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방 없이 구입한 약 못 쪼개면 통째 먹어?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8.06.0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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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일반의약품 복용량, 0.3캡슐 등 표기 불합리
의사 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할 수 있는 약들은 경우에 따라 남용될 가능성이 크다.

1.33캡슐(그린코푸)’ ‘0.6정(타이레놀)’ ‘1/3포(노루모)’ ‘50~100mg(이지엔6)’ 보통 사람들이 의사의 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OTC)의 1회 복용량이다. 일반의약품이란 부작용이 그리 크지 않아 누구나 약국에서 직접 구입해 사용할 수 있는 약품이다. 해열, 진통, 소염제, 항히스타민제, 진해거담제, 소화성궤양용제, 항생제, 비타민제, 피부질환용제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약들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는 연령별로 구체적인 복용량을 표기하도록 했다. 그러나 실제 표기된 양대로 복용하기 어려워 결과적으로 약물 남용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절반이나 3분의 1을 먹으라는 복용 지침을  따르기 어렵다 보니 한 알이나 한 포를 먹게 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부작용이 발생할 경우 책임 소재도 불분명해 소비자만 골탕을 먹고 있다.

녹십자의 기침, 가래약 그린코푸는 2백50mg 캡슐로 포장되어 있다. 이 제품의 사용 안내에 표기되어 있는 복용량은 8~10세의 경우 1캡슐을, 11~14세는 1.33캡슐을, 15세 이상은 2캡슐을 복용하도록 되어 있다. 문제는 11~14세의 복용량이다. 이 설명대로라면 캡슐 1개와 0.33개를 복용하라는 것인데, 캡슐 1개를 어떻게 0.33개로 나누어 복용하라는 설명은 되어 있지 않다. 녹십자측은 “지침대로 복용하려면 임의로 캡슐을 분리한 후 내용물을 3분의 1로 나누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연령ᆞ질환ᆞ증상에 따라 증감’ 기준도 모호
두통과 생리통약으로 유명한 한국얀센의 타이레놀은 1정이 5백mg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복용량 표기는 ‘0.3~1g(0.6~2정) 연령, 질환, 증상에 따라 적절히 증감’으로 되어 있다. 연령·질환·증상의 기준이 모호한 데다 당장 머리가 아파 약을 찾은 환자가 용량을 g단위의 소수점까지 따져 쪼개 먹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속쓰릴 때 먹는 약’으로 잘 알려진 일양약품의 노루모는 1포에 가루약이 1.5g 들어 있지만 5~7세의 경우 3분의 1포(0.5g)를 복용하도록 되어 있다. 이 복용량을 지키려면 일반인이 1포를 뜯어 내용물을 3분의 1로 나누어야 한다.

캡슐·알약·가루약은 눈대중으로 나눌 수 있지만 연질 캡슐로 싸인 액체 약은 나누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소염·진통제인 대웅제약의 이지엔6은 1개 캡슐 속에 2백mg의 액체 성분이 들어 있다. 그런데도 1~2세의 영아에게는 50~100mg을 복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액체 약물이 연질 캡슐에 들어 있어 2백mg짜리 캡슐을 50mg 또는 100mg으로 나누기는 쉽지 않다.

전문의약품의 경우에는 의사의 처방전에 따라 약사가 약을 조제해주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일반의약품은 약품 포장지 등에 표기되어 있는 지침에 따라 약을 복용해야 한다.

한국소비자원의 조사에 따르면 시중에 판매되는 일반의약품 6개 중 1개는 복용량 표기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런 약품들은 약물 남용을 부추길 소지가 있다는 것이 소비자 보호원측의 판단이다.

김선환 식의약안전팀 차장은 “최근에 조사해보니 일반의약품 6개 중 1개는 복용량 표기가 애매하게 되어 있어 일반인이 복용량을 지키기가 어렵다. 부작용이 크지 않기 때문에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처방전 없이 직접 판매되고 있지만, 과잉복용 등 남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건강에 해가 되지 않도록 현실적인 복용량 표기가 절실하다”라고 주장했다.

반으로 쪼개기는 쉬워도 양이나 무게를 달아야 하는 처방은 버겁다.
이런 지적에 대해 제약회사들은 허가를 내준 관계 당국에 화살을 돌리고 있다. 한국얀센 관계자는 “사실 소비자가 권장 복용량을 지키려면 약을 쪼개서 먹는 수밖에 없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외국에서 임상실험을 거친 약의 경우 판매 허가를 내줄 때 복용량도 그 실험 결과에 따라 정하다 보니 생겨난 현상이다”라고 설명했다.

제약회사가 다르지만 A약품이나 B약품이 동일한 성분일 경우 같은 복용량을 일괄 적용하는 경우도 있다. 대웅제약 관계자는 “이지엔6는 3세 이하 아이에게 투약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럼에도 1~2세 아이에게 50~100mg을 복용하도록 표기하는 동일한 성분의 약품이 버젓이 판매되고 있다. 제약회사가 다르더라도 유사한 성분의 약품인 경우 과거에 허가된 복용량을 그대로 적용해 시판하는 경우가 있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식품의약품안전청은 동일한 약이라도 연령에 따라 복용량을 조절해 따로 생산하지 않는 제약회사들의 잘못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주장한다. 식약청 관계자는 “제약회사가 같은 약품이라도 연령에 맞는 용량에 따라 각각 생산해 허가를 요청할 수 있다. 그런데 성인 복용량을 중심으로 약품을 만들기 때문에 혼선을 주게 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제약회사가 동일한 약을 모든 연령에 맞추어 따로 생산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식약청측의 말대로라면 일반의약품의 경우 소비자들이 대충 알아서 복용해야 한다. 


“남용하면 부작용 겪을 수도…복용 지침에 체중도 표기해야”

그렇다면 일반의약품은 대충 먹어도 되는 것일까. 약사들은 당장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부작용으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고, 장기적으로 남용하면 의약 사고로 화를 당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런 점을 우려해 약사들은 약국 외에 슈퍼마켓이나 할인점 등에서 일반의약품을 판매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서울 강서구 흥부약국 서민영 약사는 “소비자가 알아서 약을 쪼개서 복용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럼에도 약 포장에는 복용량이 연령별로 소수점 단위까지 자세하게 구분되어 있다. 표기된 복용량대로 약을 나누어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약을 남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약을 남용하면 보통 위장 장애, 어지럼증을 느끼게 되는 등 다양한 부작용을 겪게 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서약사는 또 “제약회사들이 같은 약을 연령별로 생산하는 것이 무리라면 최소한 약을 나누기 쉽게 만들 필요가 있다. 또, 복용 지침에 연령뿐만 아니라 체중도 표기해야 옳다. 청소년이라도 체중이 성인 수준이라면 성인 복용량에 맞추어 약을 복용해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건강과 직결되는 약품의 남용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 당장 이상이 없다고 해서 안심하고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만에 하나 약물 남용으로 부작용이 발생한 경우 현재로서는 책임 소재도 불분명하다.

한국제약협회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약 6백여 종의 일반의약품이 거래되고 있다. 의약품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제조·수입 의약품의 25.3%(2006년 말 기준)로 연간 생산액은 2조7천억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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