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15일은 재계의 ‘광복절’인가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8.07.2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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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제외되었던 비리 연루 재벌 총수들 대거 혜택 예상 정부ᆞ재계 교감 따른 결과…시민단체, “봐주기 사면” 반발

오는 8월15일로 예정된 ‘광복절 특사’를 앞두고 재계가 술렁이고 있다. 그동안 사면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대기업 총수들이 대거 혜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현재 사면 대상에 거론되는 인사는 박건배 전 해태 회장, 장치혁 전 고합 회장, 장진호 전 진로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손길승 전 SK 회장,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최원석 전 동아건설 회장 등이다. 최근 사회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사면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이번에도 시민단체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이들은 ‘봐주기 사면’이라며 사면 대상의 선정 과정이 공정했는지를 따지기 위해 정보 공개를 청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는 사실 정치계 인사든 재계 인사든 광복절 특사가 거론되면 매년 되풀이되는 풍경이다. 재계에서는 그동안 비난 여론을 의식해 적극적인 반응을 자제해왔다. 그러나 올해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제 묶여 있던 경제인들이 풀려날 때가 되었다는 것이 재계의 판단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노무현 정부는 유독 재계 인사들의 사면에 인색했다. 8번의 특별사면 대상에서 재계 인사들이 거의 배제되었다. 어쩌다 대상에 들어가도 최종 선정 과정에서 탈락시키곤 했다”라고 말했다. 지난 2006년 8월15일 단행된 광복절 특사가 대표적인 예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안희정, 여택수 등 비리에 연루된 노대통령의 측근들을 대거 사면 조치했다. 그러나 재벌 총수는 사면 대상에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김용산 전 극동건설 회장이 유일하게 82세의 고령이라는 이유로 사면 혜택을 입었다.

▲ 사면 대상에 오른 박건배 전 해태 회장, 장진호 전 진로 회장,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왼쪽부터). ⓒ연합뉴스

노무현 정부 당시 사면 미끼로 ‘특사 로비’ 의혹도 불거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는 지난 2007년 말에도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장관, 한화갑 전 의원, 임동원·신건 전 국가정보원장, 신승남 전 검찰총장, 유종근 전 전북도지사, 김성호 전 보건복지부장관,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 정·관계 인사 30명을 사면시키면서 재계 인사로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정몽원 전 한라그룹 회장만 포함시켰다.

이 과정에서 정권에 로비한 사람들만 특사 혜택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 재계 인사는 “노무현 정부 말기에 여당 인사가 찾아와 특사를 받으려면 ‘성의를 보이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며 거절하자 사면 대상에서 아예 제외했다”라고 전했다.

해당 인사측에서는 현재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기자의 해명 요청에 출장 등을 이유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에게서 이미 관련 증언이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재계에서는 이번 사면에 각별한 기대를 걸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기업 우호 정책을 펴는 정권이 들어선 만큼 아무래도 재계에 호의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지난해 말 사면을 받은 김우중 전 회장과 정몽원 전 회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사를 이번 사면 대상에 포함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특히 올해는 건국 60주년이라는 상징성까지 안고 있다. 지난해 말 개정된 사면법에 따라 정부는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사면심사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정권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 사면이 그만큼 줄어들 수 있지만 분위기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시민단체나 야당은 정부의 8·15 특별사면 추진 소식이 알려지면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성명을 통해 “지난 2001년 15억 달러의 분식회계를 저질렀던 미국 엔론의 최고 경영자 제프리 스킬링은 24년4개월형을 받았다. 종신형이나 마찬가지다. 비슷한 혐의를 저지른 사람들을 이렇게 쉽게 사면해도 되는 것이냐”라고 비난했다.

8·15 특사 추진 이면에 정부와 재계 간 물밑 교섭이 있지 않았느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경제개혁연대에 따르면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손길승 전 SK 회장은 지난 5월 돌연 상고를 취소해 이번 사면 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런 움직임이 정부와 재계의 교감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진보신당도 논평을 통해 정부를 맹비난했다. 진보신당은 “이번 사면은 명백한 동업자 봐주기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선언한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라고 공격했다.

▲ 노무현 정부는 재계 쪽 사면에 인색했다. 위는 2006년 ‘광복절 특사’ 관련 법무부 브리핑. ⓒ연합뉴스

진보신당, “대통령 권한 사적으로 사용” 비난

물론 재계 안팎에는 시민단체의 이런 주장에 공감하는 시각도 있다. 이미 사면을 받았던 사람이 또다시 받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원석 전 동아건설 회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 이미 두 차례나 사면을 받았다. 최 전 회장은 지난 1995년 원전 설비 수주와 관련해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었다가 사면 복권되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997년 노태우 부정축재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구속되었다가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럼에도 또다시 사면 명단에 이름이 거론되자 재계 내부에서조차 뒷말이 나오고 있다.

김우중 전 회장도 마찬가지다. 지난 1995년과 1997년 이미 두 번의 특별사면을 통해 이 부문 ‘2관왕’을 달성한 바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참여정부 임기 말에 또다시 사면 혜택을 입은 바 있다. 이에 반해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은 5년째 사면 대상으로만 거론되고 있을 뿐 실제 혜택은 받지 못했다. 최 전 회장은 지난 1999년 2월 외화 2억6천만 달러를 밀반출하고 계열사를 이용해 1조2천여 억원을 불법 대출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이후 그는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잠깐 풀려났다가 지난 2005년 1월 법정 구속되면서 서울 구치소에 재수감되었다. 지난 2006년 말 형 집행정지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2년6개월이나 수감 생활을 했다.

최 전 회장의 한 측근은 “건강이 많이 안 좋다. 70세의 고령인 데다 수감기간도 긴 탓에 건강이 안 좋아졌다”라고 귀띔했다. 때문에 참여정부 시절 김장환 극동방송 사장이 청와대에 최 전 회장의 사면을 건의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면 대상에서 번번이 제외되어 ‘사면의 양극화’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부에서 그동안 재계 인사들의 사면을 주저한 데는 비리 연루 경제인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부 작용했다. 그러나 사실은 일부만 혜택을 입었다. 나머지 경제인들은 여전히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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