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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풍경과 상처

중산층 3인의 ‘3색 삶’ 르포/“식구들이 무시할 때 가장 슬펐다”

홍윤선 (자유 기고가) ㅣ 승인 2007.07.09(Mon) 11: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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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임창렬 경제부총리(가운데)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왼쪽),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가 IMF 긴급 자금 지원을 받기로 합의한 후 악수하고 있다.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인 1994년, 이화영씨(47·가명)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직장에 다녔다. 그때 그가 받은 연봉은 5천만원 정도. 직장 일도 적성에 맞았고 근무 환경도 훌륭해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휴가철이면 강원도의 콘도미니엄을 빌려 3박4일쯤 쉬다 오고 평소 주말이면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다니기도 했다. 장남이던 그는 부모를 모시고 살아 내 집 마련 걱정도 없었다. 아버지도 사업을 하고 있어 경제적으로 전혀 부담이 없던 그였다.
그러던 그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97년 말부터이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그의 직장은 계열사가 줄줄이 도산하면서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 온 나라가 구조조정에 휩싸이자 취업은 꿈도 꾸지 못하고 집에서 쉬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생활이 이렇게 심각한 상황으로 내몰릴 줄은 몰랐다.
아파트(전세)로 이사가면서 남은 돈 3천만원이 통장에 있었고 실업급여로 매달 100여 만원의 돈을 꼬박꼬박 받고 있던 터라 쉴 만했던 것이다. 더욱이 일자리를 알아보아도 아파트 경비나 주차장 관리원 자리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2년가량을 무직 상태로 지내며 재산을 까먹고 있던 그는 어느 날부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행히 한 선배의 도움으로 취직을 했다. 파견사원 형식으로 들어간 회사에서 받은 월급은 1백50만원. 정규직 사원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그나마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4인 가족이 1백50만원으로 한 달을 버티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의 통장 잔고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곧 바닥이 드러나자 그는 현금 서비스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던 그의 신용카드는 연체에 내몰리다 급기야 탈이 나고 말았다. 신용불량자가 된 것이다.
4개의 카드를 쓰고 있던 그는 조흥은행(현 신한은행)·한미은행·씨티은행으로부터 채권 추심을 받기 시작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국민은행에서 받은 마이너스 통장(5백만원)의 환불에도 쩔쩔매야 했다. 추심 전화에 시달리던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신용회복위원회. 그는 이곳에서 조정을 받아 현재 매달 13만원씩 빚을 갚아나가고 있다.
그즈음 보다 못한 아내가 “직장을 구해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아내가 일하는 곳은 한 백화점 지하 식품부의 협력사. 아내가 받는 월급은 1백40만원. 아내는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야 돌아온다. 아내가 살림을 하지 않아 집안일은 온전히 그의 일이 되었다. 설거지에 빨래, 아이들을 먹이려면 국이며 찌개까지 끓여야 했던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정규직 사원의 절반도 되지 않는 월급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크게 늘어 '비정규직 차별 철폐' 문제가 불거졌다.  
 

단전·단수 통지받고 자살 충동 느껴


   
  가게 얻을 돈이 없어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몰락한 중산층도 있다.  
 

아내의 목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다. 전셋집에서 살다 1억원 정도 융자금을 끼고 27평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매달 50만원가량의 대출 이자를 갚는 것은 그의 몫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용돈이며 수업료, 학원비는 아내가 대고 있다. 팍팍한 살림에 관리비가 석 달까지 밀린 적도 있어 단전·단수하겠다는 통지서가 날아온 날, 그는 13층 높이의 발코니가 낮아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대학(2학년)에 다니는 딸의 등록금 걱정을 하고 있다. 벌써 세 번이나 학자금 융자를 받았는데 또 융자를 받아야 할 지경이니 가슴이 막막하다. 2년 뒤면 작은아이도 대학에 들어간다. 그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는 가족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무시당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무능한 아버지에, 무능한 남편인 그의 자격지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꾸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토로했다. 그의 꿈은 1천만원 정도 되는 빚을 모두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가 사는 것이다. 아이들과 아내의 동의를 얻어야 하겠지만 시골에 작은 집 하나 짓고 텃밭이나 일구며 사는 게 소망이라는 것이다.
장영길씨(43·가명)는 서울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면직물 도매업을 했던 사업가다. 두 명의 종업원을 데리고 하루 매출이 많게는 1천만원에 달했던 ‘잘나가는 사장님’이었다. 그의 가게는 목이 좋아 프리미엄만 3억원을 호가했고 소매도 짭짤했다. 도매는 이문이 박하지만 소매에서 돈을 더 남긴다고 했다.
그의 수입은 월 6백만~8백만원쯤 되었다.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은 그는 사업 수완이 좋다는 평을 받으며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신혼 여행도 뉴질랜드로 다녀왔고 집도 32평짜리 빌라였다. 그런데 중국과의 무역이 본격화되면서 그의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다. 국산의 반값도 되지 않는 중국제 면직물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한국 중산층의 삶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적·정신적 빈곤은 대한민국 평균인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고 있다.  
 

