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에 관한 오해와 진실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07.10.2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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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잘 하는 부잣집 도련님 출신’과는 거리 멀어…최근 경선에서 덧칠된 ‘구태 정치인’ 이미지는 굴레

"사장님 덕분에 어머니와 제가 먹고 살았습니다.” 정동영 후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어머니가 삯바느질해 만든 바지를 내다팔던, 30년도 더 지난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암울했던 군사 정권 시절, 청년 정동영은 청계천과 사근동 언덕길을 오가면서 어머니가 만든 옷을 팔아 생계를 도왔다.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다음날인 지난 10월16일 정후보는 동이 트기도 전에 동대문 평화시장을 찾았다. 평화시장은 정후보가 20대 시절 ‘삶의 터전’으로 여겼던 곳이다. 당시 정후보의 가족은 사근동 언덕배기에 위치한 작은 집 방 한 칸에 재봉틀 몇 대를 들여놓고 아동복 바지를 만들어 평화시장에 내다파는 일을 했다.
본선 후보로서 첫 행보를 내디딘 이날 정후보는 30년 전 자신이 바지를 납품했던 상인들을 만났다. 그를 기억하는 송도순씨는 “계단에서 수금하기 위해 기다리던 모습이 선하다.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라며 옛 일을 떠올렸다. 정후보도 “사장님 덕분에 어머니와 제가 먹고 살았다”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동영 후보는 자신에 대한 대중의 평가 중 몇 가지 ‘오해’를 지적하고는 한다. 그중 하나가 부잣집 도련님으로 곱게 자랐을 것이라는 선입견이다. TV 연속극에서 자주 봄직한 잘 생긴 외모와 세련된 옷차림은 고생 모르고 살아온 귀족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은 부잣집 도련님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청년 가장·민주화 운동·군대 강제 징집으로 점철된 젊은 시절

 
정후보는 휴전 협정일인 1953년 7월27일 전북 순창 구림면에서 전북 도의원을 지낸 정진철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네 명의 형이 있었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 전쟁 중 병사해 사실상 장남 노릇을 했다. 불행한 가정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와병 중이던 아버지가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우상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었다”라고 회고하는 정후보는 지금도 가장 가슴 아팠던 시기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당시를 떠올린다. 아버지의 부재는 그를 홀어머니와 세 명의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가장으로 만들었고, 대학 입학 후에도 그 역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평화시장에 대한 정후보의 기억은 평탄치 않았던 가정사의 한 단면인 셈이다.
고생을 모르고 자랐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유약할 것이라는 또 다른 선입견을 낳는다. 정치인에게 “귀공자 같다”라는 말에는 칭찬이나 부러움이 아니라 유약함을 얕보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정동영 후보도 이러한 “귀공자 같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그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면 ‘유약’보다는 ‘강단’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유신이 선포된 1972년 서울대 문리대 국사학과에 입학한 정후보는 이듬해 10월 유신독재 철폐 시위에 참가했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어 30일 구류를 살았다. 다음해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고, 출감하자마자 군에 강제 징집당했다.
졸업과 동시에 MBC에 입사한 그는 18년 간의 기자 생활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현장에서 체험했다. 서슬 퍼렇던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도보로 광주 시내로 들어간 정후보는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만발했다. 완전한 자유 천하이다”라는 내용의 보도를 데스크에게 전했다. 이 기사는 검열에 걸려 방송되지 못했다가 27년 만인 올해 5월 육성 테이프가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마감 뉴스> 앵커를 맡고 있던 1988년, 총선을 앞두고 집권당이던 민정당 후보가 유권자들에게 우편으로 돈 봉투를 배달하다 적발된 사건을 톱뉴스로 내보내 방송국이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이른바 ‘땡전 뉴스’가 유행어로 회자되던 보도 통제 시절의 일이다. 정후보는 당시 상황에 대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각오를 하고 보도했다”라고 회상했다.
그의 ‘강단’은 부인 민혜경씨와 결혼하기까지 겪었던 사연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학 시절 정후보가 민씨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개나리를 꺾어 들고 무작정 기숙사로 찾아가고는 해서 ‘개나리 아저씨’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이후 처가 될 집안이 기자라는 직업을 못 마땅히 여겨 결혼을 반대하자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민씨와 함께 설악산으로 도망치는 ‘소동’을 일으킨 끝에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고 한다.
웬만큼 말 잘 해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정치권에서도 정동영 후보는 ‘말 잘 하는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방송 기자와 앵커로 활약하면서 다져진 수려한 말솜씨는 ‘정치인 정동영’의 강점 중 하나로 꼽힌다. 1996년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그는 초선 의원으로는 이례적으로 당 대변인을 맡았다. 정후보는 집권 여당의 ‘입’노릇을 하면서 짧은 기간 정치적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방송 기자·앵커 활약으로 다진 말솜씨, 여당의 ‘입’으로 승승장구

