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생부’ 괴담 “껄쩍지근하네”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 승인 2008.03.0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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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현역 의원 30% 일단 탈락’ 방침에 호남 정가 뒤숭숭…김홍업·박지원 공천 여부에 관심 집중

호남 정가에 ‘공천 괴담’이 떠돌고 있다. 대대적인 ‘물갈이 태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예상 속에서 공천 배제 대상으로 현역 의원을 비롯한 유력 정치인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호남은 통합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오랜 텃밭이다. 현재 지역구 31곳 모두를 민주당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 만큼 공천 여부가 곧 당락을 결정지을 수 있다. 공천 신청자 입장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특히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의 합당은 공천 경쟁을 가속화했다. 31개 지역구에 2백2명의 신청자가 몰려 평균 경쟁률이 6.5 대 1을 상회할 정도로 치열하다.

 
천의 칼자루를 쥔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은 일찌감치 ‘호남 물갈이’를 예고했다. 박위원장은 평화방송에 출연해 “어느 지역을 물갈이한다는 섬뜩한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 호남이 차지하는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 호남 변화의 질과 양이 당 변화의 질과 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기에 그만큼 엄격하고 신중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박위원장의 이러한 생각은 공천심사위원회(이하 공심위) 회의를 통해 차츰 구체화하고 있다. ‘공천 혁명’은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하나는 현역 의원 물갈이이다. 공심위는 지난 2월26일 회의에서 호남 현역 의원 중 30%를 1차 공천 심사 단계에서 탈락시키기로 결정했다.
인지도, 의정 만족도, 재출마 지지도, 17대 총선 투표 성향, 정당 지지도 등에 대한 국민 여론조사를 토대로 현역 의원에 대한 의정 활동 평가 지수를 산출해 A~D등급으로 나누고 하위 등급인 D등급에 해당하는 30%를 공천에서 배제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전북의 경우 불출마를 선언한 김원기 의원을 제외하고 10명 중 3명, 광주·전남의 경우 역시 불출마를 선언한 염동연 의원을 제외한 19명 중 6명의 현역 의원이 공천을 받지 못한다. 현재 공천을 신청한 호남 지역 현역 의원은 4선이 1명, 3선이 2명, 재선이 8명, 초선이 18명이다. 공심위는 이미 여론조사를 완료했으며 현장 실사를 통한 여론 탐문도 어느 정도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호남 정가에는 공천 배제 대상을 담은 이른바 ‘살생부’가 난무하는 등 후보자 간 상호 견제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광주에서 공천을 신청한 한 후보자는 “현역 의원 진영에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공심위의 실사 결과를 놓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정보를 흘리는 경우가 많다”라고 지역 분위기를 전했다.
물갈이 태풍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30% 탈락은 본격적인 심사에 앞선 1단계 조치이며 2, 3단계의 강도 높은 검증을 거치면서 추가 탈락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박경철 공심위 간사는 “향후 물갈이 폭이 더 커질 수 있다”라고 밝혔다.
 
부정·부패 및 비리 연루자에 대한 공천 기준도 ‘공천 혁명’ 정도를 가름하는 주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차남인 김홍업 의원과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쟁쟁한 인사들의 공천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당 내에서도 가장 민감한 사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공심위에서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강경론과 상황에 따른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는 온건론이 맞서면서 결론을 짓지 못해왔다. 다만 돈을 받은 개인 비리 연루자, 대통령 선거 과정에 당을 위해 일하면서 처벌받은 인물, 선거법을 어겼지만 돈 문제가 아니라 절차를 위반한 경우 등 세 그룹으로 나누어 공천 여부를 결정하는 방안이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업 의원의 경우 개인 비리에 해당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김의원은 기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2년 구속 기소되어 2003년 징역 2년형이 확정되었다. 2005년 광복절에 사면된 후 2007년 4월 전남 무안·신안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목포YWCA 등 26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전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와 광주 지역 26개 시민단체는 “호남을 무시하고 자존심을 짓밟는 처사”라며 김의원의 출마를 비판했다. ‘아버지 후광으로 당선되었다’는 뒷말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의원측은 “지난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다. 그때 심판을 받고 정리가 된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면서 “공심위에서 합리적으로 판단할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DJ의 두 분신 두고 “용퇴 마땅” “배제하면 역풍 일 수도” 견해 갈려