그 바람에 그의 거래처였던 지방 상인들이 발길을 끊었다. 소매 시장도 하루가 다르게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그는 종업원을 모두 내보내고 자신이 직접 영업을 다녔다. 학교를 돌아다니며 커튼을 수주받았고, 모텔을 들쑤시고 다니며 침대 시트를 주문받았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문을 받아 납품하고 받은 어음은 부도가 나기 일쑤였다. 게다가 주문을 받아주겠다면서 다가온 브로커들은 접대만 받고 나서 더 이상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매출이 없고 현금이 돌지 않으면서 그는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는 일이 잦아졌다. ‘납품하고 돈을 받아 그걸로 결제를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거래처에서 날짜를 어기면 곧바로 연체로 이어지는 것을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연체가 몇 번 이어지자 그는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팔고 전세금이 3천만원인 13평짜리 연립주택으로 이사 갔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니 크기 전에 넓은 집으로 이사하면 된다는 계산이 들었다.
사업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동대문 부근에 두산타워며 밀리오레 같은 대형 패션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손님은 모두 그리로 몰려갔고, 광장시장에는 노인들만 반 놀이 삼아 배회했다.
직격탄은 2003년 여름 태풍 매미가 날렸다. 엄청난 비를 퍼부은 매미는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었고 시장도 물난리를 겪었다. 그의 가게에도 물이 들어차 원단이 침수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손해액은 수천만원대에 달했다. 물에 젖은 원단은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그는 당시 ‘망했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한다.
다달이 100여 만원에 달하는 임대료를 낼 재간이 없어 가게를 팔 수밖에 없었다. 사업자 등록증은 그대로 두고 거래처들은 휴대전화로 관리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덩달아 수입이 거의 없다시피 해지자 아내가 패스트푸드점에 아르바이트 사원으로 취직을 했다. 반찬 값이라도 벌어보겠다는 아내를 말릴 수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두 아이들은 아직 학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날이 갈수록 커가는 아이들 때문에 점점 좁아지는 집을 넓혀갈 생각도,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지 대책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큰아이가 어느 날 “아빠,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해?” 하고 물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외환위기 이후 혹독한 구조 조정에서 상당수가 명예퇴직 같은 방법으로 ‘조정’을 당하기도 했지만 모든 직장인이 거리로 내몰린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살아남은 자’들도 있다.  이철현씨(38·가명)도 그 중의 하나에 속한다. 외환위기를 겪은 지 만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중산층으로서의 여유를 누리고 있다.
국책 은행 계열사에 입사한 뒤 얼마 안 되어 겪은 외환위기는 그에게 이제 잊혀진 악몽이다. 그의 사무실에도 그때 구조 조정 바람이 불었지만 그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입사 초년생이라는 딱지가 그를 살려냈던 것이다. 한바탕 바람이 지나간 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금 6천만원가량의 연봉을 받고 있다.
그의 아내도 맞벌이를 하고 있다. 삼성그룹 계열사에 다니고 있는 아내는 생계 차원이 아닌 자신의 성취감을 위해 커리어우먼으로 변신 중이다. 이씨의 재테크는 부동산, 특히 아파트에 집중되어 있다. 한 번 청약에 당첨된 뒤 이를 굴려 사고 팔기를 되풀이하며 그 차액을 불려나가고 있다.
작은 평수에서 점점 더 넓은 평수로 옮겨가며 수익도 커가는 중이다. 적지 않은 연봉에 재테크까지 하고 있는 그의 꿈은 개인 사업을 하는 것이다. 아직 구체적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조직에서 버림받기 전에 일을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맞벌이를 하는 것도 종자돈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의 얼굴에서는 이제 더 이상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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