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기 휘날리며’ 사들이고 또 사들이고 …
  • 이홍기 (연합뉴스 도쿄특파원) ()
  • 승인 2008.12.09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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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주요 기업, 경쟁적으로 해외 M&A·출자 계획 밝혀…일각에서는 투자 대비 성과 창출에 회의적 시각도

▲ 아소 다로 일본 총리(오른쪽)는 최근 국제통화기금에 1천억 달러를 출자한다고 밝혔다. ⓒ뉴시스

미국발 금융 위기로 세계 경제에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머니게임’의 파국으로 세계적인 금융 혼란을 촉발시킨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시장을 겨냥해 착실하게 경제를 성장시켜나가던 신흥국 역시 ‘동시 불황’의 먹구름에 뒤덮여 있다. 경기 후퇴의 ‘쓰나미’는 일본에도 예외 없이 밀려들었다. 금융 위기의 부산물로 진행되는 급격한 엔화 강세로 인해 주력인 수출 기업들의 실적이 크게 악화되었다. 세계적인 수요 감소로 판매가 부진해지면서 제조업을 근간으로 하는 일본의 실물 경제 역시 빠르게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일본 기업들은 공격적인 해외 투자로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지난 9월 미국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금융 위기가 본격화된 이후에도 해외 기업 인수와 출자 등으로 해외 사업을 확대하며 글로벌화를 한층 가속화하고 있다. 세계 인수·합병(M&A) 시장을 주도해온 구미세(勢)가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생존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데 반해, 일본 기업들은 탄탄한 재무 기반을 토대로 기업 인수 및 출자에 적극 나서며 위기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세계 경제 신음… 일본은 위기 이후 준비 중

 금융 위기가 가져다준 엔고(高)로 엔화의 구매력이 더욱 커진 데다 세계적인 주가 폭락으로 인수 대상 기업의 가치가 대폭 하락한 점도 일본 기업들의 투자 의욕을 부추기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금융 위기로 실적이 악화되고 있지만 이익 수준이 여전히 높은 편이다. 또한, 지난 10년간 뼈를 깎는 구조 조정으로 인원·설비·부채 등 이른바 ‘3대 과잉’도 해소해 수익 기반과 재무 내용이 크게 개선된 상태이다. 이같은 이유로 일본 기업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을 수 있었다.

사실 일본 기업이 ‘글로벌화’를 표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일본 기업들은 지난 1980년대 거품 경기 때도 해외에서 적극적인 매수 공세를 폈으나 당시에는 호텔과 상업용 빌딩 등의 부동산 매수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같은 업종이나 관련 회사를 인수하는 등 해외 사업을 강화하는 쪽으로 인수에 나서고 있는 점이 다르다.

금융 위기가 악화된 9월 이후 해외의 M&A 및 출자 계획을 밝힌 기업만 해도 일본 최대 금융그룹인 미쓰비시UFJ, 미쓰비시레이욘, NTT도코모, 이토추상사, 기린맥주 등 각 업종을 대표하는 쟁쟁한 기업들을 망라하고 있다. 지난 11월 영국의 유력 화학업체인 루사이트 인터내셔널을 인수하기로 발표한 미쓰비시레이욘이 대표적인 예이다. 미쓰비시레이욘은 액정 등에 사용되는 아크릴수지원료 부문 세계 1위인 루사이트를 약 1천5백억 엔(약 2조2천억원)에 인수해 자회사로 만들었다. 이 부문 4위에 불과한 업체가 선두 기업을 사들인 것이다.

또, 이토추상사는 중국의 가공 식품 분야에서 최대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는 딩신(頂新)그룹에 7백억 엔을 들여 20%의 지분을 취득하기로 했다. 엔고 기회를 이용한 딩신그룹 출자로 원료에서부터 가공, 물류, 판매에 이르는 네트워크를 구축해 높은 성장이 기대되는 중국 시장을 적극 개척해나간다는 구상이다.

