (진화론도 그렇고) 개체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니 외로움을 감내한다. 단, 비슷한 이들과 통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말하길 ‘밀실의 네트워크’ ‘방콕(방 안에 틀어 박혀 있기) 연합’이라더라. ‘아이덴티니-퓨전’, 즉 개성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이 결합하는 것이 이 시대의 진리이자 생명의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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