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화가에도 급수가 있다”
  • 노진섭 기자 ()
  • 승인 2007.09.15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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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상이 밝히는 위작 미술품의 제작·유통 경로

 
지난 9월6일 충남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고(故) 박수근 화백의 위작을 그려 판매한 혐의 등으로 한국미술협회 회원 서양화가 서 아무개씨(52)를 구속했다. 서씨는 지난해 10월 고 박수근 화백의 <나무와 두 여인>을 위작한 뒤 감정 증서를 위조해 대전의 한 치과의사에게 2천만원에 판매했다.
미술계는 유명 작가까지 위작의 유혹에 빠진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관계자들은 “중견 화가 서씨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에 입상할 정도로 촉망받는 화가였다. 그의 행위는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화가들이 생계를 위해 위작에 손을 대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위작이 판을 칠 수밖에 없는 환경이 근본적인 문제이다”라고 개탄했다.
미술품 위작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유통되는 것일까. 지난 9월7일 서울 인사동 화랑가에서 미술계 인사들을 만났다. 이들은 “위작은 미술계에서 다 알려진 비밀이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정색을 하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입을 연 사람은 매장되다시피 한다.”라고 입을 모았다.
여러 차례 수소문해 설득한 끝에 <시사저널>은 한 위작 딜러와 접촉할 수 있었다. 화랑가에서 ‘고선생’으로 통하는 고정연씨(가명). 그는 미술계에서 유명한 전문 나까마(딜러) 4명 중 하나이다. 고씨는 “진품을 새끼 치는(위작을 만드는) 방법과 분양(유통)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한눈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고씨에 따르면 위작을 제작하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 완전 위작, 부분 위작, 모자이크 위작, 창작적 위작 등이다. 완전 위작은 말 그대로 진품과 똑같이 만드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도구가 필요하지만 제작 과정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선 습자지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진품 위에 습자지를 놓고 연필로 그대로 본을 뜬 후 채색하면 위작이 만들어진다. 또 슬라이드를 이용하기도 한다. 슬라이드로 진품 그림을 캔버스 위에 비추고 연필로 따라 그린 후 채색한다.
 부분 위작은 진품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모사하되 일부분을 약간 달리 해서 그리는 방법이다. 예들 들면 진품에는 새가 없지만 위작에 새를 그려넣는 식이다. 이 경우는 미공개 작품으로 둔갑해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모자이크 위작은 한 작가의 여러 그림에서 일부분을 따로 떼어와 한 장의 그림으로 종합하는 방법이다. 비교적 수준 있는 안목과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창작적 위작은 특정 작가의 화풍을 오랫동안 익혀 유사한 화풍으로 위작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다. 고씨는 “주로 경기도 일대 공장(작업실)에서 위작이 만들어진다”라고 말했다.
 
최근까지 진품과 위작 시비에 휘말렸던 변시지 화백(81)은 “위작은 작가가 아닌 일반인이 보면 잘 모른다. 그만큼 정교하다”라고 말했다. 또 경희대 미대의 최병식 교수는 “품질이 떨어지는 위작도 상당수 있다. 화풍이나 작업에 대한 전문 지식 없이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품과 위작을 같이 놓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라고 설명했다.
위작은 진품과 달리 크기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고씨는 “가로 길이가 1m가 넘는 100호짜리 그림을 가로 50cm 정도인 10호 이하로도 축소해 위작을 만들 수 있다. 보관과 운반 등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로 진품보다 크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위작을 만들기 위해 진품은 어떻게 구하는 것일까.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표구사나 화랑에 나온 진품을 활용하는 것이다. 진품 소장자(컬렉터)가 액자 등을 만들기 위해 표구사에 진품을 1~2주 맡기는 경우가 있다. 이때 진품을 빼내 위작을 만든다고 한다. 고씨는 “심지어 위작으로 표구를 만들어주고 진품을 빼돌리기도 한다. 표구사가 위작을 돕는 셈”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방법은 미술 전시회 등에서 구입할 수 있는 도록(圖錄·작품집)에서 진품 사진을 구하기도 한다. 진품 사진을 컬러로 복사한 뒤 위작을 만드는 것이다.
위작을 만드는 사람들도 급수가 있다고 한다. 고씨는 “과거 위작을 만드는 사람 중에 화가 출신은 전체의 5% 미만 정도였지만 현재는 거의 없는 편이다. 현재는 무명 화가, 화가 지망생, 영화 간판 화가, 화랑 관계자 등이 있다. 1급에서 3급까지 급수가 있어 같은 위작이라도 단가가 달라진다”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중국에 위작을 의뢰하기도 한다. 소품 한 점을 위작하는 데 드는 비용은 30만원 선. 그러나 중국에 의뢰하면 15만원 선으로 가격이 떨어진다. 진품 사진을 e메일 등으로 보내면 1주일 내 위작이 국내에 도착한다.