일본의 최대 휴대전화 업체인 NTT도코모는 인도의 타타그룹 산하 휴대전화사인 타타텔레서비스(TTSL)에 2천100억 엔을 출자해 약 26%의 지분을 취득하기로 했다. 중국 다음의 거대 시장으로 기대되는 인도에서 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대주주로서 임원을 파견해 경영에도 적극 관여할 방침이다.

신일본제철과 JFE스틸, 스미토모금속, 고베제강소, 닛신(日新)제강 등 일본의 5개 제철사와 이토추상사로 구성된 기업 연합은 철광석을 생산하는 브라질의 광산회사에 출자하기로 합의했다. 총 투자액은 3천억 엔을 넘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기린맥주는 호주의 최대 음료회사인 코카콜라 아마틸 인수를 추진 중이다. 기린은 호주의 유업회사인 데어리파머스의 주식을 전량 취득한 바 있다. 특히 호주 달러를 기준으로 인수한 데어리파머스는 최근의 엔고 덕분에 인수 비용이 5백70억 엔으로 30% 이상 줄었다. 도시바는 한국의 삼성전자가 인수를 추진했던 미국 샌디스크의 일본 내 반도체 생산 설비의 지분을 인수해 결과적으로 삼성의 인수 포기를 유도하기도 했다.

금융 부문에서는 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이 미국의 모건스탠리에 90억 달러를 출자, 21%의 지분을 취득 완료했다. 미국의 금융정보 회사인 톰슨 로이터에 따르면, 올해 들어 11월 중순까지 일본 기업이 결정한 해외 기업 인수와 출자 총액은 총 6백26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3.7배나 증가했다. 전세계적인 M&A가 40%가량 줄어든 가운데 일본 기업들의 해외 인수 및 출자가 단연 두드러지고 있다.

일본 상장 기업들은 2007 회계연도까지 6년 연속 이익이 사상 최고조로 불어나면서 총 60조 엔(약 6천3백억 달러)이 넘는 가용 자금을 보유하고 있어 엔고와 주가 하락의 기회를 틈탄 해외 기업 사냥이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미국 투자 은행 인수는 성급했다”

세계 금융 위기에 따른 극도의 신용 위축으로 구미 기업과 투자펀드가 자금 부족에 빠져 있는 가운데 일본 기업들이 넉넉한 현찰로 해외 기업 사냥에 나서면서 주요 상사와 기업들에는 해외 M&A 중개회사들로부터 물건이 쇄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류 업체인 산토리의 사지 노부타다(佐治信忠) 사장은 지난 11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엔고 행진은 기업을 인수할 절호의 찬스이다”라고 말하면서 2천억 엔 정도의 수중 자금을 활용해 중국 등 아시아를 중심으로 기업 인수를 적극 추진해나갈 것임을 밝혔다. 사토 미즈호그룹 부회장도 “스웨덴의 볼보와 같은 외국 유력 기업을 사들일 기회이다”라고 말하면서 “향후 일본 자동차업계와의 관계 강화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최근 세계 금융 상황에 비추어 일본이 투자에 부응한 수익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투자 은행의 경우 비즈니스가 복잡한 데다, 결과적으로는 파산한 투자 은행의 영업 모델에 대한 정밀 조사도 없었던 만큼 성급했다는 지적이다. 일본 현지의 한 금융 전문가는 “앞으로는 투자 은행의 고수익 부문이던 수탁투자나 개인투자 컨설팅은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는 투자 은행도 안정적이나 수익성이 낮은 수수료를 기반으로 하는 업무로의 회귀가 불가피한 만큼 고수익을 기대하기는 곤란하다”라고 말했다. 인력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수 전문가를 확보하는 것과 이를 관리하여 성공하는 것은 별개라는 것이다. 일본 경영진의 관료주의적이고 내향적인 문화는 자유로운 구미식 사고에 젖은 인재와의 관계 구축을 저해할 것이라는 우려이다. 향후 일본이 이같은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해 글로벌 경제 및 금융의 핵으로 떠오를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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