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사법제도 ‘꽃’ 피울까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 승인 2008.01.21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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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참여재판, ‘무늬만 참여’ 논란 일어…5년 ‘시험대’ 거쳐 정착 여부 결정

 
요즘 눈길을 끄는 TV 방송 광고가 하나 있다. 연미복을 입은 현직 판사들이 법정 문 앞에 두 줄로 서서 국민을 맞이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는 올해부터 시행되는 ‘국민참여재판제도’를 알리는 대법원의 광고이다. 한마디로 국민이 직접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해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 제도를 도입하는 목적은 무엇보다 재판의 공정성을 높이는 것이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한 명의 법관보다 여러 국민 재판관들의 판단이 재판의 투명성과 객관성을 담보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이 제도의 근간이 되는 법률이 국회에 제출된  2005년 당시 경희대 구자숙 교수가 전국 1천9백74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89.4%가 국민참여재판제도 도입에 동의했다. 배심원으로 참여할 의향이 있다는 응답도 83.5%였다. 국민참여재판이 기존 재판보다 공정한 판결을 할 것이라는 의견도 85.8%에 달했다.
그러나 이 제도를 미국 법정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배심원 제도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미국에서 시행하는 배심원 제도는 국민이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해 검사와 변호사의 공방을 지켜본 후 유·무죄를 평결한다. 판사는 배심원의 평결을 확정·발표하고 형량을 정하는 역할을 한다. 국민참여재판에 대해 회사원 기호상씨(33)는 “미국 배심원 제도와 같은 것으로 알고 있다. 재판의 공정성을 높일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형식은 비슷하지만 실제 내용은 크게 다르다. 글자 그대로 국민이 재판에 ‘참여’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법조계 내부에서는 참여의 질이 미약해 국민을 우롱하는 제도라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배심원 평결, ‘권고’ 수준에 그쳐

가장 큰 이유는 국민으로 구성된 배심원의 평결이 법률상 구속력이 없다는 점이다. 재판을 지켜본 배심원들은 의견을 교환하는 평의(評議)를 통해 유·무죄를 평결한다. 그러나 이 평결은 ‘권고’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사건을 보는 시각이 다를 경우, 법관이 배심원의 평결을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
국민이 재판에 참여하지만 최종 결정 권한은 여전히 법관이 쥐고 있는 셈이다. 이는 배심원 제도 대신 국민참여재판제도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를 쓴 이유이기도 하다. 대검찰청 이완규 부장검사는 “국민이 재판에 참여해 유·무죄를 결정하는 것이 진정한 국민참여재판이다. 그러나 국민보다 법관이 우위에 있는 제도를 시행하면서 국민의 사법 참여가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생업까지 포기하면서 일반 국민들이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 단순히 재판을 구경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두고 ‘한국형 배심원 제도’ 또는 ‘국민참여재판제도’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기형적인 재판 제도이다”라고 지적했다.
현행법상 국민이 재판에 참여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피고인이 국민의 재판을 받는 경우는 헌법상 보장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상충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국민참여재판제도이다. 국민이 재판에 참여는 하되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모양새를 잉태한 것이다.
또 항소심에서는 국민이 재판에 참여할 수 없다. 기존 재판대로 법관이 판결한다. 이 경우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배심원이 무죄, 판사가 유죄를 판결한 1심에 이은 항소심에 국민의 관심이 쏠릴 수 있다. 법 전문가인 법관과 일반 국민의 판결이 대결 구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서울중앙법원의 한 판사는 “법관의 명예도 있는데 아무리 국민의 평결이 옳아도 1심 결과를 번복할 판사가 있을지 궁금하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배심재판으로 판결이 난 사건에는 항소심이 없다. 일본도 과거 배심 제도를 도입했지만 법관이 배심원의 평결을 거의 따르지 않아 배심원 제도가 폐지되었다.
반대 시각도 있다. 동국대학교 최봉석 법학과 교수는 “모든 형사재판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또 국민이 참여하는 재판은 언론의 관심도 받게 되는데, 그 재판에서 국민의 평결을 뒤집을 만한 배짱을 가진 판사가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평결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만장일치가 되지 않을 경우 판사를 참석시켜 의견을 듣도록 되어 있다. 배심원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평의를 거쳐 만장일치로 평결을 이끌어내는 미국의 배심원 제도와 다른 부분이다. 우리나라가 시행하는 제도는 국민과 법관이 의논하는 참심제를 배심제에 혼합한 것이다. 본래 참심제는 국민이 법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재판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법관 2명, 국민 1명으로 구성된 재판정이 꾸려지고 국민도 법관과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법에 비전문가인 국민에게 전문가인 법관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법 전문가들은 “국민의 평의에 법관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평결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법의 아마추어인 배심원들이 법 전문가인 법관의 입김에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국민이 배심원 자격으로 재판에 참여할 수 있는 경우는 살인·강도·강간 등 중범죄를 다루는 형사소송이다. 그러나 조직폭력 사건과 같이 배심원이 위험에 처할 수 있거나 재판 당사자의 민감한 사생활과 관련된 사건은 제외된다.

