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고 못 볼 프로그램 손 본다
  • 파리·최정민 통신원 ()
  • 승인 2008.09.0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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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청각최고자문위원회, 어린이 보호 위해 TV 선정ᆞ폭력과의 전쟁 고민 중
ⓒAFP

프랑스의 방송 감시 기구인 시청각최고자문위원회(CSA)는 최근 3세 이하의 유아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의 방영을 금지시킨다고 발표했다. 방송을 비롯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자유가 보장되는 기존의 프랑스 법률에 비추어볼 때 이번 발표는 가장 강도 높은 조치로 평가된다.

3세 이하 유아 대상 방영 금지시키며 “8세 이상으로 올려라” 주문

시청각최고자문위원회(CSA)는 전에는 방송에 대한 감시와 점검을 통해 유해한 프로그램이라고 판단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규제가 아닌 제재를 권고하는 것을 기본 골자로 활동해왔다. 매주 한 번씩 열리는 정기 자문위원회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유해하다고 판단되는 프로그램에 대해 시정이나 권고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해당 방송사나 케이블 TV사는 이러한 제재 권고에 따라야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경우 국가 최고 자문기관인 국가자문위원회에 위헌 여부를 항소할 수 있다(지난 드빌 팡 정부에서 문제가 되었던 최초 고용 계약법의 위법 여부도 이 자문위원회에 제청된 바 있다. 이 자문위원회는 지스카르 데스탱·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원로들로 구성되어 있다).

2008년 상반기 프랑스인의 하루 평균 TV 시청량은 3시간27분이다. 이 수치는 같은 기간 2007년의 3시간32분보다 5분이 감소한 것이다. 이 중 4세에서 10세까지 어린이의 경우 하루 평균 2시간7분을 시청하고, 11세에서 14세의 경우 2시간5분인 것으로 나타났다. 시청각 최고 자문기구의 자문위원인 끌로드 알라흐 박사는 “3세 이하 유아의 경우 텔레비전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느낄 뿐이다. 이것은 마치 스폰지와 같다. 비추어지는 대상을 무작정 받아들이는 것이다. 3세 이상의 경우 프로그램의 줄거리를 따라가며 7세 이후에 들어서야 방송되는 화면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어린이들이 폭력적인 장면에 자주 노출될 경우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이 무뎌진다. 극 중에서 좋은 모습으로 나오는 인물이 폭력을 가하는 장면은 더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은 최소한 8세 이상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시청각최고자문위원회(CSA)의 입장이다. 이번 조치는 그런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케이블을 통한 해외 프로그램의 유입을 미리 차단하려는 조치이기도 하다.

창작이나 표현의 자유가 우선시되는 프랑스의 분위기에서 방송의 영역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폭력적 장면이나 자극적인 부분, 특히 성문제의 경우 늘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외설과 예술이라는 민감한 문제에서, 예술 국가임을 자처하는 프랑스로서는 늘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라도 예술의 편을 들어주었다.

‘외설도 예술’ 인식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 커져

그 대표적인 예가 일본 감독인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이다. 실화를 배경으로 한 파격적인 장면으로 화제를 모았던 이 영화는 성문제에 대해서 개방적이었던 일본에서조차 개봉이 금지되었으나, 프랑스에서는 개봉되어 영화를 관람하러 오는 일본 관광단이 생길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또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는 등 프랑스 땅에서는 엄연한 예술 작품으로 대접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미 프랑스의 공영 방송인 프랑스 3을 비롯한 독일·프랑스 합작 문화 채널인 악떼에서 방송을 타기도 했다. 노출 수위에 대한 가위질이 전혀 없었으니, 한국에서 삭제된 채 개봉된 수준보다 높은 수위의 영화가 공영방송을 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 우위의 프로그램 판정에 대해 영상 문화의 범람과 맞물려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포르노그래피성 광고나 미국식 폭력 영화·드라마가 안방에 들어서면서 규제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9·11 이후 지구촌의 각종 폭력 사태가 전파를 타면서 일정 부분의 제재가 요구되어왔다.

전세계를 경악에 빠뜨렸던 지난 2001년 뉴욕 9·11 사태 당시 프랑스의 유명한 현대 철학자 미셀 세르는 특별 대담에 나와 “서구에서 14세의 소년이 14년 동안 1만4천번의 죽음을 텔레비전으로 본다는 통계가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핵폭탄 투하 이후 인류는 죽음에 대해 새로운 환경에 놓여 있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미국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 오락성 프로그램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세계 각지 테러 현장 등의 충격적인 장면들이다. 중동을 비롯한 아랍권의 소식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프랑스 뉴스에서는 보도 내용에 따라 진행자가 방송 전에 “충격적인 장면이 있으니 시청자들의 주의를 당부한다”라는 경고성 멘트를 하고 있다. 따라서 어린이와 함께 뉴스를 시청할 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 화두였던 프랑스도 폭력적인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변화를 강요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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