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움직이는 2% 유대인들의 ‘파워 네트워크’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09.02.03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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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도 안팎으로 유대인에게 둘러싸여 있다. 오바마 대통령을 만든 일등 공신 중에 유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유대인의 돈과 인맥’은 이미 미국 각계각층에 뻗어 있다.

세계의 언론들은 가자에서 벌어진 참상을 속속들이 전달했다. 비참한 현실이었다. 무방비 상태의 팔레스타인 아이나 여성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이나 공습으로 인해 생명을 잃었다. 국제 사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결을 두고 우왕좌왕했다. 중심 축인 미국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움직이지 않았다기보다는 암묵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듯하다.

가자 지구에서 총성이 일어나자 부시 행정부는 그 책임을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에게 돌렸다. 하마스의 로켓포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자위권 행사로 규정하며 이스라엘을 두둔했다. 정부의 코멘트를 뒷받침하듯 1월8일에는 미국 상원이, 1월9일에는 미국 하원이 하마스를 비난하며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유엔이 힘겹게 마련한 안보리의 즉각적 휴전 결의안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15개 이사국 중 미국만이 유일하게 기권표를 던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금융 위기로 초래된 경제 대책에 대해서는 줄곧 발언했지만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해서는 불투명한 반응을 보였다. 이를 두고 외신들은 “유대계에게 빚진 선거자금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대통령 선거는 결국, 자금력·조직력·미디어 대책에서 승패가 판가름난다. 오바마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숙한 연설 능력이 승리의 원동력인 것처럼 알려졌지만 그 이면에는 ‘유대계 혹은 친이스라엘계의 협력’이라는 스폰서가 자리 잡고 있다. 오바마 캠프에서 젖줄인 선거자금을 모았던 책임자는 시카고에서 유대계 자선 단체를 인솔하던 유대인 앨런 솔로몬이었다.

원래 오바마는 반이스라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민주당 경선 기간 중 민주당 계열의 유대인(또는 유태인)들은 오바마에 대해서 비판을 퍼부었다. 오바마가 정말 친중동적인 정서를 가져서라고 믿기보다는 조금의 반이스라엘적인 뉘앙스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이것은 2008년을 기점으로 변화했다.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칼럼니스트인 로저 코헨은 2008년 2월10일자 칼럼을 통해 “오바마를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꽤 강력한 이스라엘의 친구이다”라며 엄호 사격에 나섰다.

로저 코헨의 호의에 오바마가 스스로 이스라엘의 친구임을 인정하며 답례했다. 오바마는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직후인 지난 해 6월 유대인 최대 압력 단체인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AIPAC)’의 자리에 섰다. 그는 “이란에 대한 공격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보이며 사실상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일각에서 ‘투항’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로 오바마의 이날 연설은 파격적이었다. 어찌보면 이번 가자 지구의 참상을 두고 오바마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 것은 AIPAC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미국 내 유대인은 그야말로 소수 인종이다. <예루살렘포스트>의 추정에 따르면 미국 내 유대인의 인구는 대략 6백40여 만명이다. 미국 내 전체 인구의 2% 남짓에 불과하지만 일반인들도 미국에서 유대인이 가지는 파워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유대인들이 미국 사회의 심장부에 진출하게 된 과정을 알려면 역사적인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 유대인의 미국 입성

미국에 처음으로 이주한 유대인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654년, 브라질을 경유해 처음으로 지금의 뉴욕 지방에 도착했다. 유대인들은 인디언을 막기 위한 바리케이트를 건설하는 데 헌금하거나 경비대에 직접 참가하며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독립전쟁에는 많은 유대인이 워싱턴 등지에서 총을 들고 참가했다. 이들 초기 이주자 가운데는 크리스트교로 개종하고 상류 계급과 혼인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거쳐 WASP(백인 앵글로색슨, 미국 주류 지배 계급)에 포함된 이들도 많았다.

182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는 독일에서 유대인들이 몰려왔다. 독일에서 1848년 일어난 3월 혁명의 패배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온 유대인들의 멸시를 뒤로하고 새로운 곳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면화, 금광, 철도, 토지 등에 투자했고 당시에는 마치 유곽처럼 취급받던 월스트리트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독일계 유대인은 모국 독일과 유럽 각지의 유대계 자본과의 연결 고리, 즉 중개인으로 활약했다. 철도가 조달 수단으로 부각되면서 독일계 유대인들의 위상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미국 내의 주요 기업들에게 국제적인 자금을 조달하면서 독일계 유대인이 소유하거나 지배한 투자 은행은 그 후 오랫동안 미국 내의 투자 은행 업계를 양분하는 하나의 세력이 되었다.

