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기업이 있을 뿐 사양 산업은 없다”
  • 이철현 경제전문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8.12.30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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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귀재’ 서두칠 동원시스템즈 부회장 / “경영 핵심은 사람…명예퇴직 시키면 똘똘한 직원 먼저 나가”

 

ⓒ시사저널 이종현

‘한국식 경영의 신화’ ‘경영 혁신의 귀재’ ‘죽어가는 기업도 살리는 미다스의 손’. 서두칠 동원시스템즈 부회장의 이름 앞에 붙어다니는 요란스런 수식어들이다. 지난 12월24일 인터뷰 약속 장소인 서울 중구 남대문로 소재 밀레니엄서울힐튼호텔에서 서부회장을 만났을 때 그의 첫인상은 부드러웠다. 그가 카리스마 넘치고 기가 센 경영인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서부회장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담겨 있었고 몸에는 겸손함이 배어 있었다. 인터뷰는 3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서부회장의 논리 전개는 치밀했고 통찰력이 돋보였다.

오래된 숫자와 이름까지 빠짐없이 기억했고, 최신 경영 이론에 대해 해박했다. 부드러움 속에서 열정이 새어나왔고 경제 위기에 대해 언급할 때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불황의 늪에서 시름하는 한국 기업에게 그의 존재는 희망이다. 서부회장은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 사망 선고를 받은 부실 기업을 세계 최고 기업으로 바꾼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한국 기업이 불황에 맞서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물었다.


전세계 경제 위기의 여파로 한국 기업들이 다시 어려움에 처했다. 한국이 경제 위기를 이겨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환자 상태를 먼저 살펴야 한다. 한국 기업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기업 체질과 경쟁 환경부터 먼저 파악해야 한다. 10년 전 외환위기와 지금 경제 위기의 공통점은 어렵다는 것밖에 없다. 당시 외환위기는 외환 부족 현상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유럽·일본은 호황을 맞고 있었다.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갖춘 제품만 생산한다면 턴어라운드(회생)가 가능했다. 인원 조정을 통한 구조조정 방식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당시 기업들은 임직원을 대량 해고했고, 수익이 나지 않은 사업 부서는 없앴다. 심지어 회사를 헐값에 처분하기도 했다. 경제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 1997년 12월 한국전기초자의 최고경영자로 취임했을 때 주력 제품인 TV용 브라운관 유리에 대한 고객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생산 시스템을 혁신하고 경영 효율성만 높이면 경제 위기의 파고를 넘을 수 있었다. 생산성과 경영 효율을 높이자 3년 만에 총부채 6천억원으로 시름하던 부실 기업을 순이익 1천7백억원을 자랑하는 세계 최고 기업으로 바꿀 수 있었다.

지금 위기의 본질은 그때와 정반대이다. 주변 국가가 어렵다. 외국 기업들이 유동성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다.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 내 투자 자산을 팔고 투자 대금을 달러로 바꿔 본사로 송금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원화 환율이 치솟았다. 또, 한국 기업들을 경쟁자로 취급해 적대감까지 드러내고 있다. 경제 관료나 전문가는 ‘외환보유고가 충분하니 괜찮다’고 장담하고 있다. 위기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원인이 다르면 처방도 달라야 한다. 이번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 한국의 관료와 경영자는 ‘통제 기제(control mechanism)’에 익숙하다. 지휘와 통제를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도 정부 방침에 따르지 않는 기업이나 개인에게는 조사하겠다고 협박한다.

정부는 통제 기제가 아니라 서비스 조직이다. 기업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 아니라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업 경영인의 사기를 높여 주어야 한다. 수도권에 공장 건설을 제한하는 법은 개정해야 하고, 기업 활동의 세율 공제 범위도 확대해야 한다. 또, 수출 시장이 위축되고 있으니 내수를 진작해야 한다. 가장 먼저 세금을 줄여야 한다. 감세 조처는 기업의 투자와 가계의 소비를 자극할 것이다. 기업은 무조건 생산 시설을 줄이거나 사업 부서를 없앨 것이 아니라 연구·개발에 투자해야 한다.

기업 경영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기는 자가 모두 갖는 것’이 경영이다. 개인이나 기업이 위기의식을 갖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sense of upgrading(성장의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경영자만 위기의식을 가질 것이 아니라 조직 내부에 위기의식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막상 위기가 닥쳐 무엇을 하려면 늦다. 인원 조정, 사업 정리, 자산 처분 같은 위기 대응 방식은 효과가 없다. 명예 퇴직을 실시하면 경험 있고 똘똘한 직원이 먼저 나간다. 남아 있는 자는 초조하고 불안하다. 그런 직원들에게 한마음 한뜻으로 위기에 대처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늘 위기에 대처해 경영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면 이와 같은 극단적인 조처가 필요 없다. 정리 해고나 사업 정리는 경영자가 경영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다.

흔히 전략·기술, 시스템이 기업 경영에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아무리 좋은 전략이라도 사람이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람의 기질을 심(心)·정(情)·기(氣)로 파악할 수 있다. 심은 안정을 뜻한다. 사람의 기질을 배려하고 살려주기 위해서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 또, 구성원 사이에 따뜻한 감정의 교류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끼’라고 해석할 수 있는 기를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자기 인격이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구성원들이 정을 나누는 조직이라면 일을 하더라도 신명이 난다. 이를 위해서는 직급 체계와 위계 서열을 중시하는 통제 기제를 없애야 한다.