이는 2000년 8월 최연소 최고위원 당선으로 이어졌다. 당시 그의 폭발적인 연설은 ‘40대 기수론’의 돌풍을 낳으며 화제를 몰고 왔다. 이후 정후보의 연설 능력은 선거가 있을 때마다 그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제되고 압축된 표현과 격정적인 호소는 현장 분위기를 휘어잡았고, 넥타이를 푼 차림으로 연단에 오르거나 연설 도중 손을 들어올리는 젊고 역동적인 모습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뛰어난 연설 능력이 마이너스로 작용한 측면도 없지 않다. 완벽에 가까운 연설은 “인간미가 없어 보인다”라는 지적을 낳는가 하면, 반대 진영으로부터 “말만 잘 하는 정치인이다”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정후보와 자신의 대결을 ‘말 잘 하는 세력’ 대 ‘일 잘 하는 세력’의 싸움으로 규정한 것이 그 예이다.
지인들에 따르면 정후보는 평소에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고 남들 앞에 나서기를 즐기는 성격도 아니라고 한다. 그의 연설 능력은 타고난 말솜씨보다는 웅변학원까지 다니면서 부단히 노력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정후보는 화려한 ‘말솜씨’가 아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선거 기간 중에 나의 연설 솜씨가 화제가 되었는데 말 솜씨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메시지가 중요했다”라고 밝혔다.
정동영 후보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의 참상을 현장에서 생중계하면서 사회의 총체적 부패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치밀어올라 정치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기자에서 정치인으로 옷을 갈아입은 후 그는 기득권에 안주하는 낡은 정치를 개혁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정후보는 2000년 12월 비공개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당시 권력 실세였던 권노갑 최고위원을 면전에 두고 ‘2선 퇴진’을 요구하는 ‘당돌함’을 보였다.‘국민의 눈에는 권최고위원이 YS 정권 때의 김현철처럼 투영되고 있다’라는 요지의 그의 발언은 며칠 뒤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이는 당 쇄신을 이끈 ‘정풍 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지역 분열 구도와 낡은 정치의 틀을 깨기 위해 2003년 당내 개혁 성향의 의원들과 합세해 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한 것도 정후보였다. 그는 첫 전당대회를 앞두고 3김 시대의 청산과 정당 민주화를 강조하며 당원 직선제를 주장했고 선거를 통해 열린우리당 초대 당의장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탄핵의 역풍이 거셌던 2004년 4·15 총선의 압승은 선거를 진두지휘한 정후보의 입지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여권의 유력 대권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열린우리당 해체와 대통합 과정에서 생긴 ‘불신의 벽’허물어야

하지만 ‘실용 대 개혁’논쟁으로 대표되는 당내 갈등은 과반 의석의 여당을 지리멸렬하게 만들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4대 개혁 입법 처리를 놓고 내분은 당 밖으로 표출되었다. 당시 정후보는 통일부장관으로 당을 떠나 있었지만 실용 노선 진영의 실질적 대표로 지목되면서 반대 진영으로부터 개혁의 발목을 잡는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정후보의 당 복귀 이후에도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당 지지율이 바닥으로 내려앉으면서 책임론을 둘러싼 공방은 더욱 뜨거워졌다. 특히 친노 진영은 노대통령과의 차별화에 나선 정후보와 사사건건 부딪쳤다. 열린우리당 해체와 대통합 논의 과정에서 양측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
통합신당으로 당이 바뀌었지만 오랫동안 쌓여온 불신의 벽은 결국 국민 경선을 폭로전으로 치닫게 했고, 패자는 물론 승자에게도 ‘상처뿐인 영광’을 안겼다. 경선에서 예상을 뛰어넘은 압승을 거두며 대통령 후보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정동영 후보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타격을 입었다. 경선 기간 내내 조직·동원 선거, 불법·부정 선거의 주범으로 내몰리면서 기득권을 선거에 이용한 구태 정치인 이미지가 덧칠되었다.
현직 대통령의 명의가 도용되어 선거인단으로 등록되는 황당한 사건까지 발생한 것은 “지지자들의 과잉 경쟁으로 빚어진 실수”라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정후보의 대선 행보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당장 한나라당으로부터 “불법·부정 후보”라는 공격을 받게 되었다. 통합신당의 ‘이명박 국감’에 맞서 ‘정동영 국감’을 준비하고 있던 한나라당으로서는 호재를 맞은 셈이다.
한나라당은 정후보를 둘러싼 의혹들을 국감을 통해 집요하게 추궁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정후보가 2001년 처남 등을 동원해 각종 비자금으로 코스닥 기업들의 주가를 조작해 거액을 챙긴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조직 폭력배 ‘전주월드컵파’가 2005년 정치 자금을 제공한 명단에 정후보의 이름이 나온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한편, 정후보 부친의 친일 행적 의혹을 거론하면서 검증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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