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장 가는 길이 북적인다
  • 명운화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7.07.0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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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절망 범벅된 ‘욕망의 해방구’…사행성 오락 ‘철퇴’ 후 매출 늘어

 
6월16일 토요일 오후, 경기도 부천시 원종동, 한국마사회(KRA) 플라자 부천지점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 차례 경주가 끝난 뒤여서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경마 정보지를 훑어보며 다음 경주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실내에서는 금연이지만 흡연실과 커피 자판기 주변, 그리고 각층 계단 근처는 연방 담배를 피면서 경마 정보지를 체크하는 사람들로 복잡했다.
경마장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40~50대의 중년들로 넥타이를 맨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구석에는 동일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모여 있었다. 한 택시회사 소속 기사들이었다. 운행 중이던 택시를 세워두고 경마장에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경마장 출입이 오래된 일인 듯 서로 기수와 말에 대한 정보를 서슴없이 주고받고 있었다.
KRA(회장 이우재)는 5월16~20일 과천 서울경마공원에서 ‘제12회 경마문화축제’를 열었다. ‘가고 싶은 축제&함께하는 축제&하나 되는 축제’를 주제로 마상무예와 격구, 제주 투마대회 등 말 관련 이색 행사 및 국악 공연, 게릴라 마당놀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KRA는 이미 오래전부터 경마를 하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도 플라자를 개방하고 있다. 전국의 32개소 플라자를 통해 지역 사회를 위한 기부금 지원 및 지역민들을 위한 문화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문화교실에는 노래교실·꽃꽂이·에어로빅 등 30여 가지 강좌가 개설되어 있고, 80만명이 무료로 강좌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플라자에 어린이를 위한 영어 공부방을 개설해 지역 주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경마를 즐기지 않더라도 가족 단위로 부담 없이 경마공원에 놀러와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플라자를 개방하게 된 취지라고 마사회측 관계자는 밝혔다.

 
 
한국마사회, 도박 이미지 없애기 안간힘


KRA는 그동안 정책적으로 대중과 친근해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문화정책을 펴왔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라고 밝혔다. KRA가 ‘대중에게 한 발짝 더’ 정책을 펴는 이유는 물론 기업의 목적인 매출 증대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난 80년 동안 지속되어온 ‘레저인가, 도박인가’라는 경마에 대한 논쟁을 희석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 원주에서 시민의 반대로 장외 발매소 설치 사업(화상 경마장)이 좌절되었고, 최근에는 부천 상동 지점 이전 문제가 지역 주민의 반대에 부딪혔다. 두 경우만 보더라도 일반인들의 경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소 경마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시민들도 막상 경마장이 자신들의 주거 지역 안으로 들어온다고 하자 반대에 나서는 것이었다.
통계청의 통계에 따르면 공교롭게도 ‘바다이야기’가 당국의 철퇴를 맞은 후 경마장 출입 인구가 늘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KRA 관계자는 “바다이야기 같은 사행성 오락에 대한 정부의 단속이 강화되자 KRA 매출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사행성 오락에 대한 집중 단속으로 사행 인구가 경마·경정·경륜 같은 곳으로 몰려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약경정·경륜·경마의 매출이 지난해에 비해 30% 정도 늘어났다. 지난해부터 매출이 늘어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경제적 거시 지표와 사회 분위기를 보면 KRA의 말대로 레저로 경마를 즐길 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다.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주요 참여 정책 중 하나인 서민 위주의 복지 정책을 꾸준히 폈는데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삶의 질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일자리 창출이나 소득 증대는 둘째치고라도 그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상류층과 서민의 양극화가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무게 덜려고 경마장 간다”


통계청의 ‘1/4분기 가계 수지 동향’에 따르면 전국 가구를 소득별로 20%씩 5개 분위로 구분한 뒤 소득 상위 20%를 하위 20%로 나눈 소득 5분위 배율은 8.4배로 2003년 관련 통계가 작성된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벌어졌다. 도시 근로자 가구의 소득 5분위 배율 역시 5.95배로 1997년 관련 통계가 만들어진 이후 최대 격차를 기록했다. 중산층이 얇아지고 상류층과 서민이 2 대 8로 뚜렷하게 재편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서민들은 경제적 소외감을 느꼈고 상대적으로 부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실 사회가 이에 부응하지 못하자 서민들은 손쉽게 계층 이동을 할 수 있다는 환상으로 사행성 오락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바다이야기와 같은 사행성 오락이 급팽창한 것도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 경주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경주 시간이 다가오자 서둘러 마권을 사들고 초조하게 영상을 바라본다. 마지막 판에 잘만 하면 오늘 하루 동안 잃은 돈을 일시에 회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마침내 경주가 시작되고 말이 달린다. 말이 뛰는 속도에 비례해 사람들의 발뒤꿈치가 점차 올라간다. 드디어 결승선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서는 저마다 자신의 말을 응원하는 외침이 터져나온다. 일순 경마장은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파묻힌다. 이어지는 아나운서의 거침없고 빠른 목소리가 경마장 사람들의 흥분을 고조시킨다. 드디어 경주가 끝나고 사람들의 안타까운 외침, 욕설, 한숨소리가 터져나온다. 그리고 여기저기 경마 정보지가 아무렇게 던져진다. 하루 동안 집착했던 희망이 한순간에 휴지가 되어 나뒹군다.
“재미? 재미로 이 짓 하는 거 아니다.” 경마가 재미있느냐는 질문에 50대 중반의 사내는 경계의 눈빛을 감추지 않으면서 툭 내뱉는다. 자영업을 하다가 외환위기 때 일용직 근로자로 전락했다는 이씨는 10년 넘게 경마장을 드나든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경마를 재미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난 경마를 해서 돈을 벌고 싶을 뿐이다. 돈을 벌어서 집을 사겠다는 그런 거창한 꿈 따위는 없다. 먹고사는 게 힘들고 버겁다. 그 무거운 짐을 덜고 싶을 따름이다. 물론 경마를 해서 무거운 짐이 덜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하다.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 이 짓을 하는 걸 재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석양의 햇살이 먼지 낀 유리창에 비껴드는 가운데 사람들은 계단을 물결 지어 내려가며 담배를 빼어 문다. 계단은 욕망의 그을음인 양 매캐한 담배연기로 뿌옇다. 담배 한모금으로 퇴색되어갈 희망을 간신히 보듬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환상적이고 퇴폐적일지라도 희망인 양 이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을 때 그들은 다시 경마장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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