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가 달라지고 있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 왕성상 편집위원 ()
  • 승인 2007.05.2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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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상생의 길을 여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는 노조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임금 인상과 투쟁을 위한 투쟁을 일삼던 ‘강경 노조 전성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 대한민국 노조의 현주소?

 
노조가 달라지고 있다. 노사 상생을 위한 무분규 선언 기업들이 늘고, 나눔 봉사 등 부드러운 이미지를 주는 노조가 생겨나고 있다. 임금 인상에 목매고 파업에 힘을 쏟는 ‘투쟁성 노조’는 옛 이야기가 되고 있다. 세상 흐름의 변화가 가져다준 현상들이다.  
노조의 변신은 임금 동결·파업 자제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의 총파업 자제와 함께 자동차·화학·철강·조선 등 국내 대표 제조업체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 올봄은 해마다 거듭되었던 ‘춘투’가 뜸해졌다. 있어도 아주 미미하다.
이는 노동부가 최근 내놓은 <노사 관계 현황 및 전망> 자료에서도 잘 나타난다. 올 1분기 분규 발생 건수는 12건. 지난해(19건)보다 36.8% 줄었다. 최근 5년 사이에 가장 적은 것이다. 같은 기간 근로 손실 일수는 4만2천2백78일. 지난해 1분기(8만4천3백78일)의 반으로 줄었다. 서울메트로(1월30일), 서울시내버스(2월27일) 등 주요 사업장에서 분규 없이 임금 협상을 끝냈다. 지하철과 버스가 멈추었던 지난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노사 협력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 지역·업종·사업장 단위의 노사 화합, 산업 평화 선언 사례가 줄을 잇고 있다. 지난 3월 △현대중공업의 경영 철학 노사공동선언 선포식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한 가족 노사화합 선포식을 비롯해 1분기 중 53곳에서 노사가 손을 맞잡았다. 특히 코오롱, GS칼텍스 등 전투적 강성 노조들이 임금 동결을 자청했다. LG필립스LCD·S&T모터스도 동참했다. 노조가 상생의 길을 선택한 사례들이다.

 

투쟁에서 상생으로 변신한 노조의 행복


코오롱 노조는 상생을 택한 대가로 회사로부터 ‘감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GS칼텍스 노조도 회사의 1조5천억원 설비 투자 계획을 끌어냈다. GS칼텍스 노조의 임금 동결 제안 움직임은 올 초부터 시작되었다. 회사가 장기적으로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올해 설비 증설에 6천억원을 투자하는 데다 석유 제품 이윤이 박해져 이익이 대폭 줄 것으로 보고 노조 간부들이 나선 것이다.
코오롱·GS칼텍스 두 노조는 3년 전까지만 해도 강성이었다. 코오롱 노조는 민노총의 핵심 지역인 경북 구미에서 ‘전위 부대’로 불릴 만큼 거셌다. 2004년에는 64일간 파업한 적도 있다. GS칼텍스 노조 또한 마찬가지이다. 민노총 소속으로 강경 노조의 대명사로 일컬어졌다. 3년 전 20일 동안 파업하면서 경영주를 모욕 주고 강경 투쟁에 앞장섰다. 하지만 지금은 옛날 노조가 아니다. 그때의 투쟁을 노조 변신의 계기로 삼은 것이다. 코오롱 노조는 파업 뒤 5백여 명이 구조 조정당해 ‘강경 투쟁이 오히려 손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임금 조정을 회사에 맡겼고 지난해 말 민노총에서 탈퇴까지 했다. ‘하루 두 끼만 먹더라도 동료의 일자리를 지키겠다’라며 임금 동결을 자청한 노조위원장의 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GS칼텍스 노조 역시 많이 변했다. 불법 투쟁 뒤 회사가 6백명을 징계하고 조합비 5억원을 가압류하는 등 원칙적 자세로 맞서자 변신을 꾀했다. 임금 인상이 아니라 회사에서 월급받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상생의 길로 들어선 결과다. 삶의 터인 회사에 해를 끼치면 후유증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점을 알고 환골탈태했다는 얘기다.
투쟁에서 상생의 길로 돌아선 이들 노조의 성공 사례는 다른 사업장에도 귀감이 되고 있다. 노조 변신에 회사는 ‘고용 보장’ 등으로 화답하고 있다. 노조가 변하면 회사도 달라지고, 그 혜택은 결국 노조원들에게 돌아간다는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분위기다. 학계의 한 전문가는 “상생을 위한 노사 협조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노조가 연대 정신을 발휘한다면서 남의 회사 파업 현장에 가서 투쟁을 부추기는 행동도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라고 말했다.
노조의 변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악화되는 경영 환경을 이겨내려고 노사 관계 혁신에 나서는 곳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노사가 역지사지 정신으로 경영 위기를 이겨낸 노루페인트 △만성 분규 사업장으로 파국을 맞았다가 노사 협조로 생산성을 높이고 정리 해고 근로자를 복직시킨 GM대우 △망해가는 기업을 살려내기 위해 임금 동결로 설비 현대화 자금을 마련하고 흑자로 돌아선 창원특수강이 생산적 노사 관계의 전형이다.

