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따라 춤추는‘그 대통령 그 원로’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9.02.03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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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권의 국정 원로 역할 / 성향별로 이합집산 ‘쓴소리’보다 듣기만 하는 경우 많아

▲ 이명박 대통령이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땅에 진정한 ‘원로’는 있는가. 이명박 대통령이 곧 새로운 원로회의 기구를 발표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제기되는 의문이다. 한마디로 국민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국민이 믿고 존경할 만한 원로가 과연 있는지, 그리고 그 원로가 얼마만큼이나 현 정권과 대통령을 준엄하게 꾸짖을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이 그것이다. 우리 헌법 90조는 ‘국정의 중요한 사항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국가 원로로 구성되는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 자문회의 의장은 직전 대통령이 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법은 지금도 살아 있다. 하지만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이것이 실현되지 않는 것은 전·현직 대통령 간의 적대적 관계 때문이었다. 김영삼 정권 시절 YS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기소했다. 김대중 정권 때는 DJ와 YS가 ‘정적’으로 시종일관 대립했다. 그나마 전·현직 대통령이 가장 가까웠던 때가 지난 정권에서의 노무현 대통령과 DJ였지만, 당시 노대통령은 원로회의의 필요성에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이런 악순환은 현 정권 들어서도 반복되면서,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다. 청와대는 새로 발족될 원로회의의 성격에 대해 “헌법에 규정된 국가원로자문회의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법률에 의한 것이 아닌 대통령 ‘훈령’으로 설치한다는 얘기이다. 굳이 헌법에 명시된 조직이 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훈령으로 따로 설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속내에는 바로 전·현직 대통령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헌법에 명시된 국가원로자문회의로 할 경우, 노 전 대통령이 의장을 맡아야 하는 규정 때문이다.

전·현직 대통령 간의 적대적 관계도 걸림돌

이 땅에 진정한 원로가 없다는 비판은 여기서 출발한다. 중심을 잡아야 할 원로가 역대 정권의 성격과 이념의 색깔에 따라  줄을 섰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시사저널>은 지난 김영삼 정권부터 현재까지 역대 정권별로 ‘국정 원로’ 대접을 받았던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우선 역대 대통령들이 국정 자문을 구하기 위해 만남을 가졌던 원로 인사들의 면면을 파악하는 작업부터 먼저 했다. 이를 위해 역대 정권에서 펴낸 <국정운영백서> 등 통치사료 자료와 언론 보도 내용들을 모두 확인했다. 여기서는 의례적인 만남으로 간주되는 단체별 회동은 배제하고, 정국 혼란기나 국가 중대사 때마다 대통령이 자문을 구하기 위해 청와대로 초청하거나 직접 찾아가 만남을 가졌던 ‘원로’ 인사들에 국한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비공식 접촉까지 일일이 다 확인하기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원로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은 그 성격상, 공식 일정이 아닌 비공식 일정이 있을 수 있고, 실제 거기에서 더 속 깊은 대화가 많이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 김영삼(위 왼쪽 사진 맨 오른쪽)·김대중(위 오른쪽 사진 맨 오른쪽) 두 전직 대통령은 보수와 진보 성향을 아우르며 폭넓게 원로 인사들을 만난 것으로 나타났다. ⓒ연합뉴스(왼쪽), 시사저널 우태윤(오른쪽)

이 밖에도 정부 공식 기구에 ‘고문’으로 이름을 올린 인사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국가원로자문회의가 한 번도 설치되지 않은 상황에서 원로급 인사가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조직으로 통일부 소속의 ‘통일고문회의’가 있다. 1970년 박정희 정권 때 처음 만들어진 이 조직은 약 30명의 사회 원로급 인사들로 구성되며 현재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통일부에 자료 협조를 요청해 역대 정권별 통일 고문 명단을 확보했다. 또한, 각 정권별로 필요에 의해 설치된 특별 기구의 명단도 확보했다. 김대중 정권의 경우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고문단이 있었고, 노무현 정권의 경우 ‘원로경제자문회의’ 등 각 분야별 자문회의가 있었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지난해 ‘대한민국 건국60주년 기념사업회’를 조직해서 주요 원로들을 여기에 포함시켰다. 