‘골드만삭스’의 창시자인 독일계 유대인 마커스 골드만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성공 표본이었다. 그는 1848년 필라델피아에 도착해 2년간 행상을 한 뒤 의복점을 열어 자금을 모았다. 1869년에 만든 골드만삭스는 현재 세계 최대의 자산운용사로 성장했다. 독일계 유대인은 백화점에도 진출했다. 현재 미국의 유명백화점인 브루밍데일, 니만마커스, 파이린즈 등은 독일계 유대인이 설립한 과거 소매상점에 기원을 두고 있다.

스페인계 유대인 사회에 독일계 유대인이 합류한 결과, 유대인계 인구는 눈에 띄게 증가했다. 유대인의 수는 1848년에는 5만명이었지만 1860년대 중반에는 20만명 가까이 급증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인구의 0.5%에 불과한 소수 인종이었다.

독일계 유대인은 민족·종교를 드러내며 배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싫어했다. 유대인 정치 클럽을 조직하거나 유대인의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 등을 혐오했다. 그들이 내세운 방식은 전형적인 ‘동화주의’였다. 유대인이 소유했던 백화점들은 결코 유대계의 색깔을 내보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지역 사회의 문화적·종교적 테두리에 녹아들려는 경영 방침을 갖고 있었다.

유대인 인구는 1900년이 넘어서자 100만명을 돌파했다. 이전 20년간 미국의 총 인구가 1.5배 증가한 데 반해 유대인 인구는 4.4배가 증가했다. 이들은 주로 동유럽에서 넘어왔다. 1910년 무렵 유대인의 미국 내 인구는 2백80만명에 달했다.

미국은 1924년 이민법을 제정하며 동유럽 유대인들의 이민을 막았다.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린 시기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나치의 박해를 피해 25만명의 유대인이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이다. 이때 온 무리에는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의 과학자와 작가 등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독일계 유대인 지식인들이 이주하면서 생긴 미국의 힘은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1901년부터 1939년 사이에 물리학, 화학, 의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미국인의 수는 14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1943년부터 1955년까지, 즉 독일계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뒤 이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미국인은 29명으로 늘어났다. 독일에서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독일은 같은 기간 35명의 수상자가 5명으로 급감했다.

여전히 소수 인종이지만 유대인 사회는 알토란 같은 분야들을 점유하며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유대인들의 힘은 각자 보유하고 있는 부분이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나온다. 소수 인종이지만 금융, 학회, 미디어, 영화 등 각지에서 은연중 힘을 발휘하고 있다. 돈과 인맥으로 역대 정권이 친이스라엘적인 외교를 유지하는 데 버팀목이 되어왔다. 중동에서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대신해 미국 내에서는 유대인들이 미국 행정부를 포위하는 전략을 사용해왔다.

▒ 미국 정치권에 뻗은 강력한 네트워크

네트워크의 힘은 압력 단체의 힘으로 드러난다. 유대인의 힘을 보려면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AIPAC)를 보면 된다. 매년 6월에 열리는 연례 총회에는 주요 정당의 인사들이 모두 참석해 대성황을 이룬다. 회비가 최저 10만 달러인 엘리트 회원이 되면, 부통령 등 정권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주최하는 저녁 식사에도 갈 수 있다. AIPAC은 로비 단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책을 제언하는 싱크탱크의 역할도 한다. 이스라엘의 국익을 미국의 정책에 반영시키는 모든 일을 수행한다.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한다. 세라 페일린이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 4일 전인 지난해 8월30일, 미네아폴리스의 한 호텔에 AIPAC 간부 수십 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페일린에게 ‘이스라엘 특강’을 해줄 강사였다.

당시 페일린측의 관계자는 “AIPAC 간부는 45분에 걸쳐 페일린에게서 친이스라엘 성향을 찾으려고 애썼다”라고 말했다. 8년 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였던 유대인 조셉 리버만 상원의원도 옆에 앉아 격전지에서 유대계의 캐스팅보드를 잡는 법에 관해 설명했다. 페일린은 “미국과 이스라엘은 특별한 관계이며 이란의 핵개발에는 반대한다”라는 모범 답안을 반복해 AIPAC 간부들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중심이 된 친이스라엘계 로비 단체는 미국기업연구소(AEI), 안보정책센터(CSP), 허드슨 연구소 등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가운데)이 지난해 6월 미국 유대인 공공정책위원회(AIPAC)에서 연설하고 있다.

▒ 금융·IT·영화 등 산업 전반에 막강 영향력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습이 한창이던 지난 1월12일 스티븐 월트 교수(하버드 대학)는 AFP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에 꽉 잡혀 있는 미국을 비판했다. AFP와 인터뷰를 한 이유는 아마도 AP나 UPI가 유대인의 소유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월트 교수는 “이스라엘이 미국의 위성 국가라는 말은 잘못되었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위성 국가이다”라고 꼬집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미국의 핵심부에는 빠지지 않고 유대인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AIPAC이 단순히 표만을 가지고 워싱턴에 압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AIPAC의 뒤에는 유대인들이 소유한 수많은 산업들이 있다. 대표적인 부문이 금융이다. 유대인들의 힘이 더욱 막강해진 것은 힘의 기준이 ‘토지 소유’에서 ‘자본 소유’로 이동하면서부터이다. 특히 자본의 이동에 국경이 없어지고 금융공학이 발달하면서 자본을 이용해 자본을 증가시키는 방법이 확산되면 일찍부터 금융에 투신한 유대인들의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이들이 세계를 지배한다’라며 음모론의 중심에 매번 등장하는 세계적인 금융 부호 로스차일드가(家) 역시 유대계로 세계 1, 2위를 다투는 투자 은행인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번에 파산하며 금융 위기를 부른 AIG, 메릴린치, 베어스턴스 등의 금융 기관 역시 유대인이 소유했던 곳이다. 국제 금융이야말로 유대인들의 가장 큰 힘인 셈이다.

