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악과 공포는 있지만 보복과 경멸은 없었다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7.04.2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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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희 총기 난사 사건 이후 미주 한인 사회 르포

 
조승희씨가 저지른 총격 난사 사건 파장이 부정적으로 미칠 것을 걱정해온 미주 한인 사회는 미국 언론과 사회의 반응이 특별히 한인을 겨냥하지 않고 있다는 데서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 대책 마련에 부심 중이다.
버지니아 공대(버지니아테크)에 재학 중인 1천명에 달하는 한인 및 한국 유학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건 발생 직후 한인 학생들에 대한 불상사 발생을 우려해 학교 기숙사를 떠나 귀가하거나 워싱턴 DC 등에 있는 친지를 찾아 학교가 조용해질 때까지 몸을 피하고 있다. 교내 인터넷을 통해 아시아인에 대한 부정적 메시지가 나돌고 있기 때문이다.
4월18일 희생자 장례식이 열린 버지니아테크에서 한 한인 재학생은 “(보복이 무서워) 다른 대학으로 옮겨야겠다”라고 말했다가 미국인 학생들로부터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는 위로를 받았다.
버지니아테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인 밀집 지역인 애넌데일의 동포들은 사건 발생 직후 범인이 한국인 학생임이 밝혀지자 경악하고, 한인 사회에 대한 미국인들의 부정적 반응을 걱정하며 술렁였다. 흥사단 워싱턴 지부의 전해종씨는, 사건 다음날인 17일 애넌데일의 한인 상가들은 혹시 있을지 모른 불상사에 대비해 업소 문을 일찍 닫기도 했다고 전했다. 워싱턴 지역 한인회 김옥순씨는 “18일 현재 한인 사회에 별다른 외부 반응이나 징후가 없다”라고 전했다. 뉴욕에서는 보복성 폭행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92년 흑인 폭동으로 큰 피해를 보았던 로스앤젤레스 한인들은 이번 버지니아테크 사건이 제2의 반(反)한인 폭력 사건으로 연결될까 봐 불안해하고 있다.


일부 언론, 한인 사회 책임론 거론


 
박계영 교수(UCLA 인류학과 )는 자신이 접한 미국인 절반가량이 이번 사건과 한인 사회의 책임을 연결시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고 경계했다. 그리고 일부 소수 미국 언론이 이번 사건을 외국 유학생과 한국인에 초점을 맞춘 기획 보도를 한 사례에 매우 우려하고 있다. 박교수는 이처럼 선입견을 앞세운 보도는 한인 유학생과 한인 사회에 부정적 인식과 편견을 심어줄 가능성이 있다고 걱정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가정들은 어린 자녀가 있을 경우 학교에서 친구들의 놀림이나 손가락질받을 것을 염려해 자녀들에게 특별 당부를 하고 있다. 조승희 사건이 거론되면 ‘조승희 개인의 문제’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개인적으로 매우 유감’이라고 말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한인 사회는 사건이 발생한 후 며칠 지나면서 주변 미국인들과 대다수 주요 언론이 이번 사건을 조승희의 개인적 범행으로 생각한다는 반응을 보이는 데다 한인 업소들에 대해 욕설이나 위협적인 전화가 걸려오는 일도 없어 일단은 안도하는 모습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4월17일자 사설에서 이번 사건이 인종 문제로 번질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 사설은 이번 사건을 두고 어느 특정 대상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의 생각을 갖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하고, 지금은 희생자들이 흘린 피와 가족의 고통을 존중하는 숙연한 자세가 필요할 때라고 강조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 리처드 코헨과 유진 로빈슨은 사건의 핵심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조승희 개인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뉴욕 타임스도 사건의 배경 설명을 한인이나 한국 또는 불특정 다수가 아닌 조승희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이번 사건 자체가 총기 소지 자유 및 할리우드 영화나 컴퓨터 게임의 폭력성 등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와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미국 학교 내 총격 사건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건 직후 희생자와 희생자 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주미 한국대사관과 한인 밀집 지역 주재 총영사관들도 각각 조의 성명을 발표했다. 각 지역 한인 사회의 주요 단체가 줄 이어 조의 성명을 내고 있다. 워싱턴 한인연합회(회장 김인덕)는 4월17일 촛불조의집회를 열었고, 18일 오후 2시 버지니아테크에서 열리는 추모 행사에 간부들 모두가 참석했다. 뉴욕 총영사관은 17일 뉴욕과 뉴저지 주 한인단체장 회의를 열어 한인교회연합회를 중심으로 추모 예배를 갖기로 결정하고 추모예배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회의에서는 한인 사회가 다른 인종 및 다른 커뮤니티와 유대 강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한인회를 중심으로 추모촛불예배를 갖고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모금을 시작했다. 한인회는 희생자 추모 조기를 회관 앞에 게양했다. 민병휘 교수(전 뉴욕 주립대)는 노대통령의 신속한 성명 발표와 함께 미국 주재 외교 공관 및 한인 사회가 정중하고 신속하게 조의를 표한 것은 한인 사회에 대한 차분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 적지 않은 몫을 했을 것으로 분석했다.
이번 사건을 한인 이민 사회에 대한 점검과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심형인씨는 조승희씨의 부모가 워싱턴 인근에서 세탁소를 운영한다는 사실에 동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심씨는 세탁 일은 근무 시간이 길고 개인적 여유 시간이 거의 없어 자녀 돌보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하고, 조씨의 부모 역시 바쁜 나머지 아들을 정신적으로 보호하고 좋은 인성을 가르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인 부모들, 정신 질환에 대한 인식 바꿔야


 
장수경 박사(임상심리학)는 특히 조승희씨처럼 우울증을 앓고 있는 자녀를 두고 있을 경우 부모가 이를 정신병으로 인정하지 않고, 외부에 이를 알리는 것을 기피해 의사마저 만나는 것을 꺼린다고 지적했다. 장박사는 정신 질환에 대한 한인 부모들의 잘못된 인식도 이번 참사와 같은 비극의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인 이민 가정의 부모 자식 간 대화 단절 문제도 이번 사건에 비추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민병휘 교수는 조승희씨의 부모가 영어가 원활하지 못해 한국말이 서툰 조승희씨와 대화가 쉽지 않았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이민해 미국식 교육을 받은 조씨가 자라면서 미국 사회 및 학교 동료와 융합하지 못했고, 또 고교 1학년 때부터 우울증 증세를 보인 것을 진작에 알았다면 문제 해결을 위해 아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했어야 했다고 그는 강조했다. 자녀가 조씨처럼 우울증 증세를 가진 경우 부모의 관심과 대화는 더 큰 비극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로 생각한다고 민교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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