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 맺힌 땅에 ‘피’ 그칠 날 없네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 승인 2008.01.1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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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남동부에서 자동차 폭탄 테러…쿠르드족, 학살로 점령한 지역에서 ‘집시’ 신세 여전

 
"여기가 쿠르디스탄이냐고 말하니까 함께 있던 터키인들의 눈빛이 달라지더라.” 터키 이스탄불 대학의 유학생 유 아무개씨(31)는 2년 전 터키 남동부를 여행하다가 난감한 일을 당했다. 자신이 내뱉은 ‘쿠르디스탄’이라는 말 때문에 살벌한 분위기를 겪었던 것. 이라크 접경 지역인 터키 남동부 지역은 ‘쿠르드인의 땅’이라는 의미로 ‘쿠르디스탄’이라고 불리지만 터키 내에서는 그 말이 금기어에 속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난 1월3일(현지 시간) 터키 남동부 쿠르드족 밀집 지역인 디야르바키르에서 벌어진 자동차 폭탄 테러로 최소 다섯 명이 숨지고 70여 명이 부상당했다. 고등학생 두 명이 사망하는 등 민간인의 피해가 큰 것으로 나타났지만 실제 이 테러의 목표는 수송 버스를 타고 이동 중인 터키군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폭탄 테러는 세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아야 한다. 지난해 10월 쿠르드 노동자당(이하 PKK)의 매복 공격으로 터키 군인 10여 명이 사망했다. 그러자 두 달 뒤인 12월16일 터키군은 이라크 국경을 넘어 PKK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터키는 당시 지상군을 투입해 1백70여 명의 PKK군을 살해했고 22일, 23일, 그리고 크리스마스인 25일에는 헬리콥터와 F16기를 동원해 공중 폭격했다. 1월3일의 폭탄 테러는 터키군의 공격에 대항한 사건인 셈이다. 이라크 혹은 팔레스타인에서나 벌어지는 일로 알고 있는 폭탄 테러가 터키에서도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터키군 겨냥한 쿠르드 노동자당의 보복 공격인 듯

터키군과 PKK 전투의 연원은 1984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이때부터 PKK는 압둘라 오잘란의 지휘 아래 본격적으로 터키 정부와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터키군은 PKK와의 전투를 쿠르드족을 축출할 기회로 삼고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구를 무인 상태로 만들어갔다. 이후 15년간 터키군의 공격으로 인해 4천 곳이 넘는 쿠르드족 마을이 파괴되고 거주지를 벗어나 국내외로 피난한 쿠르드족 난민은 3백여 만명에 이르렀다. 1999년 오잘란이 체포되면서 PKK는 정전을 선언했지만 터키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고 테러리스트를 섬멸한다는 명분 아래 현재까지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PKK 역시 터키 정부에게 대항하고 있다.
터키와 쿠르드족의 갈등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만큼이나 뿌리 깊고 오래된 문제이다. 터키 국내에는 터키 인구의 약 25%에 이르는 약 1천5백만명의 쿠르드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갈등의 원인은 터키 정부의 ‘동화 정책’에 있다. 터키는 1923년 공화국을 건국한 이후 쿠르드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해왔다. 동시에 동화 정책을 펴며 만약에 있을지 모를 쿠르드족의 독립 시도를 사전에 봉쇄해왔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려운 현실 속에서 지내올 수밖에 없었다. PKK처럼 쿠르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당은 반국가 단체로 낙인 찍혀 탄압을 받았다. 언론이나 시민단체, 혹은 개인에 이르기까지 쿠르드인을 거드는 약간의 말과 행동도 터키 내에서는 용납되지 않았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의 오르한 파묵은 터키의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족 학살 사건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국가모독죄로 기소되기도 했다.
쿠르드족이 현재처럼 터키 남동부 지역에 주로 거주하게 된 데에는 아르메니아인이 얽혀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터키 동부 지역을 비롯한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아르메니아인이 주로 살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인은 아르메니아 정교(가톨릭계)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인 터키(당시 오스만투르크)와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1914년 4월24일은 아르메니아인에게 특별한 날로 기억되고 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내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 10만여 명이 이슬람교도에 의해 학살되기 시작한 날이기 때문이다. 1914년을 기점으로 매년 계속된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1차 세계대전 때까지 계속되어 1백50여 만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보다 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지만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덜 알려져 있다.
아르메니아인이 차지하고 있던 서부 아르메니아 지역은 지금의 터키 동부 지역이다. 아르메니아인이 사라진 이 땅을 쿠르드족이 차지한 것이다. 물론 그냥 빈 땅을 점령한 것이 아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주도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쿠르드인이 동참한 대가로 그들은 아르메니아인이 사라진 빈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현재 터키의 동부 지역은 ‘쿠르디스탄’으로 불리고 있지만 ‘여기는 아르메니아령으로 불려야 한다’라는 주장도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처럼 ‘아르메니아인의 학살’은 쿠르드족을 살펴볼 때 일부라고 할 수 있지만 ‘쿠르디스탄’이라고 불리는 지역을 파악하는 데는 무시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쿠르드족은 터키 동부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평원 북부, 이란 서부의 자그로스 산맥 북서부 일대에 거주하고 있고 ‘쿠르디스탄’은 이들이 사는 곳 전체를 일컫는다. 그런데 이 지역은 터키뿐만 아니라 이란, 이라크에도 속해 있다. 여러 나라의 국경에 접해 있는 지역이다 보니 문제가 한층 복잡해지고 있다. 특히 국내에 쿠르드족을 거느리는 각국은 자국의 안정 때문에 같은 이슬람교도인 쿠르드족의 자결권을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합의를 한 상태이다.

 

주변 나라도 자국 안정 때문에 쿠르드족 자결권 인정 안 해

반면에 중동의 정치 역학을 이용해 자국에게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내려는 열강에게 쿠르드족은 장기의 말과 같은 존재이다. ‘쿠르디스탄 건설’은 쿠르드족에게 항상 당근처럼 제공되고 있다.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미국 등 서방의 이익을 위협하자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족을 지원했던 사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쿠르드족이 미국의 편을 들었던 사실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라크 전쟁이 끝난 이후 이라크 내 쿠르드족은 모술과 키르쿠크 등에서 자치권을 확보하는 등 약진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쿠르드족이 자치 지역 내 유전에 대한 권한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라크 중앙 정부의 승인 없는 계약은 인정할 수 없다’라며 거절했다. 미국이 쿠르드족의 성장을 원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다.
게다가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 1월8일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터키의 압둘라 귤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회동을 갖고 PKK를 ‘공동의 적’으로 규정하고 PKK의 공격을 비난하며 나섰다고 한다. 미국은 터키의 군사 작전을 계속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혀 쿠르드 자치권의 확대와 분리 독립 운동에 제동을 걸 것임을 시사했다. 이라크 정세에 영향을 주기 전에 속전속결로 차단할 의지를 내비친 셈이다.
이처럼 대략 2천2백여 만명으로 추정되는 ‘중동의 집시’ 쿠르드족이 국가를 건설하는 일은 앞으로도 요원해 보인다. 따라서 PKK와 터키의 갈등이 더욱 격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쿠르드족의 움직임은 이라크, 이란, 터키 등 여러 나라와 얽혀 있는 만큼 그곳의 정세를 읽는 하나의 키워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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