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 악령에 ‘악’ 소리 나는 코트
  • 허재원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 ()
  • 승인 2008.01.14 13:5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로농구, 스타급 선수들 줄줄이 벤치 신세…상위권 팀들은 부상자 드물어 대조적

 
지난 2001년 10월. 동국대를 졸업한 키 1백78cm의 선수가 프로농구 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이 선수를 주목하지 않았다. 대학농구 하위권에서 전전하던 동국대 출신의 무명 선수였다. 포지션이 가드라고 하지만 키가 너무 작았고, 왜소한 체구는 프로농구의 험한 몸싸움을 감당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선수가 시즌 초반부터 소속팀 대구 오리온스의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를 꿰찼다. 당시 용병 마르커스 힉스와의 콤비 플레이는 미국 프로농구(NBA)에서나 보던 그것이었다. 현란하면서도 빠른 드리블과 자기 편도 속일 정도로 예상치 못한 패스는 프로농구 판에 돌풍을 몰고 왔다.
김승현(30·대구 오리온스). 그는 프로 데뷔 첫해인 2001~2002시즌 이상민·신기성·주희정 등 기라성 같은 선배 포인트가드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어시스트왕에 등극했다. 77표 중 76표를 휩쓸면서 신인왕에 올랐고, 팀을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MVP까지 거머쥐었다. 김승현은 이미 한국 프로농구의 키워드이자 구세주였다.
2003~2004시즌부터는 세 시즌 연속 어시스트왕을 차지하는 동시에 정규리그 베스트 5에 올랐다. 그 누구도 그를 따라오지 못했다. 김승현은 그렇게 현역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군림했다.
2006년. 김승현의 허리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다. 극심한 통증으로 경기를 뛰려면 진통제를 맞아야 했고 경기를 마치면 곧바로 한의원으로 달려가 침 시술을 받았다. 그렇게 한 시즌을 버텨냈지만 이미 예전의 김승현은 아니었다.

김승현, 출전 선수 엔트리에서 빠지기도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운동은커녕 평소 생활에도 불편을 느꼈고, 다리까지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승현은 여느 때처럼 진통제를 맞았고 전국 방방곡곡 용하다는 곳을 찾아 다니며 허리에 좋다는 음식을 먹고 각종 치료를 받았다.
지난해 10월18일. 프로농구 2007~2008시즌이 개막했다. 김승현은 12득점 12어시스트에 4개의 가로채기까지 보태며 팀의 개막전 승리를 이끌었다. 그 누구도 김승현의 올시즌 활약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3쿼터를 마친 후 김승현은 허리를 잡으며 통증을 호소했다. 제 발로 걸어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통증은 극심했고, 김승현은 이튿날 서울 삼성병원을 찾았다.
추간판 탈출증 심화. 진단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흔한 말로 허리디스크였다. 4, 5번째 디스크가 파열된 김승현의 허리는 이미 수술이 아니면 완치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그러나 김승현은 선수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수술을 거부하고 재활을 택했다. 집과 병원을 오가는 재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고, 김승현은 오리온스의 출전 선수 엔트리에서 빠지고 말았다.
4승 26패. 김승현의 입단 이후 지난 시즌까지 6년 연속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명문팀 오리온스의 올시즌 성적이다(1월8일 현재). 팀 전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김승현이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오리온스는 그야말로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다. 김승현이 아직도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지난 1월5일 경기부터 뛰고 있지만, 이미 갈피를 못 잡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린 팀 전력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김승현뿐만이 아니었다. 오리온스는 외국인 선수의 잇단 부상으로 올시즌에만 모두 7명의 용병을 선발하는 프로농구 신기록(?)을 세우며 신음하고 있다. 시즌이 개막하기도 전에 드래프트에서 뽑은 2명의 외국인 선수(마크 샌포드, 코리 벤자민)를 부상 때문에 모두 교체해야만 했던 것은 전주곡에 불과했다. 새로 영입한 로버트 브래넌은 허리 부상으로 시즌을 접었고, 대체 선수로 새로 들여온 칼튼 아론마저 7경기만 뛰고 부상으로 떠났다. 지금 뛰고 있는 리온 트리밍햄도 다리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오리온스는 10경기 이상을 국내 선수로만 경기를 치르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같은 사정은 9위 울산 모비스에서도 비슷하다. 용병 교체 카드 2장을 모두 소진한 후 ‘5경기 출장 제한’이라는 페널티까지 감수해가며 한국계 용병 에릭 산드린을 영입한 모비스였다. 그러나 산드린이 데뷔전 30여 분을 앞두고 발목 통증을 호소하며 경기 출전을 거부한 것.
이후 발등에 박혀 있는 철심이 발견되며 부상 은폐 의혹까지 일었고, 파문은 일단락되었지만 산드린은 아직도 ‘아픈’ 발목을 이끌고 절반의 선수로 전락했다. 모비스는 산드린이 결장하는 동안 속절없이 10연패의 수렁에 빠졌고, 지난 시즌 우승팀의 영예는 온데간데없이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다.

오리온스와 모비스의 속절없는 추락

지난해 12월21일 서울 SK와 전주 KCC의 잠실 경기. 3쿼터 중반 SK의 에이스 방성윤이 코트에 쓰러졌다. 코트 오른쪽으로 파고들다 발이 미끄러지며 왼쪽 무릎 인대가 파열되었다. 전치 8주라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5라운드가 한창인 2월 중순까지 복귀가 불투명하다. 이후 SK의 김진 감독은 김태술과 문경은의 공격력을 극대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하며 방성윤의 빈자리를 최소화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방성윤의 부상 이후 SK의 성적은 2승 4패. 패한 4경기 모두 4점 차 내로 아깝게 져 승부처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방성윤의 공백이 더욱 크게만 보인다. 시즌 개막 이후 줄곧 상위권을 지켜오던 SK는 어느덧 공동 6위까지 추락하며 또 다시 6강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SK뿐만이 아니다. 8위에서 허덕이고 있는 KTF 역시 국내 선수들이 줄줄이 쓰러지면서 베스트 멤버로 단 한 경기도 치르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반면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팀들은 약속이나 한 듯 부상으로 결장하는 선수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줄곧 단독 선두를 질주하고 있는 1위 원주 동부는 레지 오코사와 김주성의 ‘트윈 타워’가 건재하고 표명일-강대협-이광재 등의 토종 외곽 라인이 부상 없이 건강한 시즌을 보내고 있다.

 

2위 안양 KT&G와 3위 전주 KCC, 4위 창원 LG는 안정된 용병 라인에서 상위권의 힘을 얻고 있다. KT&G는 1라운드 지명(7순위) 마퀸 챈들러뿐 아니라 2라운드의 T.J.커밍스까지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다양한 공격 옵션을 구사하고 있고, KCC의 브랜든 크럼프와 제임스 로빈스도 수준급 기량을 자랑한다. LG도 오다티 블랭슨과 캘빈 워너가 팀을 이끌고 있는데 이 세 팀의 공통점은 개막전 용병 라인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부상 없는 팀이 좋은 성적을 올린다는 평범한 명제를 여지 없이 증명해주고 있다.
프로농구 판을 떠도는 ‘부상 악령’에서 선수들을 어떻게 보호해내느냐. 그것이 시즌 종료 후 받아들 성적표를 좌우할 전망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