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질고 애달픈 의붓 남매의 사랑 <천년학>
  • JES 제공 ()
  • 승인 2007.04.1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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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까부다 갈까부네 임을 따라서 갈까부다/천리라도 따라 가고 만리라도 따라 나는 가지/하늘의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어도 일년 일도 보련마는/우리 임 계신 곳은 무삼 물이 막혔간디 이다지도 못 오신가.”
중동으로 떠나기 전 동호(조재현)가 의붓 누이 송화(오정해)를 찾아가 이별을 알린다. 송화는 조용히 <춘향가>의 한 대목을 부르고, 동호는 북장단을 치는 시늉을 하며 소리에 젖어든다. 의붓 남매의 사랑은 이처럼 오작교를 사이에 둔 견우와 직녀보다, 신분의 벽이 가로막은 이몽룡과 춘향의 사랑보다 모질게도 애달팠다.
거장 임권택 감독이 100번째 작품 <천년학>(키노투)을 내놓았다. 1993년 <서편제>의 속편 격으로 전국을 유랑하는 소리꾼 유봉(임진택) 밑에서 자란 의붓 남매 송화와 동호의 사랑 이야기다. 임권택 감독은 “학이 날갯짓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듯 소리로 승화된 영원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평생의 첫 멜로 영화다”라고 말했다.


영원히 기억될 거장의 명장면들


 
<서편제>에서는 눈을 잃은 소리꾼 송화의 한이 <진도아리랑>에 맞춰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의붓 남매의 사랑이 <춘향가>를 타고 하늘로 울려퍼지며 전편의 여운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 가족이지만 가족이 아니고(송화와 동호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다르며 유봉 밑에서 자라 남매가 된 사이다), 사랑이지만 사랑이 될 수 없는 두 사람의 마음이 <춘향가>의 판소리로 표현된 것, 그 자체가 감동이다.
첫 장면인 선학동의 풍경에 대한 묘사부터 신비로운 한국의 자연미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포구에 물이 차오르고, 그 위에 학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뒷산의 형상과 겹치면서 선학동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를 알려준다. 바로 이 장면을 위해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 제작 당시 <천년학>을 염두에 두었으나, 선학동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완벽하게 그려낼 수 없어 포기했다.
오래도록 기억될 명장면 중 또 하나의 장면. 영화 후반, 죽음을 앞둔 만석꾼 노인의 애첩이 된 송화가 임종을 지키면서 소리를 부르는 장면이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깨려는 꿈 꿈은 꾸어서 무엇을 할 거나”(남도 민요 <흥타령>)
 
구슬픈 송화의 소리를 타고 창밖에서는 매화 꽃잎이 바람에 눈처럼 흩날리며, 노인은 편안히 눈을 감는다.
흐드러지게 피자마자 떨어지는 매화 꽃잎처럼 우리네 삶이 헛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천년학>은 거장의 100번째 작품이 되기에 충분했다.
전작에 이어 송화를 연기한 오정해의 눈빛은 세월을 타고 한층 깊어져 있었다.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고 그 뜻을 따라 죽을 때까지 소리를 파고드는 송화를 자연스레 담아냈다. 조재현도 특유의 강렬한 눈빛을 자제하고 북장단의 손짓 하나하나로 동호의 내면을 표현하며 오정해의 연기와 화합했다. 동호가 속한 유랑단에서 <적벽가>를 맡아 부르는 소리꾼 조명창 역할은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인 송순섭이 직접 연기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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