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와 국악, 뮤지컬을 만나다
  • 반도헌 기자 bani001@sisapress.com ()
  • 승인 2008.04.28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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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뮤지컬 집단 ‘타루’의 <시간을 파는 남자> / 소리꾼들이 펼치는 신명 나는 풍자극

 

뮤지컬 <시간을 파는 남자>는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작은 뮤지컬이다. 6명의 배우가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 노래와 춤을 선사하고 7명의 악사가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하는 모습은 다른 뮤지컬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시간을 파는 남자>에서 들려주는 음악은 서양 음악이 아니라 판소리와 국악이다. 판소리와 국악이라 듣기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은 할 필요 없다. “국악 공연이라고 다르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보다 보면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라는 민경준 연출가의 말처럼 <시간을 파는 남자>의 음악은 낯설기보다 친숙하다.

 

 

판소리 모습과 닮아 ‘낯설음’ 없어


국악뮤지컬 집단 ‘타루’의 <시간을 파는 남자>는 스페인 작가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의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퓨전 국악뮤지컬이다. 이 작품은 시간에 쫓겨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간과 여유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풍자적인 우화다. 어린 시절에 붉은머리개미를 연구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어떤나라’의 ‘김씨’는 취직하고, 가족을 돌보고, 주택 융자금을 갚아야 하는 우리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꿈을 잃어간다. ‘김씨’는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 끝에 ‘시간’을 팔기로 결정하고, 구입하면 그만큼의 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5분의 시간’을 판매한다. ‘5분의 시간’이 대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어떤나라’와 ‘김씨’에게 벌어지는 일들이 주요 내용이다. 다분히 교훈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사회를 비틀고 꼬집으면서 웃음을 잃지 않는 극의 내용이 풍자적이면서도 해학적인 판소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타루’는 2001년 창단해서 7년 동안 국악과 판소리를 현대적으로 풀이한 크고 작은 공연을 1백10여 회 펼쳐왔다. 2006년 <판소리, 애플그린을 먹다>를 통해 대학로에 진출했고, 본격적으로 상업 공연에 나선 것은 <시간을 파는 남자>가 시작이라고 보면 된다. 타루는 학교별·스승별로 나뉘어 소통 공간이 없던 젊은 국악인들의 모임에서 시작했다. 창단 멤버인 곽동근 기획실장은 “판소리와 국악을 공부하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고민과 예술관을 나누자는 뜻에서 동호회처럼 만나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판소리·국악 전공자만 모인 것은 아니다. 곽동근 실장과 민경준 연출가는 공대 출신으로 대학 시절 탈패 동아리에 가입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인생 방향을 튼 경우다. 

 

타루의 배우들은 전문 뮤지컬 배우가 아니라 젊은 소리꾼이다. 안숙선·성우향·정회석·김수연 같은 명창에게서 전통 판소리를 사사한 이들은 대중에게 좀더 다가가고자 국악뮤지컬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전문 뮤지컬 배우에 비해 연기·발성·몸짓·춤 등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문적인 뮤지컬 워크숍, 서양 성악의 발성법 연구, 씨어터 댄스 수업 등으로 부족한 부분을 갈고 닦아 소리꾼 배우들의 공연에서 아마추어 배우로서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양 뮤지컬과 국악뮤지컬은 창작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서양 뮤지컬은 작곡가와 연출가의 영향력이 막강하지만 국악 뮤지컬은 이들 외에도 배우, 악사가 모두 창작의 주인공이다. 극작가가 텍스트를 작성하면 소리꾼들이 판소리의 맛을 살릴 수 있도록 조사를 넣고 빼거나 단어를 바꾸는 등의 손질을 한다. 소리꾼의 손질이 끝났다고 작업이 완료되는 것은 아니다. 소리꾼의 작업이 다시 작곡가와 극작가에게 넘어가고 서로 계속적인 피드백을 교환하면서 창작이 이루어진다. 국악 파트를 담당하는 악사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악사로 참여한 정종임씨는 “보통은 창작 과정 후반에 악사들이 참여하는데 이번에는 창작 시작 단계부터 함께했다. 판소리 반주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익숙한 멜로디에 어떻게 하면 판소리를 맛깔나게 실을까를 고민했다”라고 말했다.

 

서양 뮤지컬 작곡가도 참여해 조언


 

 

<시간을 파는 남자>에는 서양 뮤지컬 작곡가인 노선락씨도 참여해 국악인들과 피드백을 나누며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익숙한 서양 음악 선율과 칼칼한 판소리꾼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5분의 자유>는 이런 작업 과정이 잘 담겨 있는 곡이다. 민경준 연출은 음악 작업에 대해 “새로운 음악들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다. 국악의 본질은 느리고 지루한 것이 아니라 신명나고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면적인 것만 따오기보다는 국악의 본질에 더 접근하려고 했다. 어떤 악기든 써서 국악의 신명과 즉흥성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시간을 파는 남자>에서는 가야금·해금·피리 같은 전통 국악기 외에 일렉트릭베이스·콘트라베이스 등 서양 악기도 함께 사용된다. 


젊은 판소리꾼에게 전통을 벗어난 이번 작업은 모험이다. 전통 판소리의 길을 가지 왜 그런 일을 하냐며 반대하는 스승들도 있었다. 유파와 스승 중심으로 전수가 이루어지는 판소리계에서 스승의 말을 거역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사실 전통 판소리꾼으로서 평탄한 길을 밟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열망이 더 강했다. 소리꾼 배우 김용화씨는 “지금의 스승님들이 떠나고 우리 세대들이 그 나이가 되었을 때를 생각했다. 국악을 즐기도록 만드는 지금의 작업이 없다면 그때가 되어서 판소리는 전수만을 위한 화석과 같은 전통으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중을 쫓아다니기보다 스스로 재밌게 하다 보면 같이 좋아하는 사람들도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악뮤지컬로 국악에 대한 선입견을 깬 분들이 전통 판소리를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주인공 ‘김씨’ 역을 맡은 안이호씨는 “이 작업은 우리에게 하나의 실험이다. 공연을 통해 잃어버린 줄 알았던 전통 공연 코드가 아직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판소리를 쉽게 전달하는 우리 작업이 현재를 살아가는 대중과 전통 판소리 사이에 연결 고리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시간을 파는 남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을 사용한다. 정종임씨는 “판소리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언어다. 이 시대의 언어로 판소리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전통 판소리를 모두 현대어로 바꿔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김용화씨는 “오랜 세월 동안 다듬어진 전통 판소리의 사설은 구성진 가락에 딱 들어맞는다. 현대어로 판소리를 만드는 작업이 전통 판소리와 같은 참맛을 내기 위해서는 오랜 숙성 과정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타루는 <시간을 파는 남자>를 계속 수정하고 업그레이드해서 좀더 완성적인 형태로 만들어갈 계획이다. 


<시간을 파는 남자>는 6월28일에 열리는 통영예술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고 거창 연극제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6월8일에는 런던시청 주관으로 런던에서 열리는 ‘코리아 서머 페스티벌’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가해 공연을 갖는다. 타루의 첫 외국 공연이 될 이번 공연에 대해 곽동근 실장은 “런던 시민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가 담겨 있는 독특한 뮤지컬 양식을 소개시켜줄 기회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오는 7월에는 국악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젊은 국악인들의 모임인 가야금 앙상블   ‘아우라’, 퓨전 국악 그룹 ‘옌’, 퓨전 타악 그룹    ‘태동연희단’ 실내국악단 ‘정가악회’ 등과 함께 대학로 상명아트홀에서 릴레이 공연 페스티발을 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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