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를 넘는 ‘스피드’가 있었네
  • 허재원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 ()
  • 승인 2008.11.18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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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프로농구 시즌 초반, 예상 밖 명승부 잇달아

▲ 11월11일 전주 KCC와 안양 KT&G의 경기에서 KT&G 주희정 선수(왼쪽)가 KCC 임재현 선수를 따돌리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프로농구가 진정한 고공 농구의 시대로 접어든 올 시즌 초반 이상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긍정적인 이상 기류이다. ‘농구는 키의 스포츠’라는 진리가 흔들리고 있다. 고공농구의 진수를 고대했던 농구팬들은 고공 농구의 매력을 훨씬 뛰어넘어버린 스피드 농구의 진면목에 매료되고 있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한국 농구의 ‘높이’가 ‘스피드’의 진화를 불러온 것이다. ‘하드웨어’의 발전을 앞지르고 있는 ‘소프트웨어’의 진화. 그 양상을 살펴보았다.

11월1일 대구 실내체육관. KCC 선수들이 올 시즌 첫 원정 경기에 나섰다. 파란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그들이 서서히 경기장에 들어섰다. ‘국보급 센터’ 서장훈(2백7cm)을 필두로, 정훈과 강은식(이상 2백cm)이 뒤를 이었고 두 명의 외국인 선수 마이카 브랜드(2백7cm)와 브라이언 하퍼(2백3cm)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모두가 기다리던 그 선수. 하승진(2백22cm)이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인 채 코트를 밟는 순간, 관중들의 수군거림은 서서히 큰 함성으로 변해갔다. 국내 농구 사상 최초로 한 팀에 2m대 장신이 6명이나 포함된 ‘장대 군단’ KCC가 비로소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프로농구 사상 가장 큰 팀 평균 신장(1백94.3cm)을 갖춘 KCC의 올 시즌 첫 상대는 두 번째로 작은 평균 신장(1백90.5cm)의 오리온스. 시작 전부터 어른과 꼬마의 대결이나 다름 없었던 첫 번째 맞대결이었다.

경기 시작 버저가 울렸다. 오리온스에는 프로농구 최고의 포인트가드 김승현이 버티고 있었다. 꾸준한 재활과 치료로 허리디스크 통증에서 해방된 김승현의 정수리는 하승진의 가슴팍에도 미치지 못했다. 김승현은 그런 KCC 진영을 마음껏 헤집고 다녔다. 수비 리바운드를 받으면 마치 자로 잰 듯한 아웃렛 패스를 총알처럼 쏘았다. 이미 오리온스 선수들은 모두 속공에 참가한 뒤였다. 헐레벌떡 자기 진영으로 뛰어가던 KCC의 2m대 거인들이 채 하프라인을 넘기도 전이었다.

오리온스 속공에 ‘장대 군단’ KCC 침몰

속공 횟수 9 대 2. 오리온스는 속공으로만 KCC에 14점 정도의 리드를 잡았다. 높이의 약점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스코어였다. 속공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철저한 세트오펜스로 전환했다. 김승현을 축으로 다섯 명의 공격수가 철저히 약속된 위치로 이동했고, 그들의 머릿속에 저장된 공격 패턴이 이루어질 곳으로 김승현의 패스는 정확히 연결되었다.

90 대 85. 오리온스는 결국 KCC를 침몰시켰다. 농구팬들은 이변이 일어났다며 아우성을 질렀지만 오리온스 김상식 감독과 김승현은 담담했다. 그리고 중계 화면을 분석한 나머지 8개팀의 감독들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2m 장신들이 즐비한 KCC의 장신 숲을 뚫고 나갈 길이 보였기 때문이다.

올 시즌 프로농구의 주인공은 단연 동부와 KCC였다. 2백5cm의 김주성과 2백22cm의 하승진이 각각 버티고 있는 두 팀의 전력은 마치 철옹성과도 같았다. 그러나 스피드로 무장한 팀들의 반란이 속속 일어나면서 스피드 농구의 바람이 코트를 가르고 있다.

홈 개막전에서 KCC를 침몰시킨 오리온스를 필두로 주희정이 이끄는 KT&G,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 된 돌풍의 팀 모비스, 탄탄한 선수층을 자랑하는 전자랜드 등이 ‘런앤건’을 앞세우는 대표 주자들이다.