 
 
상급 단체인 민노총·한노총도 ‘새 길’ 걸어


봉사 활동으로 부드러운 이미지 심기에 힘쓰는 노조들도 변화 물결을 타고 있다. 혼자 사는 노인 돕기, 장학금 전달 등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하며 변신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노동자총연맹(한노총) 서울지역본부 대의원대회장. ‘산간 오지 농촌과 자매결연 맺기’ 등 노조와 상관없어 보이는 사업들이 안건으로 올랐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노조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라는 소리가 터져나왔으나 가결되었다. 이제는 노조도 사회적 책임에 눈을 돌려야 할 때라는 의견에 다수의 대의원들이 지지했다. 서울노총에는 3백여 개 노조가 있다. 
주택관리공단 노조는 지난해 11월 서울 등촌동 주공1단지 영구임대아파트에 혼자 사는 노인 등 10가구를 찾아 도배를 하고 장판을 깔아주었다. 단지 놀이터 3곳도 손보았다. 울산 현대중공업 노조는 가난한 방글라데시 어린이들에게 학교를 지어주기 위해 ‘사랑의 빵 나누기’ 모금 운동을 펼치고 있다. 생산 현장과 사무실에 빵 모양의 저금통까지 비치했다. LG전자 노조는 경영진과 함께 생활이 어려운 실업계 고교생들에게 ‘산업 인력 육성 장학금’을 주고 있다. 직원들 월급에서 1천원 미만의 돈을 떼어 모은 돈으로 저소득 가정의 중·고생들에게 교복도 맞춰주었다. 한국도로공사 노조는 전문 봉사 단체와 다름없다. 올해부터 서울역에서 1천5백여 노숙자들에게 매주 두 번 밥을 퍼주고 있다.
노동 단체들도 단위 노조들 못지않게 달라지고 있다. 민노총은 올 1월 온건파 이석행 위원장 취임 뒤 ‘실속 없는 총파업을 자제한다’는 방침으로 재계와의 관계 개선에 힘쓰고 있다. 한노총은 노동계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지난해 6월 산업자원부와 더불어 미국 뉴욕에서 한국 경제 설명회를 열었다. 이어 11월 말부터 12월 초에는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유럽도 찾았다. 한노총 실무자 4명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직원 3명과 ‘해외 투자유치 시찰단’을 구성해 현지를 누볐다. 투자진흥청·경영자연맹 등을 방문해 우리의 투자 여건을 알리고 그곳 기업들의 노사 협력 실태도 살폈다.
유럽 기업 관계자들은 “한국 노동계 하면 ‘빨간 머리띠’로 대변되는 강성 이미지부터 떠오르는데 외자 유치를 위해 먼 곳까지 찾아왔다는 점이 신선했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을 ‘죽을 때까지 파업(Strike to Death)’한다는 식으로 보도하던 외국 언론들의 시각도 바뀌고 있다. 한노총 관계자는 “노동운동도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어 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중앙 단위에서의 노·정 대화도 활발한 편이다. 최근 한노총·노동부장관·산별 노조 대표 간담회에 이어 민노총과 노동부장관 등 7개 부처 장관 면담 등이 있었다.
노사 관계가 ‘해빙 무드’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투쟁 지향적 노조 활동이 기업과 국가 경쟁력까지 깎아내리는 데다 파업에 대한 여론이 곱지 않다는 인식 때문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지난해 임단협 관련 파업,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반대 집회, 비정규직 법안 반대 등의 파업으로 노동계 체력이 많이 빠졌다는 점도 원인으로 꼽았다.


