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합작’ 통해 연착륙 노린다
  •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신안보연구실장) (sisa@sisapress.com)
  • 승인 2007.08.11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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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에 나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전략/ 체제 존속에 초점

 
한반도 주변 정세의 변화가 심상치 않다. 미·중 두 강대국이 2005년 8월 이후 네 차례나 고위급 안보 대화를 개최하는 등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질서 재편을 둘러싸고 전략적 협의를 계속해오고 있다. 줄곧 대북 강경론을 펼쳐왔던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핵실험 이후 북한과 국교 정상화를 모색하게 된 것도 커다란 변화의 일단이다.
미·일 동맹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라는 두 축으로 동아시아 질서를 주도하려 했던 일본은 최근 들어 주도권에서 멀어진 형세이다. 러시아는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잃어버린 동아시아에서의 발언권을 회복하기 위해 분주하다. 한국도 주한미군 재편과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 한·미 동맹을 재정비하면서 새로운 질서 재편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질서 재편의 방향은 역설적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손에 달려 있게 되었다. 핵을 포기해 북·미 관계를 개선하고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기존 노선을 고수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이처럼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역사적인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 지 7년2개월여 만인 오는 8월28일부터 사흘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체제 등 현안 해결을 위한 중대한 이벤트이자, 질서 재편기에 한민족의 주도적인 대응 능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은 남북한 최고위 당국자의 만남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북한 핵실험으로 최고조에 달한 한반도 위기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회담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위기 해소는 단순한 원상 회복이 아니라 기존의 남북 및 북·미 관계를 포함한 동북아 질서에 새로운 변화를 수반하게 될 것이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어떤 형태로든 김정일 위원장의 전략적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전략적 결단은 △핵무기를 포함한 핵 프로그램 포기 △북·미 관계 개선 등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북한의 핵개발 포기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의미를 넘어 김정일 체제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군 정치의 위상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선군 정치가 대량살상무기 개발 등을 통해 고난의 행군에 들어선 북한 체제를 외부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는지 모르나, 그로 인해 야기된 자원 부족과 분배 왜곡, 국제적인 압력의 증대는 도리어 북한 체제를 구조적인 위기로 모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핵개발 포기는 김정일 체제의 권력 기반에도 큰 변동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반미’ 뛰어넘어 ‘우리 민족끼리’로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북한이 줄곧 요구해온 북·미 관계 정상화는 경제 제재의 해제와 북한의 국제 사회 복귀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또 외부적인 군사 위협을 크게 완화시켜주는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런데 대미 관계를 정상화할 경우, 북한 정권은 예기치 않은 역풍에 직면할 위험성을 안게 된다. 대미 관계 정상화는 미국 자본과 문화의 전면적인 유입 등 개혁·개방을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 ‘반미’ 이데올로기를 통해 체제를 유지해왔던 북한으로서는 유효한 주민 통제 수단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핵개발을 지속할 수도, 섣불리 북·미 관계 개선에 나설 수도 없는 딜레마 속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번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보기로 결단한 것으로 보인다. 핵 포기와 북·미 관계 개선이 불가피한 선택이라면, 체제의 대외 안전을 보장하고 체제 내부에 미칠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국과의 ‘합작’을 통한 연착륙을 모색하는 것이 정권 안보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북한 체제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수술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다. 나이도 있고 건강도 변수이다. 북한 체제를 장기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북·미 관계, 남북 관계와 같은 불투명한 대외 정세를 예측 가능하게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런 면에서 남한에 대통령 선거가 있고, 노무현·부시 대통령이 가시적 성과를 노리는 임기 말이기 때문에 지금 시기가 적절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 2차 남북정상회담에 임하는 북측의 자세는 단순히 경제 원조를 많이 받는다거나 한국 대선에 적극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식의 전술적인 접근을 뛰어넘는 것이다. 좀더 근본적으로는 전면적인 남북 합작을 통해 체제 생존과 정권 안전을 도모해보려는 전략적 접근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의 대선 정국은 자신들의 변화된 전략을 좀더 안전하게, 용이하게 해주는 터를 제공해주는 것뿐이다.
북한은 단기적으로 6자회담의 틀 속에서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남북 관계를 회복하고 남측을 지렛대로 삼아 북핵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며, 중·장기적으로 북한 체제의 새로운 기반을 만들고자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북한이 원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미 관계 개선과 남북한 평화 공존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를 마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미 관계 개선에 앞서 남북 관계를 군사·경제적으로 좀더 안정적인 기반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먼저, ‘반미’를 대체하는 북한의 새로운 통치이데올로기는 이미 2000년 ‘6·15 공동선언’에서도 선보인 바 있는 ‘우리 민족끼리’ 정신이다. 이것은 남북이 동시에 발표한 정상회담 개최 합의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합의문은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과 우리 민족끼리 정신을 바탕으로 남북 관계를 보다 높은 단계로 확대·발전시켜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공동의 번영, 조국 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는 데서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 민족끼리’를 통해 ‘반미’를 뛰어넘겠다는 것이다.