중국에 위작 의뢰하면 비용 15만원 선
위작을 진품처럼 보이기 위해 다양한 수법이 동원된다. 고씨는 “오래된 그림을 위작하기 위해 종이와 안료에도 신경 쓴다”라고 말했다. 진품이 만들어진 시기에 생산된 종이, 이른바 고지(古紙)를 이용해 위작을 만든다. 또 안료도 당시에 쓰였던 재료로 만들어진 제품이 있다. 이런 고지와 안료는 서울 인사동이나 중국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진 위작은 나까마(딜러)를 통해 유통된다. 나까마는 전국 화랑 등을 통해 위작을 판매한다. 화랑은 위작임을 알고 판매하기도 하고, 나까마의 말에 속아 진품으로 알고 구입한 뒤 되팔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위작에 허위 감정서까지 붙는 경우도 있다. 위작은 화랑에서 소장자, 다시 여러 화랑과 경매 회사 등을 거치면서 출처가 불분명해진다. 이른바 ‘작품 세탁’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소장자에게 판매될 때 가격은 진품 가격의 절반 이하 수준에 거래된다. 서울 중구 ㅁ화랑 주인은 “진품 가격이 1천만원이라면 위작은 5백만원 이하에 거래된다. 싸면 의심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진품 가격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는 특별하게 싸게 주겠다고 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했다. 또 위작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진품으로 둔갑한다. 고씨는 “세월이 흐르면서 위작이 진품으로 둔갑한다. 공산품과 달리 생산자와 유통자가 불분명하므로 역추적하기도 쉽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위작이 미술계에 판을 치고 있는 배경에 대해 고씨는 허술한 미술품 감정 체계를 꼽았다. 고씨는 “진품과 위작을 제대로 감정할 방법만 있다면 큰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술품 감정을 두고 말들이 많다. 위작이 제작되어 유통되는 데는 잘못된 감정이 일조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진품과 위작을 감정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실제 그림을 그린 작가에게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고인일 경우에는 별 도리 없이 작품에 따라오는 감정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까지 한국화랑협회, 한국미술품감정협회, 한국고미술협회가 미술품을 감정하고 감정서를 발급했다. 올해 1월부터 이 세 단체가 공동으로 만든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가 미술품을 감정하고 감정서를 발급하고 있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 관계자는 “국가기관은 아니지만 감정에 문제는 없다. 그러나 감정인의 명단을 공개할 수는 없다. 청탁과 협박의 우려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감정 자체에 대한 신뢰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감정은 안목 감정에 의존하고 있다.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진위를 가리는 것이다. 또 상당수의 화랑 주인들이 감정위원으로 위촉되어 작품을 감정한다. 실제로 감정에 참여했던 한 감정위원은 “우리나라에는 감정 전문가가 거의 없다. 그래서 화랑 주인들이 감정가 행세를 한다. 제대로 된 감정이 나올 리 없다. 또 보통 5명이 한 작품을 감정하는 데 세 명이 진품이라고 판정하고 두 명이 위작이라고 감정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면 위작이라도 진품으로 평가되어 진품 감정서가 발급된다”라고 설명했다. 

 

“화랑 주인이 감정위원”…진품·위작 뒤바뀌기도
이 때문에 진품과 위작이 뒤바뀌는 경우도 발생한다. 변화백은 “감정서가 있는 내 그림    <해녀>를 소장한 사람이 (나에게) 감정을 의뢰한 경우가 있었다. 그 감정서에는 진품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 그림이 아니었다. 위작을 진품으로 잘못 감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감정인들은 자신들의 감정이 옳다고 주장하는데, 자기 자식을 못 알아보는 어미가 있는가. 작품은 작가에게 있어 자식이나 마찬가지이다”라고 강조했다.
한국화랑협회의 통계를 보면 지난 20년간 2천5백55점을 감정한 결과 위작이 약 30%로 나타났다. 화랑, 경매회사, 소장자 모두 피해를 보고 있지만 위작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법적 제재가 거의 무의미한 수준이라는 지적이 있다. 올해 4월 국내의 대표적 명화 1백8점을 위작하거나 가품을 구해 유통시켜온 미술품 전문 위조 조직이 지난 4월 경찰에 검거되었다. 박수근·이중섭·천경자·이만익·변시지 화백 등 거장 24명의 작품을 위조해 1억8천여 만원을 챙겼다. 나까마 복씨 형제는 구속되었지만 위작을 만든 무명 화가 등 2명은 불구속 입건되었다. 미술 전문지 퍼블릭아트의 홍경한 편집장은 “위작 제작과 소유는 죄가 되지 않는다. 이를 돈거래를 목적으로 유통할 때 사기죄가 성립된다. 마약은 소지만 해도 죄가 되지만 위작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했다.
위작 판매 유혹을 받아보았다는 서울 인사동의 ㅁ화랑 주인은 “화랑이 연합하면 위작은 뿌리 뽑을 수 있다. 위작과 연관되지 않은 화랑은 거의 없다. 그러나 아무도 위작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위작 판매 수입이 짭짤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명지대 문화재보조관리학과 최명윤 교수는 “위작을 제작하는 사람, 딜러, 화랑, 경매 회사는 물론 소장가 등 미술계 관련자들에게 모두 책임이 있다. 싼 값에 거장들의 미술품을 사려고 하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외국에서는 감정인 성명은 물론 전화번호, 감정 기준 등을 공개해 제작에서 유통에 이르는 모든 절차가 투명하게 전개된다. 어떤 미술품이든 감정인은 공개되어야 한다. 감정 기준 역시 공개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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