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말싸움도, 말장난도 아니야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08.07.0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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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3사 토론 프로그램 인기몰이 …재미ᆞ시청률 좇다 종종 논리적 관점 벗어나
ⓒKBS 제공


한국 사회에서 요즘처럼 국민이 토론에 열중하고 토론 프로그램에 열광한 적이 있을까. 말 그대로 토론 광풍이다. KBS의 <심야토론>, MBC의 <100분토론>, SBS의 <시시비비> 등 3개 지상파 방송사의 토론 프로그램은 연일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토론 프로그램 진행 중에도 포털 사이트에서는 토론에 참여한 패널과 그들의 인상적인 말이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한다. 토론이 끝나고 나면 네티즌은 토론 결과와 승자에 대해 나름으로의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두고 서로 공방한다.

방송에서의 토론이 그대로 사이버 세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토론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배경은 미국산 쇠고기를 둘러싼 촛불 정국이다. 촛불 집회는 학생·시민들이 정치적 이념에 관계없이 의견을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양극화된 한국 사회의 단면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뚜렷하게 대립되는 의견 차이는 토론 프로그램을 열띤 ‘말싸움의 장’으로 만들었고 시민들은 치고받는 패널들의 말의 향연에 같이 흥분하고 동조했다.

언론에서도 토론 프로그램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언론은 수십 개의 관련 기사를 통해 토론의 진행 상황과 주요 논쟁거리, 패널들의 주장과 세부적인 표현, 네티즌의 반응까지 상세하게 전달한다. 생방송의 특성상 사전에 걸러지지 않고 흘러나온 패널의 말 실수라도 있을라치면 그를 찾아가 발언의 배경과 현재의 생각을다시 한 번 확인해 후속 보도를 내보낸다.‘고대녀’로 알려진 고려대 재학생 김지윤씨가 재학생이 아니라고발언했던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논란이 확대되자 다음 날인 20일 공식적으로 사과를 표명하기도 했다.

3개 방송사의 프로그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은 MBC <100분 토론>이다. 토론 프로그램으로 스타가 된 미국교포 이선영씨, 광주의 양선생님, 고대녀 김지윤씨 등은 모두 그들이 시민논객으로 참여한 <100분 토론>에서의 발언으로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생방송으로 걸러지지 않은 말 ‘아슬아슬’

<100분 토론>이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서 높은 시청률과 주목도를 보이는 것은 양 진영 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이다. <100분 토론>에서 보여주는 토론의 모습은 의견을 조율하고 수렴하는 것보다는 각자의 의견들이 공방으로 이어지는 토론게임에 가깝다. 그래서 종종 결론 없이 싸움만 붙인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100분 토론>을 담당하고 있는 이영배 PD는 이에 대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장점은 열정적인 것이다. 논쟁에 집중하다 보니 주제의 여러 측면을 아우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사회적 합의를 위한 전제 조건은 차이가 뭔지 분명 하게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KBS <심야토론>은 진행자를 중심으로 두 진영의 패널들이 양 옆으로 늘어서 있는 기존의 무대 구성을 탈피해 원탁형 테이블을 도입했다. 화면에서 대결 구도로 그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대결 구도가 뚜렷하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토론이 재미를 주고 시청률을 높이지만, 인신 공격 등으로 논리적 관점에서 벗어날 위험이 많기 때문이다.

▲ ⓒMBC. SBS제공


SBS <시시비비>는 여론조사 결과를 토론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 <시시비비>의 담당 PD는 “이슈와 관련된 여론조사를 반영하는 것은 <시시비비>만의 장점이다. 토론 진행에서도 대립되는 것을 보여주기보다는 문제의 해법을 찾고 의견 수렴을 모색하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했다.

토론에서 차이점을 드러낼 것이냐, 합의점을 도출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토론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토론은 차이점을 드러내 승자를 가리는 게임과 같다는 점에서 개념적으로 합의점을 도출하는 토의와 구분된다.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의 김현주 교수는 “대결 국면은 눈길을 끌 수 있다. 따라서 제작자는 대결 국면을 찾기를 원한다. 자리 배치에서도 좌·우 패널을 갈라놓고 싸움을 붙이는 형태다. KBS <심야토론>은 둥그런 원탁 테이블로바꿔 마주보는 모습에서 탈피했다.

성숙한 토론 문화를 지향하는 결정이다. 토론 프로그램에는 당대의 말꾼들이, 신문의 칼럼에는 글꾼들이 등장한다. 지금의 사회에서는 그중에서 말싸움꾼, 글싸움꾼만이 살아남는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말꾼, 글꾼들은 관심에서 비켜서있다”라며 차이점을 극대화시켜 싸움으로 몰아가는 토론 문화에 우려를 표했다.

온전하고 합리적인 말꾼ᆞ글꾼 관심 밖

반면에 문화평론가 하재근씨는 “의견이 수렴되는 것은 결과적인 얘기다. 독재 시절의 토론이 오히려 의견 수렴이 잘됐지만 그때의 토론을 선진화된 토론 문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큰 틀에서 차이가 없는 보수 정치인들끼리 하는토론은 한국 사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토론은 싸움이 아니라 결국에는 의견을 조율하고 수렴하기 위한 과정이지만 각자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야 얼버무리지 않는 진정한 합의를 이끌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촛불 정국은 한국 사회에 토론 활성화를 가져왔고 이는 우리의 토론 문화를 되돌아볼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성숙하고 선진화된 사회일수록 토론 문화가 발달해있다.

하지만 우리 토론 문화의 성숙도는 아직 경제 성장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성적인 사회에서 합리적인 사고가 나오고, 합리적인 사고에서 이성적인 언어가 나오는 법이다. 우리는 아직 이성적인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언어의 싸움이 힘 싸움으로 발현되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우리 토론 문화의 문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토론 문화가 성숙하려면 관용성·개방성이 필수인데 우리 사회에는 이런 점이 부족하다. 토론 프로그램에서 주목받는 패널들을 살펴 보아도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쪽보다는 자기 의견을 포장하고 상대를 압도하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이 아무리 멋지게 포장된다고 해도 상대의 의견을 들을 자세를 갖추지 못하면 그들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없다.

김현주 교수는 “토론은 말하는 기술이 아니라 듣는 기술이다. 상대방의 얘기를 경청하고 그들의 입장을 존중하는 기술이 선행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세상은 문자의 시대에서 영상의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영상은 음성을 수반한다. 그만큼 글보다는 말이 중요한 세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필요 이상의 말을 자제하는 교육을 받았다. 토론 문화 성숙이 더딘 것의 일면에는 이런 배경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토론 문화가 발전하려면 기성 세대보다는 젊은 세대들의 변화가 필요하다.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밝히며 거리로 나온 어린 학생들의 모습에서 좀더 나아지는 한국 토론 문화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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