 
박지원 전 비서실장의 경우도 논란이 되고 있다. 박 전 실장은 2003년 6월 대북송금 사건을 맡은 송두환 특검팀에 긴급 체포되어 2심에서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뇌물 수수, 알선 수재 등의 혐의로 징역 12년과 추징금 1백47억5천2백여 만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2004년 11월 대법원이 박 전 실장의 ‘현대비자금’ 1백50억원 수수 혐의에 대해 무죄 취지의 파기 환송을 결정하고, 2006년 5월 서울고법이 대북 불법 송금과 대기업 자금 1억원 수수에 대한 유죄만 인정해 징역 3년형을 선고하면서 지루한 법정 공방이 끝났다.
2007년 2월 특별사면 조치를 받아 동교동으로 돌아간 박 전 실장은 같은 해 말 복권된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전남 목포에서 실추된 명예를 되찾겠다며 총선 출마를 선언했다. 동교동계 정치 선배인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역시 일찌감치 목포 출마 의사를 밝혀 한때 묘한 신경전이 펼쳐졌지만 한 전 대표가 공천 신청을 포기하면서 내부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총선 출마에 대해 ‘호남 지역주의 부활’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등 곱지 않은 시선도 적지 않다. 이 지역에 공천을 신청한 배종호 전 KBS 기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렛대로 이용해 공천을 받아 목포에 출마하면 이는 지역주의 망령을 다시 불러들이는 재앙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박 전 실장측은 “대북송금 특검은 정치적 재판으로 억울한 측면이 있다”라고 지적한 후 “중요한 것은 목포 시민들이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있고 이를 종합해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높은 지지를 보내고 있다”라고 밝혔다. 또 “공심위는 정당한 평가를 내릴 것으로 믿는다. 공천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라고 덧붙였다.
공심위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지가 주목된다. 박재승 위원장은 아직 구체적인 입장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정치권의 부정·부패 행태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중대 결단이 내려질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두 분이 민주화 시절에 고생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새로운 시대에 국민이 원하는 새로운 과제가 있다. 더 참신하고 역량 있는 후진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길을 열어주는 게 바람직하다”라고 밝혔다.
한편으로는 DJ의 분신과도 같은 두 유력 정치인에 대한 공천 배제가 자칫 당내 분란을 일으키고 호남 민심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런 만큼 ‘정치적 고려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호남에 지지 기반을 둔 지도급 정치인의 수도권 출마 여부는 또 다른 관심사이다. 공심위에서는 이 지역 터줏대감인 정동영 전 대통령 후보와 박상천 대표가 당을 위해 결단을 내려줄 것을 바라는 기류가 강하다. 4선의 장영달 의원과 3선의 정세균·정동채 의원 등도 거론된다. 정동영 전 후보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의 지역구에 공천 신청을 해놓은 상태이다.
박재승 위원장의 소신도 마찬가지이다. “나라면 고민하지 않고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그는 지난 2월27일 회의에서 “국가를 경영하겠다고 마음먹었던 분이 권력 창출을 보고 무서워서 야당으로서 출마를 주저하고 있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우리 정치를 이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더더욱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호남에서의 ‘공천 혁명’은 충청권을 거쳐 수도권으로 북상할 가능성이 크다. 공심위는 호남 이외 지역에 대해서도 현역 의원 30% 교체를 단행할 계획이다. 단수 후보 지역구에서도 부적격자를 엄격하게 걸러낸다는 방침을 세워둔 상태이다. ‘살생부’까지 등장한 ‘공천 괴담’이 호남에서 수그러들까, 아니면 전국으로 확산될까? ‘잠 못 드는’ 정치인들에게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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