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보다 실리” 통 크게 ‘통’한·중국-타이완
  • 소준섭 (국제관계학 박사) ()
  • 승인 2008.12.23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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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해운·항공 직항, 우편 등 ‘대삼통’ 합의 중국인들의 오래된 상업주의 정신이 ‘공신’

▲ 2008년 12월15일 중국 톈진항에서 타이완 가오슝으로 가는 첫 직항 해상 화물선 출항식에서 색종이와 풍선이 날아오르고 있다. ⓒAP연합

지난 12월15일에 이루어진 중국과 타이완 양안(兩岸)의 통상, 해운·항공 직항, 우편 교류에 관한 역사적인 ‘대통(大通)’ 합의는 실질적으로 중국과 타이완이라는 두 개의 공동체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전진시키는 매우 혁명적인 통합의 결과이다. 타이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3통(通)의 길을 열어젖힌 중국과 타이완은 이번 ‘대삼통(大三通)’을 완성함으로써 앞으로 한 단계 더 높은 통합을 위한 큰 다리를 놓았다.

중국 대륙과 타이완 양측은 2008년 6월, 9년 만에 공식 협상 창구를 복구하면서 7월부터 주말 직항 전세기 운행으로 항공 직항로를 연 데 이어 12월15일부터는 바다 직항로도 열게 되었다. 항공로 역시 12월15일부터 중국과 타이완의 29개 도시에서 매일 운항하는 정기 항공편으로 전환해 운항 편수가 매주 1백8편으로 대폭 증가했다. 이와 더불어 서신 왕래에는 소포와 속달 우편 등 모든 우편물이 포함되었고, 우체국을 통한 송금도 가능하게 되었다.

양안 간 물류를 포함한 경제와 인적 교류를 뜻하는 통상(通商), 통항(通航 : 해운 항공 직항), 통우(通郵 :우편 교류) 등 이른바 ‘3통(通)’은 1980년대부터 추진되었다.

1993년 등기우편을 제한적으로 교환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2001년에 이르러 타이완의 진먼(金門)과 마쭈(馬祖) 섬에 한해 중국 푸젠(福建) 성 3개 도시와 항공로를 개통했으며, 2003년 이후에는 명절 특별 전세기를 운항하는 등 이른바 ‘소삼통(小三通)’ 수준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해 경제를 회복시키겠다고 한 타이완 마잉주(馬英九) 정권이 출범하는 것을 계기로 불과 7개월 만에 전면적인 3통을 의미하는 ‘대삼통’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적대감·이견 밀어두고 실질적인 경제 이익에 ‘공감’

중국과 타이완 간에 이루어진 ‘대삼통’ 보도를 접하면서 중국인의 상업주의 정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한국의 경우에는 그나마 열려 있던 남북 관계가 오히려 꽁꽁 얼어붙게 되었는데, 중국과 타이완은 상호 간의 적대감과 이견(異見)을 한쪽에 ‘밀어두고’ 우선 양측의 실질적인 경제 이익을 위해 서로의 손을 과감하게 잡은 것이다.

일찍이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천하 사람들이 어지럽게 오고 가는 것도 모두 이익 때문이다”라고 갈파했다. 또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선비의 청고(淸高)한 품행도 없으면서 시종 가난하고 비천하며 그러면서도 고담준론을 논하기를 좋아하고 무슨 인의도덕을 계속 운위하는 것은 역시 진실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사회 발전에서 공업과 상업 활동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것은 사회 발전의 필연이라고 인식했다. 상공업자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의 합리성과 합법성을 인정했다. 그는 특히 물질재부의 점유량(占有量)이 최종적으로 인간 사회에서의 지위를 결정하며 경제의 발전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는 등의 경제 사상과 물질관을 피력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이미 이러한 사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세계에서 상업에 가장 능한 민족이 바로 중국인이다. 상업(商業)이라는 용어 자체도 원래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즉, 상(商) 지역 사람들이 유난하게 장사와 사업에 수완이 있었던 데서 상업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이다(진나라의 유명한 법 사상가였던 상앙은 원래 이름이 공손앙이었는데 바로 상 지방을 영지로 받으면서 상앙이라고 불려졌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정신에 토대를 두고 산서(山西) 성의 진상(晋商)과 안휘 성의 휘상(徽商)을 대표적으로 하는 상인 집단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융성했다. 휘상의 극성기에는 안휘 성 남성의 70%가 상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특히 이들은 학문과 문화를 중시하는, ‘선비이면서도 상인이고, 상인이면서도 선비였던’ 유상(儒商)이었다. 향리에 많은 서원을 지어 주희와 같은 대유학자를 배출했다. 근세사의 이홍장, 호적(胡適), 진독수 등도 이 지역 출신이다.

중국인들,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이익 도모하고 공존 실현해

 한편, 중국 내 유대 민족이라 불리는 객가(客家)족 역시 이러한 상업적 전통을 이어받아 ‘중국’을 지켜온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은 전세계 상권을 장악한 화교(華僑)의 절대적 주류를 이루면서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는 과정에서도 조국인 중국 대륙에 아낌없는 투자를 통해 중국을 부활시켰다. 손문과 등소평을 비롯해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 이가성(李嘉誠) 등 유명한 화교 거상들이 모두 이 객가족에 속한다.  

사실 중국 대륙과 타이완 사이에 최근의 ‘대삼통’ 이전에 서로 긴박하게 대치하는 상황에서도 타이완인들의 대륙 투자는 거의 무제한적으로 이루어졌고 대륙 방문에도 제한이 없었다. 아직도 투자나 방문은커녕 편지나 전화도 할 수 없는 우리 남북 관계의 시각에서 보면 중국과 타이완의 경우는 사실상 통일되었다는 착시 현상이 일어날 정도이다. 타협과 양보를 모르고 끝까지 자기 주장만 고집하는 우리의 ‘전통적 사고방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항상 100%의 절대적인 완승만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타협과 양보란 오로지 굴복과 투항, 그리고 처절한 몰락으로 투영될 수밖에 없었고 또한, 언제나 이념 시비로 번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항상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라는 식의 사고방식과 극한적인 대립, 결사 투쟁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중국인들은 49%를 차지하는 사람이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51%를 차지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양보하고, 때로는 90%가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10%에도 양보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이러한 측면은 사실상 다수결의 원칙 그리고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소수자 보호의 원칙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 개개인들의 실제적인 이익을 도모하고 아울러 전체 구성원의 공존(共存)을 실현해나간다. 그 이익과 공존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적대와 이견과 모순도 결코 영원한 것일 수 없고,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정신에 기초해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유보할 수 있는 것으로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한복판에는 바로 중국인들의 상업주의 정신이 존재한다. 중국에는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 보이는 법이다”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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