 

피고인의 신청이 있을 때만 재판 가능…법원이 거부할 수도

문제는 피고인의 신청이 있을 경우에만 국민참여재판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또 피고인이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더라도 법원이 이런저런 이유로 거부할 수도 있다. 대검찰청 이부장검사는 “국민참여재판제도 시행 권한을 사실상 법원이 가지고 있다. 결국 국민참여재판 시행 여부와 최종 판결까지 법원이 다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국민참여재판이라고 보기 어렵다”라고 주장했다.
국민참여재판제도가 시행되기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법에 대해 비전문가인 일반 국민이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사법권 행사 참여에 대한 국민 의식이 제대로 갖춰져 있는가, 학연·지연을 중요시하는 우리 관습이 공정한 사법 판단의 걸림돌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등이다.
그럼에도 국민참여재판이 민주적 재판 제도의 대세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예를 들어 국민참여재판제도는 증거재판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다. 심증과 정황상 유죄이지만 증거가 없어 무죄를 받았던 흉악범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동국대 최교수는 “증거재판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국민이 처벌을 원하지만 증거가 없다고 흉악범을 풀어주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반대로 증거는 있지만 범행 당시 불가피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배심원이 고려해 평결을 내릴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O. J. 심슨 재판의 경우처럼 유력한 범죄 용의자를 풀어주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전정한 의미의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정영진 부장판사는 “비전문가인 국민이 사건을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객관적으로 평결할지가 관건이다. 배심원 제도의 맹점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1994년 미국 O. J. 심슨 사건이다. 그럼에도 이를 민의로 받아들여야 민주적 사법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민참여재판제도는 ‘법조 엘리트’ 문화를 깨뜨리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김선수 전 청와대 사법개혁비서관은 법조계의 서열 문화와 사법고시 기수 문화가 재판을 국민 다수의 정서와 겉돌게 하는 요인이 되어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국민참여재판제도는 김대중 정부 시절 사법 제도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발족한 대통령 자문 기구인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1999년 국민의 사법 참여 방안을 장기적으로 연구·검토할 과제라고 보고하면서 가시화되었다. 이후 대법원은 2003년 사법개혁위원회를 설치하여 사법 제도 개혁을 연구했고, 2004년 배심제와 참심제를 혼용한 제도를 건의했다. 대통령 직속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는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안’을 2005년 국회에 제출했다. 2007년 4월 이 법률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6월 공포되었다.
예정대로라면 올해는 우리나라 60년 사법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해가 될 전망이다. 국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재판이 오는 2월에 대구지방법원에서 최초로 열린다.
대구지법 형사합의과 정동운 계장은 “아직 구체적인 날짜가 잡히지는 않았지만 국민이 참여하는 첫 재판이 다음 달 열릴 것이다. 처음 있는 일이고 절차가 달라져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제도가 잘 정착되면 더욱 공정한 재판이 진행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민참여재판제도는 앞으로 5년 동안 시험대에 오른다. 이후 대법원 산하 국민사법참여위원회가 그 결과를 평가해 이 제도의 정착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민주적 사법 제도의 꽃으로 불리는 국민참여재판제도가 연착륙을 하기 위해서는 법(法) 자의 의미를 제대로 살려야 한다. 법은 물(水)이 흘러가는(去) 것처럼 순리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만큼 국민의 뜻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법조계 인사들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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