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지도 피해, 나랏님도 몰라
  • 유근원 기자 ()
  • 승인 2007.08.06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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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구속력 갖지 못해 배상 못 받아…자영업자들 “권장 사항 아닌 명령”

 

정부가 무책임한 행정지도를 남발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지난 7월25일 충남 서천군 농민들은 “잘못된 행정지도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라며 보상금 지급을 요구하고 나섰다. 농민들은 “서천군이 검증도 안 된 벼 품종을 공공 비축미로 선정하고 브랜드 쌀 계약 재배를 권장했는데 줄무늬 잎마름병이 집단으로 발생해 벼농사를 망쳤다”라고 주장했다. 또  “서천군 농업기술센터가 피해 확산 방지를 위해 영농 교육 등 행정지도와 기술 지원에 나서야 했지만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서천군은 전국적으로 병충해 확산으로 인한 보상금 지급 사례가 없기 때문에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충남도도 별다른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충남도 관계자는 “현재로선 마땅한 치유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줄무늬 잎마름병의 매개체를 잡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지만 그 효과가 낮아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한 법률 자문 사이트에 올라온 상담 사례도 행정지도를 믿고 따랐다가 낭패를 보았다는 내용이다. 면사무소와 농촌지도소 등에서 수익성 높은 고추를 경작하라고 권유해 농협 대출까지 받아 고추를 경작했다는 한 농민은 “고추가 풍년이라 가격 하락으로 큰 손해를 입었다. 농촌지도소나 국가 기관을 상대로 손해배상 등 법적인 구제를 청구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 글을 올렸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장황하지만 결론은 뻔했다. 한마디로 구제받기 어렵다는 요지이다. 행정지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처럼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손해배상을 요구하거나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행정지도에 대한 의존도가 비교적 높은 편이다. 하지만 한번 잘못된 행정지도를 따랐다가 피해를 보게 되면 심각한 수준이다. 농민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공무원의 사소한 실수나 잘못된 행정지도로 인해 곤란을 겪기는 마찬가지이다.
부산에서 PC방을 운영하는 김 아무개씨는 얼마 전 관할 교육청으로부터 황당한 통보를 받았다. “학교정화구역 안이라 PC방 영업은 안 된다. 당장 이전하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하겠다”라는 내용이었다. 김씨가 놀란 이유는 창업 전에 부산시 교육청의 안내로 관할 교육청을 통해 “그 주소는 학교정화구역 밖이니 PC방 영업을 해도 된다”라는 확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김씨의 관할 교육청은 부산교육청에서 알려준 곳이 아닌 근처에 위치한 다른 교육청이었다. 그는 창업 전에 문의했던 교육청을 찾아가 “그 주소는 학교정화구역 밖이니 PC방 영업 가능”이라는 친필 서명까지 받아왔다. 그러나 결국 재판에서 그는 벌금 70만원을 물게 되었다. 그는 “행정상 실수로 벌금을 물고 인테리어와 이사 비용 등으로 약 1억원의 손해를 입었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려고 변호사를 찾았지만 헌법소원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라고 말했다.
완도에 사는 김 아무개씨는 영어 과외교사이다. 생활비가 부족해 한번은  빈 병을 모아 팔았다. 버려진 빈 병을 모아 돈도 벌고 완도의 환경도 지켜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빈 병을 3천여 개쯤 모았을 때 병 모으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빈 병을 모아도 제대로 팔수 있는 곳이 없어서였다. 빈 맥주병은 50원, 소주병과 음료수병은 40원을 받을 수 있지만 주류 회사 지점이나 마트에 가져가도 제값을 쳐주는 곳이 없었다. 완도군 환경보호과 담당자는 업소에 행정지도를 하겠다며 많은 수량의 빈 병은 마트보다는 목포에 있는 전문 수집소로 가져가라는 말도 되지 않는 조언을 했다. 그의 말대로 빈병을 팔려고 목포까지 싣고 갈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난 3월 서울 노원구는‘5월1일부터 관내에 새로 설치하는 간판은 외국어를 병기하라’는 행정지도를 내렸다. 국제화 시대에 부응해 광고물 수준을 향상시키고 도시 환경 이미지를 개선한다는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노원구에서 8년째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한 주민은 “구청의 권장 사항이라지만 장사하는 사람에겐 명령이나 다름없다. 아직 한 번도 외국인이 들어온 적이 없는데 왜 간판에 영어를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노원구 관계자는 “외국인이 찾는 명소를 만들어 지역 발전을 꾀한다는 취지였다. 현재 잘 시행되고 있다. 기존 간판은 해당이 안 되고 새로 설치되는 간판에만 병기하면 되기 때문에 민원은 없다”라고 답했다.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행정지도는 기업을 대상으로 한 행정지도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기업이 느끼는 행정지도에 대한 중압감은 일반인에 비해 훨씬 크다. 행정지도를 잘 따르면 보답을 받고, 그렇지 않을 때는 괘씸죄에 걸린다는 것이 업계의 이야기이다. 최근 정부의 경쟁 제한적인 행정지도를 따랐다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부과 등 조치를 받게 된 사례도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사업자가 행정지도에 따라 행동했더라도 그 행정지도가 법령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라면 위법이다. 또 법령에 의한 행정지도라도 사업자 행위 사이에 인과 관계가 인정되어야만 합법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기업들, 점검 단속 등 행정지도에 중압감
그밖에도 중복된 행정지도로 기업이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일은 다반사이다. 충남도에 근무하는 공무원 윤 아무개씨는 “중복적인 행정지도, 점검·단속 등으로 인한 기업 부담이 크다. 기업 운영시 최소 7개 법령에서 정기 점검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환경 분야의 경우 최소 3개 기관(자치단체, 검·경찰, 환경청)에서 방문 지도 점검을 실시한다. 산술적으로 최소 21회 점검을 받게 되며 부정기 점검 대상 법률과 수시 점검을 합하면 무수히 많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분기별 지도 단속 종합 계획을 수립·시행해 중복을 막고 일정기준을 충족하는 업체에 대해서는 지도·점검 면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기업은 물론 행정기관의 인력과 예산을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정부의 행정지도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되면 국민고충처리위원회를 통해 민원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행정지도로 민원이 제기된 것은 2년간 단 한 건에 불과했다. 그 건마저도 행정지도가 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기각되었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강원도에서 한 주민이 농업개발원에서 마 재배를 권장하고 종묘까지 알선했는데 장마로 손해를 입었다는 민원이 올해 한 건 제기되었으나 법적 구속력이 없어 기각시킨 바 있다. 지난 2006년에는 행정지도와 관련한 민원이 단 한 건도 들어오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김봉해 조사관은 “대부분의 행정지도는 손해배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민원 자체가 없는 편”이라고 말했다.
지방혁신인력개발원 이주희 교수는 “행정지도가 규제적 성격의 수위를 넘거나 위법한 행정지도였을 경우 손해배상이 가능하다. 그에 대한 판례도 있다. 하지만 행정지도에 대한 손실 보상은 이론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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