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슬기 전에 떠난 ‘철의 여인’
  • 소준섭 (국회도서관 중국 담당·국제관계학 박사) ()
  • 승인 2008.01.02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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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무원 여성 부총리 우이, “나를 완전히 잊어달라” 고별사…타협과 실리 이끌어낸 여걸

"나를 완전히 잊어 달라.” “나는 내년 전인대와 정협(정치협상회의)이 끝난 뒤 완전히 은퇴할 것이다. 당 중앙에 분명히 밝혔듯이 정부 기관이든, 반(半)정부기관이든 또 대중적 단체이든 어떠한 직책도 맡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나를 완전히 잊어 달라!”
중국 국무원 부총리 우이(吳儀)가 지난해 12월2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국제상공회의소회원 대표대회’에서 퇴임 후에 중국무역촉진회 명예회장을 맡아달라는 완지페이(萬季飛) 회장의 간청에 대한 답변으로 남긴 말이다. 큰 공을 세우고도 표표히 무대 뒤편으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아름다운 고별사가 아닐 수 없다. 우이 부총리의 이런 언명은 외신을 타고 한국에도 크게 보도되어 퇴임한 이후에도 자리 다툼에 급급한 우리 관료들의 행태와 비교되면서 큰 감동을 주었다.
우이는 1988년 베이징 시의 공업 및 대외무역을 담당하는 부시장에 임명되면서 정식으로 중국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91년에 그녀는 대외무역부 부부장이 된 뒤 중·미 양국의 지적재산권 협상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 ‘철의 낭자(鐵娘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3년에는 부장 자리에 올랐고, 주룽지 내각에서 대외무역을 책임지는 국무위원으로 일했다. 2003년 3월 원자바오 내각에서 대외무역과 공평 무역 및 위생 업무를 담당하는 부총리가 된 그녀는 같은 해 사스(SAAS)가 중국 대륙을 휩쓸 때 위생부 부장을 겸임하면서 직접 야전에서 방역 업무를 지휘했다. 그녀는 응급 체계를 제정하고 전세계에 사실대로 질병 상황을 발표하도록 하면서 당시 세계적으로 심각했던 사스 문제를 신속하면서도 무난하게 처리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중국 고위 관리로는 처음으로 허난(河南) 지역에 있는 ‘에이즈 환자촌’에 들어가 에이즈 치료 업무를 조사·연구하기도 했다.

 

여성으로서 중국 공산당에서 가장 지위 높아

우이가 중국 대외경제무역부 부장으로서 미국과 지적재산권 문제에 관한 협상을 벌이고 있었던 때의 이야기이다. 당시 중국의 가짜 모조상품 문제가 심각하던 상황에서 미국측 협상 대표는 단도직입적으로 우이에게 “우리는 지금 도둑과 담판하고 있다”라고 비꼬았다. 그러자 우이는 곧바로 “우리는 지금 강도와 담판하고 있다. 당신들의 박물관에 전시된 진열품을 보아라. 그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중국에서 빼앗아간 것들인가!”라고 반격했다. 남성도 쉽게 할 수 없는 대국적인 풍모와 당당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강대국의 위세에 눌려서 항상 전전긍긍하며 수세에 몰리고 그러면서도 무사안일만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곤 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참으로 심각하게 반성해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이가 언제나 강공만을 앞세운 것은 아니다. 2006년 4월3일부터 4월12일까지 국무원 부총리 우이는 대규모 중국경제무역대표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했다. 그녀는 미국의 13개 주를 돌며 46억 달러에 달하는 보잉항공사의 민용 비행기 80대, 17억 달러의 미국 정품 소프트웨어, 그리고 5억 달러에 이르는 미국 모토롤라 이동통신 제품 등을 구입하는 등 1979년 중·미 수교 이래 최대의 구매 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우이가 인솔한 대표단에는 정부 고위층 인사뿐만 아니라 1백1개 기업의 대표 2백2명도 포함되었고, 그중에는 민영기업 출신 인사들도 처음으로 참여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방문이 비단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사조를 완화시키려는 수세적인 측면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례없는 경제 외교 공세를 펼쳤다는 점이었다.
이 방문에서 우이는 ‘지방에서 시작해 연방정부를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이가 이끄는 대표단은 각 지방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그 지방의 주지사, 시장, 연방의원 및 지방의원들과 회담을 갖고 중·미 경제 무역 관계에 대해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었으며, 이들 지방 주요 인사와 함께 일련의 중요한 구매에 서명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러한 활동들은 모두 현지 언론들에 대서특필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는 방직 공업이 쇠퇴하고 실업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일종의 반중 분위기가 퍼지고 있었는데 중국 대표단의 출현은 이러한 분위기를 일변시켰다. 이 지역의 한 상원의원은 “나는 100세까지 살기를 희망했는데, 우이와 같은 강력한 적수를 만나서 아마도 100세까지 살지 못할 것 같다”라며 농담을 던져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콜롬비아 시에서도 우이 일행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콜롬비아 시 시장은 “우이의 방문은 콜롬비아가 전세계 경제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라고 천명할 정도였다. 이렇게 중국 대표단이 지방에서 출발해 최종적으로 연방정부를 방문함으로써 미국 연방정부로 하여금 중국 대표단이 지방에서 얼마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가를 목격하도록 했다. 또한 중국의 엄청난 구매력을 인식하게 만들었고, 이는 미국 의회에서 보호무역주의적 정서를 크게 완화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로써 우이는 상대와 타협을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실질적인 자기 역량을 과시했고, 다시 그 역량으로써 타협을 성공리에 이끌었다. 실로 대국적인 풍모와 담력 있는 용기를 갖췄으면서도 중국의 전통적인 상인 정신이 결합되어 절정의 협상력을 보여준 ‘실리적이면서도 대국적인 경제무역 협상’의 대표적인 행적으로 평가될 만하다.
또한 2005년 5월19일 그녀가 일본 국제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고이즈미 수상을 비롯한 일본 고위층들의 2차 대전 역사 문제 및 중·일 영토분쟁 문제를 둘러싸고 왜곡되고 강경한 발언이 이어지자 우이는 돌연 고이즈미 당시 수상과의 회담을 취소하고 일정을 앞당겨 귀국함으로써 일본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경고를 던지기도 하였다.
그녀는 베이징 부시장 시절 집무실에 야전침대를 놓고 1년 이상 집에 들어가지 않고 시정을 살핀 집념파이자 청렴한 인사로 정평이 나 있다. 그녀는 항상 “가질 수 있는 것만 가져라. 반드시 정당한 것을 가져야만 한다”라고 강조한다.
그녀는 현재 중국 여성으로서 중국 공산당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인물이다. 2005년 미국 잡지 <포브스>가 뽑은 ‘가장 영향력 있는 세계 여성 10인’에서 그녀는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에 이어 두 번째로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여성으로 선정되었고, 얼마 전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 이어 2위에 뽑히기도 했다. 아직 미혼인 그녀는 언젠가 이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나는 독신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생활이 나에게 이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고, 이제까지 한 명도 나의 삶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나는 생활을 지나치게 이상화한 것 같다. 사실 백마를 탄 왕자는 현실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술회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을 ‘작은 여자’라고 겸손해 한다. 그러나 그녀와 같이 일을 해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부드럽고 자상하지만 남성적인 과단성과 자유자재의 변통성(變通性)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70세가 되었지만 평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사용할 줄도 아는 ‘현대적인’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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