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통합이라는 거대한 텍스트
  • 김동윤(건국대 교수·EU문화정보학) ()
  • 승인 2007.04.1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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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브뤼셀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본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사전에 아무 연락도 취하지 않고 찾아간 터라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한국인 특유의 돌파력으로 문화교육 담당관 인터뷰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말을 건네자 EU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 프로그램 담당관과 통화가 되었다. 그는 점심 약속을 취소하고 직원 2명과 함께 한 시간 남짓 EU의 교육 철학 및 진행 중인 프로그램 등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는,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은 대학생들이 학비 지원을 받아 자신이 원하는 대학을 어디든지 옮겨 다니면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인기가 있다고 말했다. 교육 분야는 유럽 통합에서 가장 뛰어난 성공 사례로 꼽을 수 있다.
EU 문화정책 담당관도 만났다. 프랑스 명문 파리 정치대학 출신답게 매우 지적인 그녀는 문화도시 선정 등 진행 중인 프로젝트와 성공 사례를 소상하게 얘기했고 한국에서 듣기 힘든 EU의 속내도 들려주었다.


작은 계획과 구체적 실천이 역사를 바꾼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유럽 통합의 핵심은 EU의 문화적 다양성과 정체성 형성이다. 전 EU 집행위원회 위원장 자크 들로르는 1950년 당시 양차 대전과 유대인 학살을 경험한 유럽이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고 회고했다.
처음 장 모네가 제시한 유럽공동체의 철학과 비전에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망의 선언이 불을 댕겨 소규모의 유럽 석탄 철강공동체가 탄생되었다. 항상 그렇듯이 거창하고 큰 구호나 슬로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현 가능한 작은 계획과 구체적 실천이 역사를 바꾸는 것이다.
EU의 주역들은 언제 전쟁 상황이 재현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을  생생한 과거 기억의 간직과  용서, 약속과 같은 가치들을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 로베르 슈망은 용서와 약속을 통해 유럽의 미래를 재창조하자고 말했다. 장 모네는 유럽의 국가 연합을 꿈꾼 것이 아니라, 단일하고 통합된 공동체, 하나의 유럽인을 목표로 삼았다.
각기 다른 국가·민족의 정체성과 층위가 다른 문화의 다양성이 공존하는 상황을 자크 들로르는 ‘창조적 상충 국면’이라고 규정하고  이것을 EU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EU 정체성의 구성 요소로서 로마법, 고대 그리스 정신, 기독교 문화와 함께 무신론, 자기 성찰, 민주주의 같은 계몽주의 유산 등을 꼽았다.
올해는 로마 조약이 체결된 지 50주년 되는 해이다. 1950년에 슈망 선언, 유럽 석탄 철강공동체 결성이 있었고, 1957년에 로마 조약, 1992년에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2002년 유로화 통용 등의 과정을 통해, 현재 27개국이 거대 유럽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EU의 앞날은 순탄한 것일까? 벌써 이곳저곳에서 균열의 목소리들이 들리고 있다. 코앞에 닥친 프랑스 대선에서 EU는 중요 이슈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유럽 통합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전세계의 지역 블록화 추세에 비추어서도 EU의 정치·경제·사회·군사적 통합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EU는 거대한 경제 블록이자 정치철학적 비전을 가지고 진행되는 원대한 프로젝트이다. 뿐만 아니라 J 리프킨, 자크 아탈리, 울리히 벡, 에코, 지젝, 하버마스, 푸코 등 유럽의 지성들이 저마다 각 나라의 언어로 써 나가는 거대한 하이퍼 텍스트이기도 하다. 인류의 모든 역사가 실험되는 상상력의 공간이다.
여기서 중요한 가치는 자유·평등·연대감·민주주의·보편성이다. 때문에 EU는 영원한 진행형이고 EU의 정체성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구축해 가는 것이다.
EU의 사례로 볼 때 동북아 공동체를 꿈꾸는 우리로서는 이웃 국가와의 FTA 체결 과정에서 동북아 공동체의 정체성도 함께 논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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