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개헌 꿍꿍이’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8.06.0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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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친 이명박계ᆞ자유선진당 ‘적극’…통합민주당 ‘어정쩡’, 청와대ᆞ친 박근혜계 ‘떨떠름’

지금이 개헌을 할 수 있는 하늘이 주신 기회다.” 최근 한 신문 칼럼에 게재된 글의 한 대목이다. 18대 국회 개원을 즈음해서 정치권 안팎으로 개헌 논쟁이 뜨겁다. 학계에서는 “이제 더 이상 개헌을 미룰 수 없다”라며 정치권을 압박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개헌을 적극 논의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시사저널>이 실시한 18대 국회의원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78.4%가 ‘개헌이 필요하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의 재선급 이상 중진 의원들이 개헌에 더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82.5%가 개헌에 찬성하고 있다. 한나라당 재선급 이상 의원은 향후 정국을 주도할 핵심 세력으로 꼽힌다.

실제 이같은 정서는 최근의 움직임에서도 짙게 감지된다. ‘개헌 바람 일으키기’에 나선 한나라당의 몰아치기는 마치 예정된 수순 같다. 홍준표 신임 원내대표는 지난 5월8일 “의원내각제든, 이원집정부제든, 대통령 중임제든 통일을 준비하는 개헌이 18대 국회의 첫 번째 사명이다”라고 강조했다. 강재섭 대표 역시 5월19일 “이제 우리 헌법도 2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손질할 필요성이 있다. 18대 국회 임기 초에 개헌 특위를 만들어 헌법 개정을 논의해야 한다. 대통령 중심제와 중임제만이 아니라 내각제와 이원집정부제까지 폭넓게 논의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현재 ‘일류국가 헌법연구회’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이주영 의원은 지난 5월26일 한 발짝 더 나아가서 “개헌은 국민투표를 거치는 국민적인 선택이기 때문에 대통령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임기가 일부 단축되는 희생까지 청와대가 감수해야 한다는 뉘앙스였다. 여당 의원으로서는 파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통합민주당 손학규 대표(왼쪽)가 5월27일 국회 대표실을 예방한 한나라당 홍준표 신임 원내대표(오른쪽)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민주당, 한나라당 힘에 휘둘릴까 걱정

차기 국회의장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김형오 의원 역시 5월28일 “18대 전반기가 개헌을 하기에 아주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권력 구조 문제뿐만 아니라 20년 동안 잘 지속된 1987년 체제를 넘어 21세기에 맞는 기본법을 손질할 때가 되었다. 국회의장이 되면 개헌 추진에 앞장서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같은 여당의 잇따른 개헌 발언에 대해 통합민주당측은 상당히 곤혹스러워 하는 눈치다. 최재성 원내 대변인은 “국회가 17대에서 18대로 바뀌고 여야도 바뀐 상황에서 좀더 논의가 필요한 문제다”라며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명확한 입장 표명을 유보하는 듯한 인상이다.

이에 대해 김영태 목포대 정치학과 교수는 “현재 숫자로 드러난 현격한 힘의 차이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현재 이명박 정부가 아무리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하더라도 국회의 주도권은 한나라당이 가질 수밖에 없다. 수적인 절대 우위를 바탕으로 개헌 논의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한나라당은 개헌에 대해 더 큰 목소리를 낼 것이다. 반면에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상황의 급격한 변화에 대처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럴 만한 힘도 없다. 또, 현재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정국의 큰 변화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개헌론을 둘러싼 각 정파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는 비단 여야 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같은 야당이어도 제2 야당인 자유선진당은 개헌 논의에 상당히 적극적이다. 심대평 대표는 5월8일 임시국회 대표연설에서 “18대 국회에서는 지난 정부에서 여야 간에 합의된 국가의 권력 구조 개편과 관련된 헌법 개정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렇다고 해서 또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이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다. 자유선진당은 대통령제보다는 의원내각제를 확연히 더 선호한다. 여기에는 이회창 총재 역시 같은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총재의 경우 이미 세 번이나 대선에 출마해서 패배했다. 그런 그가 또 다음 대선에 나설 명분은 이제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의원내각제에서 연정 등을 통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노리는 것 외에 기회가 없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내키지 않더라도 여론 조성되면 거부하기 힘들것”

같은 한나라당 안에서도 이른바 ‘친MB’와 ‘친박’ 계열 간의 이해 차이가 드러나 보인다. 이번 설문조사 과정에서 친MB의 대표 주자 격인 한 재선 의원은 “이제 폐단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대통령제는 이명박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정리해야 한다고 본다. 차기 당선 가능성을 떠나 국가를 위한다는 차원에서 대승적 결단이 필요하다. 다음 정부는 이원집정부제가 바람직하다고 본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친박 계열의 한 한나라당 의원은 “지금 상황에서 굳이 개헌론을 강하게 들고 나오는 이유를 모르겠다. 정부와 여당은 개헌론으로 민심을 어지럽히기보다는 경제 난국 타개와 민심 수습에 더 주력해야 한다. 한국은 대통령제가 가장 적합하다”라며 명확한 시각 차이를 드러냈다. 상대 계파를 겨냥하는 발언이었다.

개헌 논의에 관한 한 오히려 청와대와 박근혜 전 대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수 있다는 의견도 개진되고 있다. 그럴 경우 개헌론이 큰 힘을 받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 교수는 “개헌에 대한 드라이브가 제대로 탄력을 받기 어렵다고 본다. 이명박 대통령으로서는 임기 단축이라는 예민한 문제도 있고, 현 정부의 정국 주도권 상실이라는 차원도 있다. 따라서 청와대는 크게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차기 대권 주자로서는 가장 선두 격인 박 전 대표 역시 현 체제를 원하지, 대폭적인 개헌은 원치 않을 것이다. 물론 4년 중임제를 전제로 한 개헌론에는 찬성하겠지만 그럴 경우 또 이대통령이 걸림돌이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청와대가 개헌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안갯속이다. 한때 이대통령이 직접 18대 국회 개원을 맞아 개헌 논의를 먼저 제안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으나, 주변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사평론가인 유창선 박사는 “지금의 여러 복잡한 정책 현안과 고유가에 따른 물가 상승 등의 정국 상황에서 개헌 논의가 정국의 국면 전환용 돌파 카드로 자리 잡기는 어려울 것 같다”라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현재 국민 정서상 개헌 문제에 대한 절박성이 큰 것 같지 않다는 점도 청와대에서 개헌론을 쉽게 꺼내들기 힘든 요인 중의 하나다”라고 전망했다. 정치컨설팅 전문업체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는 “물론 청와대에서는 (개헌 정국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권뿐만 아니라 학계 등의 여론이 조성되면 무작정 거부할 명분은 없어 보인다”라고 말했다.

현 개헌 정국을 바라보는 민주당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해 보인다.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 개헌의 필요성을 주장했기에 무조건 반대만 하기도 어려운 상황인 셈이다.

김영태 교수는 “개헌을 하면 아무래도 여당 주도로 될 것이기 때문에 야당은 자신의 내용을 담기가 어렵다는 피해감이 크다. 정국 주도권을 뺏기고 내용적으로도 챙길 것이 없다는 측면이 크다”라고 진단했다. 유창선 박사는 “민주당에서 대통령제보다 의원내각제 선호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나왔다는 결과 자체가 현재 강력한 리더십이 없는 민주당의 고민을 반영하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박성민 대표는 “여야 원내 대표가 제일 먼저 제시할 로드맵은 개헌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국회의 개헌 논의를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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