시장이 나빠지면 개별 기업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논할 때 시장 위축이나 수요 감소 탓이라는 변명을 자주 듣는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경쟁력 없는 조직은 죽어야 한다. 취임 초기 한국전기초자의 생산 제품인 브라운관 유리 시장이 사양 사업이므로 수익 개선이 어렵다는 패배의식이 팽배했다. 연간 브라운관 수요가 4억개에서 2억5천만개로 줄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한국전기초자의 연간 최대 생산 능력은 3천만개에 불과했다. 시장점유율은 4%였다. 시장 수요가 줄면 경영 혁신과 생산성 향상으로 시장점유율을 늘리면 된다.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하면 된다. 제조 과정을 면밀하게 살피면 원가 절감이나 단위당 제품 생산 시간을 줄일 구석이 엄청나게 많다. 내 눈에는 확연히 보인다. 동원시스템즈에 부임했을 때 관리 직원이 사무용품을 구입하겠다는 결제 서류를 가져왔다. 결제를 미루고 직원 책상 속에 있는 필기구를 책상 위에 모두 올려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때 모은 필기구를 한데 모아 공동 사용하니까 3개월 동안 필기구를 구입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국전기초자에서는 고용 보장 각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한 노조 대표에게 ‘고용 보장은 회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한다’라고 말했다. 피부를 벗겨내는 고통을 참아가며 원가 절감과 품질 향상에 몰입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사양 산업은 없다. 사양 기업만이 있을 뿐이다.

노동 강도가 그 정도라면 견디기 힘든 직원들이 불만과 불평을 토로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그들을 설득했나?

최고경영자는 임직원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최고경영자를 신뢰해야 한다. 신뢰는 솔선수범과 정보 공유에서 나온다. 최고경영자는 ‘나를 따르라’ 하지 말아야 한다. ‘함께 가자’고 해야 한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2004년 12월19일자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글로벌 최고경영자 25인’으로 나를 선정했다. 당시 <타임>은 6개월 동안 비밀리에 내 행적을 추적했다. <타임>은 그 선정 이유로 ‘서사장은 생산 현장의 한복판에 있다’라고 표현했다. 최고경영자라고 사무실에 앉아서 지시와 통제만 해서는 회사 망한다. 한국전기초자 재임 기간(3년) 동안 구미공장에 머무르면서 혼자 밥 해먹고 단 하루도 집에 간 적이 없다. 차도 운전사 없이 직접 몰았다. 사장실 문은 없애고 원탁을 놓았다. 언제든지 사장과 같은 눈높이에서 허물 없이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때로는 원가 절감 방안이나 경영 효율을 높이는 방안에 대해 진지한 토론이 이어질 때도 있었지만 일상사에 대한 잡담도 있었다. 사장이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직원들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1시간 일하고 30분 쉬는 작업 방식을 2시간 일하고 10분 쉬는 업무 체제로 바꿀 수 있었다. 경영 정보는 철저하게 공유했다. 회계, 기술, 시장 조사, 생산 공정 관련 자료까지 직원에게 모두 공개해 사장과 사원이 회사 실정에 대해 같은 정보를 갖게 되었다. 이 조처는 단지 신뢰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임직원들이 주인의식까지 갖게 했다.

기업 경영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무엇인가?

네 가지 문화를 조직 내에 심으라고 권하고 싶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이다. 경영인은 경청해야 한다. 생산이나 영업 직원들이 현장에서 느끼고 판단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기업 경영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정보는 현장에서 나온다. 사장이 현장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독단으로 판단하면 엉뚱한 지시가 내려가기 쉽다. 직원들이 우리 사장은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아무리 좋은 지시라도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경영인은 꾸준히 읽어야 한다. 경영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문학·역사·철학 관련 서적도 읽어야 한다. 조선시대 선비는 문학 3백권, 역사 2백권, 철학 100권을 읽었다. 이를 ‘문사철 6백’이라고 일컫는다. 경영인은 아무리 시간이 없더라도 문사철 6백은 읽어야 균형 감각과 판단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다음에 직원과의 대화를 통해 공부는 완성된다. 원탁에 앉아 눈높이를 맞춰 직원과 대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보더라도 다른 견해를 갖는 것이 인간이다. 상대방과 차이는 인정하면서 자기 주장을 이해시킬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두 번째 문화는 일에 대한 철학이다. 일을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즐기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일을 즐기면 열정이 생긴다. 마지못해 일할 때와 생산성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다. 세 번째 문화는 인간 존중이다. 구성원이 소외감을 느끼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요즘 자살과 반사회적 범죄가 늘어나는 원인도 소외에서 찾을 수 있다. 경영 정보를 직원들에게 완전히 공개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변화를 수용하고 남다르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을 시켜보니 직원들이, 안 되는 원인에 대한 보고서는 잘 만든다. 실패의 원인을 자기 탓보다는 환경 탓으로 돌린다. 시장 흐름이나 경쟁 환경에 변화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그것을 활용해 새로운 경쟁력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어려움에 처한 기업의 경영을 맡아달라고 하면 승낙할 것인가?

얼마 전 진주중·고등학교 동기인 성종화씨가 일흔에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그 축하연에 참석해 얼떨결에 축사를 부탁받았다. 나는 축사에서 ‘야마오카 소하치가 쓴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쓰>에서 이에야쓰는 인생은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먼 길을 가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 짐을 가볍게 지고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멋있게 가는 이도 있다. 내 친구 성종화는 멋있게 자기에게 주어진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비전과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청년이고, 꿈과 열정이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청년이 노인이다. 나는 아직도 꿈과 열정을 잃지 않은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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