IT 분야에서도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높다. 지난해 미국 CEO 중 8천4백60만 달러를 수령해 최대 연봉 1위에 오른 ‘오라클’의 창업자 랠리 앨리슨, 세계적인 PC메이커 ‘델’의 마이클 델, ‘컴팩’의 벤저민 로젠도 유대인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인 ‘인텔’을 공동 창업한 앤드류 글로브도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이며, 빌 게이츠가 물러난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의 CEO에 오른 스티븐 발머도, 매킨토시를 발명한 제프 러스킨도 유대인이다. 우리나라에는 CDMA 기술의 보유사로 잘 알려진 퀄컴의 어윈 제이콥스 회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금융과 IT 등 현대 사회의 총아라고 불리는 산업에 이어 언론도 미국의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에게 낯익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 저널 등의 지분을 유대인이 갖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지 않다. <뉴스위크> 등의 시사 잡지와 AP, UPI 등의 통신사도 해당된다. <보그> <W> <GQ> 등 유명 잡지로 잘 알려진 유대계 미디어 재벌인 ‘뉴하우스 그룹’은 미국 최대의 케이블 네트워크 중 하나이다. CBS나 방송미디어그룹인 바이아컴, 월트디즈니 등도 유대인이 소유하거나 CEO로 재직 중인 곳이다.

현실을 재구성하는 신문과 방송뿐만이 아니라 영화 역시 유대인이 독점하는 분야이다. 19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영화는 ‘니켈로디온(5센트짜리 볼거리)’이라 불리며 하류문화 취급을 받았다. 유대인은 여기에 뛰어들었다. 100년이 흐른 지금 MGM, 20세기 폭스, 워너브라더스, 파라마운트, 유니버설 등 주요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는 유대인의 소유가 되었다.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에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주요 산업들이 유대인의 소유가 된 것만으로도 그들의 힘은 더할 나위 없이 막강해진 셈이다. 하물며 이 산업들이 엄청난 이익까지 내고 있으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 오바마 주변의 유대인 실력자들

유대계는 외곽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넘어 내부에서도 오바마 정부의 정책에 깊숙이 관여할 준비를 마쳤다. 대통령 비서실장에는 일찌감치 시카고 태생의 유대인 하원의원 람 임마뉴엘이 임명되었다. 비서실장은 ‘White House Chief of Staff’로 불리는 대통령의 분신이다. 스케줄 관리부터 정책 입안, 그리고 의회와의 커뮤니케이션까지 도맡는 자리이다. 임마뉴엘은 결혼 전에 아내를 유대교로 개종시켰고, 이스라엘 국적도 가지고 있다. 임마뉴엘의 부친 역시 유대 민족주의자의 무장 그룹에 참여한 전력이 있다.

티모시 가이스너 재무장관 역시 유대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금융 위기로 경제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 때여서 그렇다. 금융 위기가 발생했을 당시 뉴욕연방은행 총재를 지내면서 베어스턴스나 AIG의 구제에 나서는 등 위기 방지 대책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한 뒤 로버트 루빈과 로렌스 서머스 두 유대인 재무장관의 밑에서 차관으로 일하며 1997년 아시아 통화 위기를 관리한 바 있다. 경제 위기가 도래한 1997년에는 재무차관으로, 그리고 2009년에는 재무장관으로 일하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로 오바마 정권의 경제 정책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국가경제위원장으로,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경제회복자문회의의장으로 돌아오는 등 유대인 경제계 거물들이 워싱턴으로 복귀 중이다. 피터 오스자그 역시 루빈 전 장관의 제자로 백악관 예산국장에 임명되었다. 제임스 스타인버그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아래에서 국무부 정책 담당 부장관을 맡아 미국의 전반적인 외교 정책을 총괄하는 유대인이 되었다. 오바마 캠프의 유대계 네트워크를 담당했던 친이스라엘파 데이비드 엑셀로드는 백악관 선임고문으로 임명되어 오바마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한다. 백악관은 안팎으로 유대인에게 둘러싸여 있다.

 

▲ 유대계는 오바마 정부의 내부에도 자리를 잡아 정책에 깊숙이 관여할 준비를 마쳤다(굵은 글씨가 유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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