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의 춤’ 벗어나 ‘박자의 춤’ 벗어나
  • 김남수 (무용평론가) ()
  • 승인 2007.12.0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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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춤의 변화, 무엇을 의미하는가

 
몇 해 전 ㅇ대 건축과 수업에 들어간 적이 있다. 주제가 ‘춤을 위한 극장 설계’였기에 그 본질을 담아냈는지 판단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학생들은 춤을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건축은 사람이 사는 공간을 만드는 장르인데, 학생들에게 기본적으로 극장 체험이 적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래서 학생들은 마음대로 상상도를 그린 모양이다. 이렇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으로 건축을 이야기하는 것은 춤을 추는 사람에게는 죽을 맛일 것이다. 설계대로라면 극장 위에 연습실을 만들어 공연 도중에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릴 판이고, 출연자와 관객이 같은 통로를 사용해 혼잡을 피할 수 없다. 학생 대부분이 뮤지컬이나 콘서트를 염두에 두고 설계를 했다고 하니 더욱 기가 막힌다.
확실히 세상은 춤을 보지 않는다. 물론 자업자득이니 무용계가 반성해야 한다. 세상과 교량을 끊어놓은 채, 춤춰온 것이 벌써 수십년의 세월이다. 그 폐해는 건축이 춤의 리듬을 어떻게 담아낼지 미처 가늠하지 못하는 현실을 낳았다. 세상이 춤을 보는 시각을 갖추고 있지 못하면, 자신이 어떻게 춤추고 있는지 자각할 수도 없다. 자신의 몸짓을 자각할 때만이 이 세상을 어떤 춤으로 가로지르고 있는지 동선이 보이고 구체적인 리듬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것이 존재감에 눈뜨면서 삶을 몸으로 실감하는 입구이다.

춤은 몸 쓰는 자연의 리듬 그 자체

그런데 춤에 관심이 있다는 학생들 몇몇은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감동을 이야기했다. 빌리가 로열발레단 오디션에 갔을 때, 면접관의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을 재현해주기도 했다. “너, 춤출 때 어떤 기분이니?” “모르겠어요. 그냥 기분이 좋아요. 한 번 시작하면 모든 것을 잊게 되고 그리고 사라져버려요. 내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죠. 마치 몸에 불이라도 붙은 기분이에요. 저는 그저 한 마리 나는 새가 되죠. 마치 전기처럼요.”
그러니까 춤의 본질은 무아지경에 있다는 것이다. 자아를 잊고 리듬과 합일되는 체험, 물아일체의 즐거움을 한량 없이 맛보는 것. 이러한 발상은 춤의 일반적인 통념을 이루고 있는데, 그 뿌리가 깊다. 춤은 몸 쓰는 자연의 리듬 그 자체이며, 자연과 일체를 이루었던 행복은 그리움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상실한 리듬을 회복해 행복의 나라로 가자. 니체가 말하는 춤도 이런 관점이며, 조르바가 춤추는 현재도 같은 관점이다. 실제로 국내의 춤 작품의 반수 이상이 이런 무아지경을 표현하려 애쓴다.

 

불행히도 그 대부분이 맥락을 만들지 못하고 나르시시즘의 해묵은 반복에서 그친다. 그저 한 가지 패턴에 오래도록 사로잡힌 춤을 깊이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환호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릇된 춤일 뿐이다. 엄밀히 말해서 죽은 춤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춤은 구성된 춤이며 고안된 춤이다. 안무가 정영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춤을 춘다는 것은 춤을 만든다는 것이다.” 춤을 춘다는 것은 답안지에 외워 쓰듯 기존의 정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다. 춤이 ‘학습된 퍼포먼스’의 무아지경을 추구하는 경우는 어떨까. 그러면 춤추는 사람은 무아지경일지라도 관객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춤꾼이 도취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관객에게 그대로 감염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무를 단지 춤의 강도를 높이는 차원이라고 오해하는 데서 20 대 80의 파레토 법칙은 깨어진다.
그러니 좋은 작품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춤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다른 어떤 장르보다 전율이 있고 숭고미가 있기 때문이다. 요점은 ‘물든 몸’의 무아지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시된 몸’의 사용에 있다. 여기서 사용이란 비트겐슈타인이 “의미는 쓰임에 있다”라는 차원의 그 사용이다. 즉 이미 만들어진 춤의 패턴에 맹목적으로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턴을 만든다거나 아니면 기존의 패턴들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하는 메타패턴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현대 춤은 ‘박자의 춤’을 벗어나 ‘리듬의 춤’으로 나아갔다. 이 지점이 뮤지컬과는 사뭇 다른 분수령이다.

“춤을 춘다는 것은 춤을 만든다는 것”

뮤지컬이 박자를 지키면서 쾌적한 즐거움을 준다면, 현대 춤은 몸의 안과 밖에서 의미 있는 리듬을 생산하면서 고통섞인 즐거움을 준다. 그 고통은 은폐되어 있는 삶의 흔적과 징후가 춤 속에 담기면서 생기는 엇박과 변박의 고통이다. 그런 환기가 불러오는 즐거운 혼돈이 있어서 현대 춤은 ‘리듬의 춤’이다. 나아가 뮤지컬이 ‘선율적 풍경’으로 무대의 가로축 가득히 스펙터클한 병풍을 깐다면, 현대 춤은 ‘리듬적 신체’로 무대의 세로축에서 치열하게 육박해오는 현존을 들이민다. 이 차이는 극명한 차이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풍경의 발견’이라고 하면서 그 비인간의 풍경 속에 인간조차도 풍경이 된다고 갈파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격자망 속에서 풍경화된다. 우리는 미디어와 이미지의 촘촘한 거미줄에 걸려 있다. 현대 춤은 ‘리듬적 신체’가 표현하는 ‘지금 여기’의 감각을 질문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의 안부를 묻는다고.
현대 춤에서 이는 전율과 같은 차원이다. 리듬에 탐닉하고 무아지경에 자아를 상실하는 것, 그것 자체의 위험은 없는가. 그것이 권력인 것은 아닌가. 질문을 던지면서 나아가는 것은 우리 몸이 하나의 분쟁 지역이라는 것이다. 몸이 느끼는 모순과 갈등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밀어올린다. 그것은 감정과 심리를 묘사하는 통속적 차원이 아니다. 마음은 빨리 바뀌지만, 몸은 바뀌기 어렵다는 진실에 가닿으면서 그 몸을 변하게 하는 내밀한 프로그램이 가동 중이다. 어쩌면 이런 입장에서는 빌리 엘리어트가 이야기하는 ‘변신의 춤’과 맞닿을 수도 있다.
춤은 결국 사람의 몸을 변하게 한다. 그 정신과 습속을 변하게 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몸을 동시적으로 나타나게 할 수 있고, 미래의 몸을 지금 당장 도래하게 할 수도 있다. 역사를 몸의 기억으로 살갑게 증언하면서 자기 운명의 닻을 끊어버린다. 안은미의 춤이 보여주는 한국의 폭력적 근대에 대한 고고학적 성찰이나 마기 마랭의 춤이 이야기하는 남미 파시즘의 고발이 그러하다. 이미 현대 춤은 삶의 정치이자 실천이라는 영역으로 나아갔고, 글로벌 컨템퍼러리의 세계에서 예술의 최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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