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차명계좌 왜 필요했을까
  • 김지영 기자 young@sisapress.com ()
  • 승인 2008.05.20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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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성 전 국세청장, <시사저널>이 보도한 별도 계좌 4개 외 신세계 임원 명의 25개 추가 보유

ⓒ연합뉴스
신성해운의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최근 이주성 전 국세청장이 25개의 차명계좌를 추가로 보유한 사실을 포착했다. 이보다 앞서 <시사저널>(제968호)은 이 전 청장이 국세청장으로 재직할 당시 처남과 여비서 등의 명의로 4개의 차명계좌를 보유한 사실을 보도한 바 있다. 이로써 이 전 청장이 보유한 차명계좌는 무려 29개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전 청장이 보유한 무더기 차명계좌들에는 수십억 원이 입금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최근 검찰에 발견된 25개의 차명계좌는 모두 한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바로 신세계의 최고위급 임원인 ㄱ씨의 명의로 만들어진 차명계좌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전 청장과 ㄱ씨는 어떤 관계였기에 차명계좌를 만들어주고, 보유하게 되었을까. ㄱ씨는 신세계에서 경영 전반을 관할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핵심 임원이다.

이 전 청장과 ㄱ씨는 같은 고향 출신으로 이 전 청장이 11년 선배다. ㄱ씨는 삼성 계열사 등에서 근무하다 지난 1998년 신세계로 옮겨왔는데, 그 이전부터 가족들끼리도 서로 만날 정도로 상당히 가까운 관계다. 그런데 이 전 청장이 지난 2000년 서울지방국세청 조사2국장이던 시절, 이 전 청장은 ㄱ씨에게 주민등록증 사본을 부탁했고, 이에 ㄱ씨가 자신의 부인을 통해 이 전 청장의 부인에게 사본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 전 청장은 서울 압구정동에 지점을 두고 있는 금융기관들에서 차명계좌를 개설했다.

명의 당사자 “주민등록증 사본 건네줘…계좌 개설 몰랐다” 반발

이에 대해 ㄱ씨측은 “주민등록증 사본을 건네줄 당시에 차명계좌를 만들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부동산과 관련해 사용할 일이 있다고 해서 사본을 건네준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ㄱ씨가 자신의 명의로 25개나 되는 계좌가 개설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최근 검찰 조사 과정에서였다고 한다. ㄱ씨측은 “ㄱ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명계좌들이 만들어졌으며, ㄱ씨는 피해자다”라고 주장했다. ㄱ씨측의 주장대로 이 전 청장의 부동산 매입 등과 관련해 명의를 빌려주었다면 부동산실명제법을 위반한 셈이고, 차명계좌 개설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금융실명제법에 저촉되는 행위다. 이래저래 ㄱ씨가 고향 선배인 이 전 청장에게 명의를 빌려준 것은 적절하지 못한 처신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전 청장은 왜 이토록 많은 차명계좌가 필요했을까.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전 청장이 ㄱ씨 명의로 차명계좌를 개설한 시점은 지난 2000년이다. 그리고 국세청장 시절이던 지난 2005년부터 2006년 사이에도 여비서 등의 명의를 빌려 차명계좌를 만들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이 전 청장이 의무적으로 신고하게 되어 있는 정부 고위공직자 재산 신고를 피하기 위해 수십 개의 차명계좌를 만들어 자신의 재산을 분산 예치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다. 아무래도 국세청 고위 간부로서 거액의 재산을 갖고 있다면 세간의 시선이 곱지 않을 수 있기에 이를 의식해 자신의 재산을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은닉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행여나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될 ‘비밀 자금’을 관리하기 위해 다량의 차명계좌를 필요했었던 것인지도 의문으로 남는다.

검찰은 우선 이 전 청장의 차명계좌로 신성해운의 로비 자금이 흘러들어갔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최근 포착된 ㄱ씨 명의로 된 25개 차명계좌가 만들어진 경위도 함께 수사하고 있다. 이 전 청장과 ㄱ씨가 단순히 개인적인 친분 관계로 차명계좌를 만든 것인지 아니면 국세청과 신세계 회사 차원에서 개설된 계좌인지에 대한 수사도 병행하고 있다.

신세계측 “회사와 전혀 관계없는 일” 주장

이 전 청장은 검찰 조사에서 “평소 잘 아는 사이여서 차명계좌를 만들었을 뿐 업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진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친분으로 만들어진 계좌라는 것이다. 신세계 관계자는 “우리 회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어디까지나 ㄱ씨 개인의 일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신세계는 이 전 청장이 국세청장으로 재직하던 지난 2006년 2월부터 4월까지 두 달 정도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 ㄱ씨는 현재보다 직위는 한 단계 낮았으나, 업무는 현재와 거의 동일했다. 이에 신세계가 세무조사를 받는 과정에 이 전 청장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ㄱ씨가 신세계 경영 전반에 대한 업무를 하고 있는 데다, 오래전부터 고향 선후배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세계 측은 세무조사와 이 전 청장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신세계 관계자는 “당시 세무조사를 받은 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어 국세심판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렇게 해서 일부 추징액을 돌려받았다. 만약 이 전 청장이 우리 회사 세무조사에 관여했다면 굳이 국세심판원까지 갈 필요가 있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이 전 청장은 2006년 6월27일 느닷없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고, 하루 만에 사표는 수리되었다. 그리고 6월29일 이임식장에서 “개인적인 건강 문제 등 모든 면을 고려해 현 시점이 공직을 마무리할 적기다”라는 말을 남긴 뒤 국세청을 떠났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사퇴여서 항간에는 구구한 추측들이 난무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당시 청와대는 이 전 청장과 삼성이 얽힌 ‘심상치 않은 첩보’를 입수해 내사를 벌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전 청장이 사퇴했던 진짜 사연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진 상태다.

신성해운 사건에 대한 5개월여 동안의 검찰 수사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수사를 어떻게 마무리할지는 대강 윤곽이 잡힌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전 청장의 차명계좌와 관련해서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전언이다. 신성해운이 세금 감면을 위해 이 전 청장에게 로비를 벌였다는 첩보를 토대로 수사에 착수했지만, 이 전 청장의 차명계좌로 신성해운의 로비 자금이 유입되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수십 개에 달하는 차명계좌에 입금된 돈의 유입 경로를 찾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이 전 청장과 신세계가 유착 관계였는지 그래서 모종의 거래가 있었는지도 수사 과제로 남아 있다.

이에 검찰은 우선적으로 신성해운 사건을 마무리짓고, 이 전 청장의 차명계좌와 관련한 수사는 별건으로 처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 전 청장에 대한 수사를 따로 떼어놓고 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얘기다. 그동안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이 전 청장의 차명계좌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또 다른 차명계좌가 남아 있는지 여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전 청장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이토록 많은 차명계좌가 필요했으며, 이들 계좌에 입금된 돈의 정체는 또 무엇인지 등에 대한 의문은 검찰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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