‘제2 개성공단’ 제안할 수도

 
다음으로, 북한은 대미 관계 개선과 본격적인 개혁·개방에 앞서 한국과의 전면적인 합작을 추진하고자 한다. 관계 개선에 따른 미국 자본의 북한 진출 등 거대한 블랙홀에 빨려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위험 부담이 작은 한국 자본과의 합작이 필요할 것이다. 나아가 한국과의 전면적인 관계 개선을 도모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본격적으로 군비 축소를 제기하고 한국 자본을 대거 끌어들이기 위해 제2의 개성공단을 제안할 가능성도 높다.
한국을 지렛대로 핵개발 포기와 대미 관계 개선에 나서려는 북한의 새로운 남북 합작 전략은 남북한 모두에게 도전이자 기회가 된다. 북한의 새로운 국가 전략은 그동안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 목표와 부합하는 측면이 있지만, 북한 체제의 인정과 한국의 관련법 정비, 한·미 관계의 연성화 등 새로운 숙제를 남기는 것이다. 협력을 넘어선 남북 합작이 자칫 화평연변(和平演變·자본주의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식 흡수 통일의 불안감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에게도 부담이 될 것이다.
이처럼 북한이 전략적으로 방향을 전환함에 따라 이루어지는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우리측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한 자리에서 정상회담의 의제로 △한반도 비핵화 △남북 평화 문제 △군비 통제 △경제 협력 등을 제시했다. 이 외에 정부에서는 이산가족 상봉 확대, 납북자·국군포로 문제 등 인도적 문제도 거론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2차 정상회담을 특징짓는 핵심 의제는 비핵화와 평화 문제이다.
무엇보다 이번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는 비핵화 문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토니 스노 미국 백악관 대변인도 언급했듯이, 이번 정상회담은 북핵  문제의 진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번 회담의 우선 과제는 남북 정상이 서명하는 합의문을 통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의 포기’라는 비핵화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김위원장이 비핵화 원칙을 넘어 어떤 형식으로든 불능화 의지를 표명한다면 비핵화 2단계 작업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9월 초에 개최될 6자회담 수석대표 회담에서 ‘불능화 로드맵’이 합의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토대로 북·미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체제 논의가 급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재처리 시설 등 핵심 시설의 불능화가 상당 정도 진척되는 단계에서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연내에 방북하는 것도 기대해볼 수 있다.
비핵화와 더불어 한반도 평화선언도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6·15 공동선언’은 통일에 대한 의지를 확인했지만, 평화의 내용을 담지 못한 반쪽짜리 합의문이었다. 따라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평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평화 문제는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다”라는 평화선언과 한반도 평화 체제에 대해 논의하는 두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한반도에 항구적으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실효성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정전 체제를 끝내고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남북 간 합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전협정의 체결과 정전 체제의 유지·관리에 참가했던 미국과 중국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남북 정상 간의 평화선언만으로는 진정한 평화 체제를 구축할 수 없으며, 별도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추진이 필요하다.

‘불능화 로드맵’ 합의되면 평화체제 논의도 ‘탄력’
지난해 11월18일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한반도 종전 구상을 피력한 이후, 새로운 평화 체제 구축 방안으로 ‘종전선언→평화협정’이라는 2단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주목되어왔다. 2단계 평화 프로세스는 북한핵시설의 불능화 완료 단계에서 남·북·미·(중) 다자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전쟁이 종식되었음을 공식 선언하고, 핵무기 및 핵시설 폐기 단계에서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2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면 2단계 평화 프로세스가 부분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평화선언을 뒷받침하기 위해 남북 기본합의서와 불가침부속서에 나와 있는 8개항의 신뢰 구축 및 군비 통제 조처를 전면적으로 추진하는 데 합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군비 통제와 함께 평화선언이 발표될 경우, 사실상 종전선언에 버금가는 효력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종전선언은 굳이 다자 정상회담을 개최하지 않고도 관련국의 외무장관 회담을 통해 가능하다.
오는 9월 초순에 개최될 6자회담 수석대표 회담에서 2단계인 ‘불능화 로드맵’이 합의되면, 한반도 평화 체제 논의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지난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에 따라 오는 9월 중순 이후 한반도평화체제포럼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1999년 8월에 중단된 4자 회담이 8년 만에 부활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불능화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되고 평화체제 논의가 일정한 궤도에 오르면, 남·북·미·중 4자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해 종전선언을 발표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남·북·미·중 4자가 참가하는 평화협정 체결, 북·미 수교까지는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단기간 내에 모든 프로세스가 완료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최근 북한의 전략적 방향 전환은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향후 남북 관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되는 방향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 질서 재편을 강대국의 손에 맡길 것인가, 아니면 남북 공조를 통해 우리 스스로 민족의 장래를 결정할 것인가? 전면적인 합작을 통해 북한과 공존하면서 평화통일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북한과의 합작을 거부하고 제한적인 협력과 국제 공조를 통해 북한의 체제 변화를 유도할 것인가? 이제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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