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사회가 만든 씁쓸한 ‘우화’
  • 이철현 경제전문기자 lee@sisapress.com ()
  • 승인 2009.01.13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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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체포로 신원 드러나…경제 현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전망 공유할 계기 마련될 듯

▲ 민생민주국민회의 회원들이 지난 1월9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정부 비판 재갈 물리는 미네르바 체포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사저널 임준선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1월8일 ‘미네르바’로 추정되는 박 아무개씨(30)를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미네르바는 잡혔으나 그가 한국 사회에 불러일으킨 파문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경제학을 배운 적이 없는 ‘30세 전문대졸 무직자’라는 미네르바의 신원이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언론은 미네르바를 ‘조류독감이나 중증급성호흡기장애군(SARS)’ 병원균에 비유하는가 하면 그에게 사로잡혔던 한국 사회를 ‘가짜에 놀아난 대한민국’으로 규정했다. 미네르바 현상이 사이버 문화의 역기능과 한국 사회의 부실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라는 비판도 나왔다.

이와 달리 미네르바가 활동했던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에서는 그의 석방을 청원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자기 블로그에 경제 현안을 비관적으로 예견한 글을 올린 행위로 인해 체포되면 종합주가지수 3000을 공약한 이명박 대통령은 사형해야 한다(인터넷 필명 넥스트)’라는 과격한 주장부터 ‘독학으로 경제 서적 탐독한 30대만도 못한 강만수(기획재정부 장관)와 똘마니는 반성해라’라는 냉소 섞인 질타까지 쏟아지고 있다.

미네르바는 그의 예견 못지않게 불길한 한국 사회의 내부 모순을 명징하게 햇빛 아래 드러냈다. 미네르바는 불길한 상징이었고, 가상현실의 카산드라였다. 그는 한국 경제 관료의 무능함을 질타하며 주요 경제 현안을 비현실적으로 정확하게 그것도 가장 비관적으로 예견했다. 네티즌은 그에게 환호했고 증권사 투자 전문가마저 그의 불길한 예측을 보고 투자를 주저했다.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을 역임한 김태동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는 ‘미네르바는 가장 뛰어난 국민 경제 스승’이라 칭송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12월11일자 ‘거짓의 신?(False God?)’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미네르바를 ‘온라인 노스트라다무스’로 표현하며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미네르바 논쟁을 소개하기도 했다. 

네티즌들, 불길하지만 신랄하고 정확한 예측에 환호

미네르바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에 경제 위기와 관련해 2백80여 개의 글을 올렸다. 그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평균 조회 수가 10만건이 넘었다. 언론 매체는 그의 글을 인용 보도했다. 그가 절필을 선언하면 네티즌은 아쉬워했다. 불길하지만 신랄하고 정확한 예측에 환호했다.

미네르바가 가상현실의 카산드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7월. 그는 세계 4대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 환율 1천4백원 급등, 주가지수 급락을 차례로 예언했다. 불길한 예언은 놀랍게도 실현되었다. 그때부터 미네르바에게는 추종자가 생겼다. 미네르바는 더 이상 ‘트로이 멸망’을 정확하게 예언했으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카산드라가 아니었다. 수많은 추종자들이 미네르바의 글을 인터넷 공간에서 무한 복제했다. 그는 ‘인터넷 경제대통령’으로 칭송받았고 가상 세계를 뛰어 나와 현실 세계의 경제 예언자로 주목받았다.

미네르바는 신원을 공개하지 않았다. 단지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일한 50대 금융인’이라고 밝혔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미네르바가 강만수 기획재정부장관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왔다. 정보가 충분하지 않으면 그렇게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 깔려 있다. 하지만 미네르바의 예언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다. ‘종합주가지수는 500, 미국 다우존스지수는 5000까지 떨어진다’라거나 ‘강남 집값이 반 토막 난다’라는 그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국제통화기금(IMF)이 조건 없이 돈을 빌려줄 수 있는 통화 스와프 대상국으로 한국을 포함하는 것을 검토한다는 보도에 대해 미네르바는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 당시와 다름없이 간주되고 있다’라고 악재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 소식은 IMF가 한국 경제를 좋게 판단하는 호재에 가까웠다. 지난해 하반기에는 물가 폭등과 식량난이 일어날 것이므로 생활필수품을 사두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본수지 항목인 단기외채 상환 금액을 경상수지 항목으로 오인하는가 하면 기준금리와 실질금리의 연동성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미네르바가 어떻게 ‘인터넷 경제대통령’으로 격상되었을까? 어떻게 현역 경제 부처 장관이 미네르바가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걱정하는 일까지 비약되었을까? 외국 언론은 정부 탓이라고 지적한다. 로이터 통신은 지난 1월9일 미네르바 체포 기사를 보도하면서 ‘한국 정부가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서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라고 지적했다. 이름 밝히기를 꺼려하는 국내 증권사 투자분석사는 “몇 개월 전 한국은행 고위 관계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 일간지에 외환보유고 현황을 걱정하는 견해를 밝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상당수 경제학자나 분석사들은 기획재정부,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고위 관계자로부터 언론 매체에 한국 경제와 시장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경제 관료나 전문가에게 보낼 신뢰 가로채기도


한국증권협회는 지난해 초부터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JP모건을 비롯한 외국계 투자 은행의 국내 법인이 배포한 매도 보고서를 조사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매도’를 추천한 보고서 위주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협회 자율규제부 회원조사팀 천성대 조사관은 “외국계 투자 은행 보고서가 작성한 매도 보고서가 협회 규정에 맞게 작성되었는지 조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외국계 투자 은행 보고서에 대해 그것도 매도 보고서에 대해서만 지금처럼 조사를 벌이는 일은 흔치 않았다. 한국증권업협회가 금융감독원 감독 하에 있는 특별법인인 것을 감안하면, 금감원 지시에 따라 한국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외국계 금융 기관을 조사한다는 오해가 생길 만하다. 회원조사팀 조사관은 ‘자주 있었던 조사는 아니지만 협회 규정에 맞춰 자율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라고 밝혔으나 외국계 금융 기관은 ‘압력’으로 느끼고 있다.

이 와중에 미네르바는 신랄하게, 그것도 아주 비관적인 예언을 쏟아냈다. 이로 인해 국내 경제 전문가와 확실하게 차별화하는 데 성공했다.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해박한 경제 분석 도구와 지표를 제시하며 내놓은 예측이 들어맞자 네티즌들이 미네르바에 환호한 것이다. 사람은 위기에 처하면 현인이나 초인을 찾는다. 대중은 정부 각료나 제도권 경제학자 가운데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이를 찾지 못하자 인터넷에 혜성처럼 나타난 선지자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다. 미네르바는 경제 관료나 전문가에게 보내야 할 국민의 신뢰를 가로챘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정부가 한국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통제하려는 이유는 알겠으나 경제 현황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는 것을 막으면 제2, 3의 미네르바가 나타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정부는 ‘모든 사람이 나쁘다고 하면 경제는 나빠진다’라는 경제의 자기실현적 예언을 지나치게 우려하고 있다. 미네르바는 한국 경제가 풀어야 할 과제 하나를 제기했다. 미네르바 현상은 경제의 자기실현적 예언을 경계하면서도 경제 현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전망을 공유할 수 있는 방안을 한국 사회에 요구하고 있다. 31세 무직자 가운데 하나로 전락한 미네르바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민생민주국민회의 회원들이 지난 1월9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정부 비판  재갈 물리는 미네르바 체포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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