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기록물 관리 시스템 개발 서둘러야
  • 이소연 (덕성여대 문헌정보학 교수) ()
  • 승인 2008.07.2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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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전 대통령측 관계자들이 대통령 기록관에서 기록물을 반납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전 대통령측의 청와대 기록 ‘유출’을 둘러싼 공방이 뜨겁다. ‘원본이 유출된 것이 사실인가’ 하는 데서 비롯된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전자기록에서 원본, 진본, 사본은 어떻게 다른가. e-지원 시스템은 도대체 어떤 시스템인가. ‘가져갈 것, 넘길 것, 없앨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전 대통령이 업무 중 생산한 기록의 소유권은 누가 갖는가. 또 전 대통령의 열람권은 어떻게 보장해야 하는가. 그리고 기록은 과연 다 반환되었는가. 노무현 정부와 현 청와대, 그리고 국가기록원(국기원) 중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가. 이 복잡한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자기록에서 원본과 사본이 갖는 의미와 기록의 생애 주기 등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종이기록에서는 원본과 사본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사본을 생산해 활용하는 전자기록에서는 원본성(originality)보다는 진본성(authenti-city)이 관건이다. 전자기록 생산자가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에서 보는 기록도 원본이라기보다는 그 기록을 열어볼 때마다 매번 새롭게 재현(represent)한 사례(instantation)라고 보아야 옳다.

따라서 전자기록 관리 시스템에서는 다수의 진본 사본(authentic copy)의 존재를 상정하고, 이 중 권위 있는 사본을 분리해 관리하는 기능과 함께 진본과 동일함을 확인해 인증한 진본 사본을 열람용 사본으로 제공하는 기능이 매우 중요하다. 국가기록원에 있는 컴퓨터로 열람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니터에 보이는 전자기록은 원본이 아니라 국가기록원이 인증하는 진본 사본인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 기록을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하기 전 비서진에게 “가져갈 것은 가져가고 국가기록원에 넘길 것은 넘기고 없앨 것은 없애라”라고 말하는 회의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화제가 되었다. 이 세 가지는 세 단계에 걸친 기록 생애 주기와 관련되어 있다. 기록을 생산한 사람이나 부서가 관리하는 단계, 생산 조직 내의 기록관리 부서가 관리 책임을 맡는 단계, 국가기록원과 같은 보존 기관이 관리하는 단계의 세 단계가 그것이다.

국가기록원의 전자기록은 원본 아닌 진본 사본

그리고 개별 기록 건이 아니라 동일한 업무나 사안에 관련된 기록의 집합 단위로 그 기록에 보존 기간을 부여해 업무 담당자가 사용하다 폐기할 기록, 조직 내 기록관으로 이관할 기록, 그리고 조직 내에서의 활용 가치가 끝난 후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할 기록을 각각 구분한다. 이러한 기록의 분류는 기록이 생산되기 이전에 생산 기관과 보존 기관이 합의해 결정한다. 그러니 국가기록원으로 ‘넘길 것’, 즉 이관할 것은 이 동영상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당시 청와대와 국가기록원의 합의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한 기록은 지정 기록으로 보호된 것을 제외하고는 새 정부뿐 아니라 전국민에게 공개되어 있다. 대통령은 국가 안전 보장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기록이나 대내외 경제 정책이나 무역 거래 및 재정에 관한 기록, 정무직 공무원 등의 인사에 관한 기록, 대통령의 정치적 견해나 입장을 표현한 기록물 등을 대상으로 그 내용이 공개될 경우 정치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기록 등을 따로 지정해 15년간(사생활 관련 기록은 30년) 비공개로 보호하도록 요청할 수 있다. 기록을 남겼다가 불이익을 받게 될까 하는 우려 없이 기록을 생산하고 이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없앨 것’은 보존 기간이 다했으나 국가기록원 이관 대상이 아니어서 폐기해야 할 기록을 말한다. 역사적·증거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아 장기 보존하지 않기로 결정했더라도 업무상 비밀이나 개인정보 등 함부로 공개되어서는 안 될 내용을 포함할 수 있다. 그래서 기록 관리에 관한 국제표준 ISO 15489는, 기록을 폐기할 때에는 다시 복구할 수 없는 방식으로 폐기하도록 정하고 있다. 종이기록이라면 세단기를 이용해 잘게 썰어서, 전자기록이라면 물리적 저장 매체를 파손하는 방식으로 폐기해야 한다. 현 정부의 서버에 전 정부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다.