이들은 속공과 모션오펜스 등으로 경기당 평균 90점 이상을 기록하는 파괴력 넘치는 공격력을 선보이고 있다. 100점 이상을 기록하며 승부가 갈린 경기도 벌써 여러 차례. 이러한 현상은 동부와 KCC를 의식한 팀들의 변신이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들은 용병을 신장이 좋고 속공 가담 능력이 뛰어난 선수들로 선발했다. 동부와 KCC전에서는 세트오펜스 상황에서의 득점이 어렵기 때문에 빠른 승부를 보기 위해 용병까지 ‘스피드’에 초점을 맞췄다. 전술도 1차 속공, 센터까지 가담하는 2차 속공 등을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그 결과 팀들은 짧은 시간에 많은 득점을 올릴 수 있게 되었고, 경기 속도도 매우 빨라지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모비스 유재학 감독은 “시즌 초반이기는 하지만 높이가 좋지 않은 팀들이 KCC와 동부를 의식해 많이 움직이는 농구를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득점대가 높아지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김동광 KBL 경기위원장도 “김승현, 주희정 등 포인트가드가 능력이 있는 팀들이 이번 시즌 스피드를 앞세운 공격으로 코트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당분간 빠른 팀들의 강세가 계속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11월11일 전주에서는 프로농구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가 펼쳐졌다. 농구경기를 치르는 데 꼬박 2시간30분이 걸렸다. “하루에 두 경기도 문제없다”라던 KT&G 포인트가드 주희정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쉴 새 없이 코트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KT&G의 젊은 포워드들도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홈팀 KCC 역시 마찬가지. 경기 막판 결정적인 자유투를 성공시킨 하승진은 승리의 감격을 만끽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3차 연장까지 가는 피말리는 승부. 최종 승자는 98 대 95, 3점차 승리를 가져간 KCC였다. 그러나 이날 KT&G가 보여준 스피드 농구의 진수는 농구팬들 사이에서 길이 회자될 명품 플레이나 다름없었다.

KT&G는 프로농구 10개 구단 중 가장 빠른 농구를 구사하는 팀. 지난 시즌 2백82개의 속공으로 인천 전자랜드(1백82개)보다 무려 100개나 많은 속공을 기록하며 팀 속공 순위 1위에 올랐다. 당시 시즌 전만 해도 하위권으로 분류되었던 KT&G는 주희정의 손끝에서 시작되는 빠른 농구로 돌풍을 일으키며 30승24패로 팀 순위 4위를 기록했다. 스피드 농구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낸 것이다. KT&G의 빠른 농구는 올 시즌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다. KT&G는 가장 많은 팀 속공(34개)을 기록하면서 3승2패로 3위에 올라 있다(11월8일 현재). 속공의 중심 주희정은 경기당 평균 9.20개의 어시스트로 대구 오리온스 김승현(11.00개)에 이어 이 부문 2위에 랭크되어 있다.

KT&G의 스피드는 올 시즌 캘빈 워너가 가세하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평가이다. 워너는 1백97cm로 센터치고는 작은 편이지만, 대신 공수 전환이 빠르고 속공 마무리 능력도 탁월하다. 워너가 가세한 KT&G의 공격은 인사이드로 빠르게 전개되면서 확률 높은 득점을 자랑한다. KT&G는 2점슛 성공률이 63.2%로 10팀 가운데 가장 좋다. 이같이 확률 높은 득점을 기반으로 KT&G는 경기당 평균 95.2점을 올렸다. 울산 모비스(96.4득점)에 이어 팀 득점 2위.

“빠른 팀 강세” 전망에 “결국 높이가 제압”

11일 경기에서 KCC 허재 감독이 가장 경계했던 것도 KT&G의 빠른 농구였다. 허감독은 경기에 앞서 “KT&G의 스피드는 현재 10개 구단 가운데 단연 최고”라고 말했다. 물론 바로 “그러나 계속 그렇게 달릴 수 있겠나. 결국 높이가 경기를 제압할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허감독은 3차 연장에서 서장훈이 5반칙으로 물러나기 전까지 스피드가 약한 하승진을 거의 기용하지 않았다. 허감독의 예상대로 KT&G는 1쿼터에서만 속공 4개를 기록하며 경기 막판까지 KCC에 시종 리드를 유지해나갔지만, 주희정의 체력이 떨어지며 2시간30분의 접전 끝에 고개를 떨구었다

‘높이’ 잡는 ‘스피드’의 힘. ‘농구는 높이의 스포츠’라는 진리에 역행하며 농구의 진짜 재미를 만끽하게 해주고 있는 스피드농구가 만개하고 있다. 그러나 갈 길은 멀다. KCC는 시즌이 진행될수록 스피드의 공세에 점차 적응하며 더욱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고 있다. 높이의 철옹성을 깨뜨리기 위한 또 다른 스피드 농구의 진화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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