6~7월이 ‘노사 평화 정착’ 고비 될 듯


하지만 이같은 노조의 변신이 영속성을 갖겠느냐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일과성으로 끝나거나 언제 다시 지난날 모습으로 되돌아갈지 모른다는 의문도 없지 않다. 시간을 두고 더 지켜보아야 한다는 시각이다. 노사 평화 정착은 6∼7월이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올해는 산별 교섭이 처음 시작된다. 그 중에서도 금속노조 현대자동차 지부(옛 현대차 노조)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FTA 체제에서 무관세로 미국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기 때문에 업계와 경영진들이 신경을 쓰고 있다. 산별 노조 전환 움직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걱정하는 눈치이다. 노동계 관계자는 “유럽은 산별 노조에서 다시 기업 노조로 방향을 돌리는 추세이다. 국내 여건과 현실을 감안할 때 신중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산별 전환이 노조 결집에는 유리할 수도 있지만 단점도 많고, 무조건적 전환과 그에 따른 정치적 투쟁은 노동운동의 순수성을 왜곡시킬 수 있다”라고 말했다.
1980년대 이후 사회운동의 동력이었던 노동계가 위기를 맞고 있다. 민노총은 지난해 FTA 반대 등을 이슈로 일곱 차례 파업을 이끌었지만 결과는 시들했다. 생활고에 지친 노동자들의 참여를 끌어내지 못해 총파업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참여율은 낮았다. 노조 조직률도 통계 집계 이래 최저(10.3%)다. 반면 노사 갈등의 수위는 높다. 외국 기관들의 국가 경쟁력 보고서에서 사용자의 노사 관계 만족도가 평가 대상국 중 ‘꼴찌’로 나타났다. 노사 모두 벼랑 끝에 서 있어 대책 마련이 절실한 실정이다.
노사 평화 정착은 FTA와 함께 국가 경쟁력 향상의 양대 버팀목이라는 점에서 재계는 반기고 있다. 한 경제 단체 관계자는 “FTA 협상 때 진통은 있었지만 결과는 생산적이었다. 노사도 이들의 협상 전략을 배워야 할 때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전제 조건으로 대화·타협·양보를 들었다. 상생의 노사 관계가 이어지면 회사는 경쟁력 확보를, 노조는 실리를 챙길 수 있고 근로자는 ‘고용 보장’의 성과를 얻는다고 말했다.

노사 상생 길라잡이, 길 나섰네

근로자와 경영자의 상생을 위한 ‘노사 발전 재단’이 가동되고 있다. 지난 4월5일 닻을 올린 재단은 노사의 새 패러다임 만들기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재단은 노사 단체 대표들이 함께 끌어가고 있다. 이용득 한국노동자총연맹 위원장, 박인상 전 국제노동재단 이사장, 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공동 이사장을 맡았다. 실무 조직을 이끌며 업무를 챙기는 일은 안영수 초대 사무총장(전 노동부 차관) 몫이다. 여기에는 근로자·사용자·정부를 대표하는 10여 명의 이사가 참여하고 있다.
재단은 지난해 한국노총이 제안해 싹을 틔웠다. 올해 1월11일 설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석 달 동안의 준비 작업 끝에 문을 연 것이다. 재단 출범은 정부가 노사 사이에서 조정하던 관계를 뛰어넘어 이해 당사자들끼리 머리를 맞대 상생을 꾀한다는 점에서 뜻이 깊다.
주요 추진 업무는 세 가지다. △노사 공동 노동 교육을 통한 합리적 노사 인프라 구축 △노사 공동 고용 창출 및 인적 자원 개발 △중소 영세 사업장 복지 확충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재단 밑에 고용인적자원개발사업팀·노사협력복지사업팀·교육연구컨설팅사업팀·기획조정팀 등이 짜여 있다. 올해 예산은 22억원. 21개 세부 사업 등에 쓰이는 돈이다.
이용득 공동이사장은 “재단은 분배 갈등 위주였던 노사 관계 패러다임을 고용과 복지로 바꾸자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 직업 재훈련 등 정부 일을 넘겨받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자리 창출은 민간 부문인 노사가 할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재단이 넘어야 할 산도 높다. 민주노총과 전국경제인연합회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 또 정부 지원을 벗어나 객관성 있고 안정적으로 재원을 확보하는 일도 당장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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