문제는 ‘가져갈 것’에 있다. 원칙적으로 대통령도 동사무소 직원도 직무를 수행하는 중에 생산한 기록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지 않다. 소유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대통령 기록관이 관리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기록원, 즉 대통령 기록관이 국민을 대신해서 그 관리를 맡아 생산과 보존을 감독하도록 되어 있다. 대통령 기록법의 14조가 정하는 것처럼 아무도 ‘무단으로’, 다시 말해서 국가기록원과의 사전 합의가 없이 대통령 기록물을 파기·손상·은닉·멸실 또는 유출하거나 국외로 반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릴 열쇠는 국가기록원이 사전에 합의를 해주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측에 따르면 국가기록원이 아직 대통령 기록법 18조에 따른 ‘전직 대통령이 재임시 생산한 대통령 기록에 대한 열람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사정에 있지 않아 ‘가져갈 것’의 사본을 제작해 가져갔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사본이 있어야 열람할 수 있으니 사본을 제작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기록원이 동의했는가가 관건이다. 국가기록원과 합의가 없었다면 불법이고, 이 경우 국가기록원이 제 역할을 못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만약 합의 하에 이루어졌다면 최근 국가기록원의 고발과 같은 행보에 대해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협의는 있었으나 합의는 없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전자 시대에 걸맞는 열람 편의를 당장 제공할 수 있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소동이다. 열람 편의를 제공할 수 없었던 사정은 대통령 기록물 관리 시스템(PAMS: Presidential Archives Management System)의 개발 현황과 관련되어 있다.

대통령 기록관 위상 애매해… 정치적 중립 확보해야

국가기록원의 PAMS 사업은 지금 문제가 되는 열람 서비스 부분뿐 아니라 전자기록을 안전하게 저장해 장기간 보존하는 기능 등에 역점을 둘 예정이었다. 하지만 새 정부 출범 이후 조직 개편과 예산 재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계획대로 순탄하게 진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이번 기록 유출 논란으로 더욱 지연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록 관리 연구자로서 이번 사건을 보는 입장은 양면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기록 관리의 역사가 시작된 지 10년, 국가기록원과 관련 개인, 단체가 협력해 그동안 이룬 성과가 기대만큼 공고하지 못했음을 확인하는 마음은 씁쓸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번 일로 그동안 정부 주도로 진행되어온 기록 관리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확대된 것은 고무적이다.

이번 일로 불거진 문제들은 매우 다면적이고 복잡하지만, 가장 중심적인 두 가지는 국가기록원의 중립성과 전자기록 관리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축적할 필요성이다. 현재 국가기록원은 행정부 중에서도 행정안전부에 소속된 정부 기관으로 이번 기록 유출 사건과 같은 문제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기 쉽지 않은 위치에 있다. 특히 대통령 기록관은 국가기록원에 완전히 소속되었다고도, 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도 볼 수 없는 애매한 조직 위상을 갖고 있어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제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교체될 때마다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한편 전자기록의 생산과 활용, 이관과 보존, 열람 제공 등의 다양한 국면에서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축적하는 것도 큰 과제다. 우리나라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전자기록의 특성을 밝히고, 그 특성에 부합하는 기록 관리 방법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빠른 정보화 속도로 인해 다른 나라의 성과를 기다릴 여유가 없이 우리가 필요한 기술을 우리가 개발할 수밖에 없는 사정에 있다. 새 정부 들어 PAMS 뿐 아니라 전자기록과 관련한 다양한 연구 및 기술 개발 프로젝트들이 취소·축소 및 지연되고 있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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