조사 결과, 각 정권마다 뚜렷한 특색이 나타났다. 우선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에서의 원로 인사들의 면면은 상당히 겹쳐 있다. 또한, 비교적 보수와 진보의 편중 현상 없이 그 스펙트럼이 상당히 폭넓게 퍼져 있었다. 이는 ‘양김’씨가 야당 지도자 생활을 오랫동안 함께해온 탓으로 보인다. 오히려 양김씨 집권 이후 보수와 진보의 편 가르기 색채는 더 뚜렷해지는 양상이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면서 원로의 면면이 대거 교체되는데, 그 대부분이 진보 성향의 인사들로 채워졌다. 그러던 것이 현 정부 들어 다시 진보 인사들이 빠져 나가고 보수 성향의 원로 인사들이 그 빈자리를 메우는 숨결 가쁜 교체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원로들을 청하는 빈도와 대화 방법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YS의 경우 소규모 인사들만 초청해 속내 깊은 대화를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독대를 선호했다는 후문이다. 반면, DJ는 수십 명씩 단체로 부르는 자리를 많이 가졌다. 노 전 대통령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두 전직 대통령에 비해 원로 초청 자리가 현저히 적었다. 대신 그는 3부 요인과 정당 대표 등 현직 인사들을 더 자주 불러서 자리를 함께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선호한 원로는 김수환 추기경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수환 추기경과 신현확 전 총리(작고)의 의견에 가장 많이 귀를 기울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김추기경은 독대만 무려 4차례나 하는 등 모두 6번에 걸쳐 대통령의 자문 요청에 응했다. 대통령과 직접 독대를 갖는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신 전 총리 역시 모두 5차례 YS의 요청을 받고 정국 전반과 경제 흐름에 대한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강영훈·남덕우·이현재·현승종 전 총리, 이한빈 전 부총리, 고흥문·이철승 전 국회부의장, 이세중 전 대한변협 회장, 홍남순 변호사(작고), 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이 주요 원로 인사로 청와대를 자주 방문했다. 종교계 인사로는 조용기·김선도 목사와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이 교단을 대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역시 최고의 원로는 김추기경이었다. 공식적으로 청와대 초청으로 방문한 것만 모두 5차례였다. 신 전 총리 역시 횟수는 조금 줄었지만, DJ와 독대를 하는 등 여전히 원로로서의 영향력을 변함없이 과시했다. 눈에 띄는 것은 강영훈 전 총리와 강원룡 목사(작고)가 5차례씩 국정 자문 요청을 받아 원로로서 활발한 조언 활동을 펼쳤다는 점이다. 그외에도 이홍구 전 총리, 민관식 전 의원(작고), 서영훈 전 총재, 송월주·서정대 전 조계종 총무원장(작고) 등이 자주 대통령의 자문에 응했다.

DJ는 전임 YS와는 달리 전직 대통령들을 비교적 자주 청와대로 불러 만찬을 함께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모두 4차례 청와대를 공식 방문했다. 반면, 이들과 불편한 관계였던 YS는 두 차례는 초청에 불응하고, 한 번은 DJ와 따로 독대하는 등 모두 3회 공식 방문에 그쳤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시절에는 진보 성향의 원로들이 대거 참여했다. ⓒ연합뉴스

노무현 정권 시절 가장 활발히 대통령과 대화한 원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5차례 청와대를 방문했다. 노무현 정권 시절 통일고문회의 의장을 지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송기숙 전남대 명예교수도 각각 4회씩 원로 초청에 응했다. 이밖에도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함세웅 신부, 강원룡·박형규 목사, 정진석 추기경,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청화 스님 등이 대통령과 가까웠던 자문 원로그룹이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김추기경의 방문이 현저히 줄었다는 점이다. 김추기경은 노무현 정권 초반 두 차례 청와대를 방문한 적이 있으나, 특별히 국정 자문을 위한 성격이라기보다는 종교 행사에 가까웠다. 이후 김추기경은 참여정부의 좌파 성향에 대한 비판으로 노무현 정권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기도 했고, 몸이 불편한 이유 등으로 해서 대통령과의 만남이 없었다. 대신 정진석 추기경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김추기경은 지난해 7월 노환으로 입원해 현재 병상에 누워 있다.

이명박 정부는 보수 성향 일색으로 비판받아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2년차를 맞은 올해 들어 부쩍 원로 자문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소통 부족’ ‘민심 단절’이라는 비판 여론을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아직 집권한 지 만 1년이 채 안 되었는데도, 지난해 3월31일 사회 각계 원로 10여 명을 청와대로 초청하는 등 모두 6차례에 걸쳐 원로들을 청와대로 초청하는 공식 행사를 가졌다. 남덕우·강영훈·이홍구·현승종 전 총리를 비롯해 이철승 전 국회부의장, 서영훈 전 총재, 이인호 전 서울대 교수, 김장환 목사 등이 벌써 두 차례 이상 청와대를 방문했다. 그런데 그 인사들의 면면이 지나치게 보수 성향에 한정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만남은 한 차례도 없었다.

곧 새 진용이 발표될 통일고문 인선과 원로회의 멤버 구성을 놓고도 말이 많기는 마찬가지이다.

통일고문은 2006년 노무현 정권에서 임명되었던 진보적 성향의 원로 인사들이 대거 빠지고 상당 부분 보수적 성향의 인사들이 자리를 대신 채울 것으로 알려졌다.

원로회의 멤버 역시 보수 성향의 인사들이 대부분 자리를 채울 것이라는 후문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김진현 ‘건국60주년 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백선엽·이철승·강영훈·남덕우 씨 등 이 기구에 참여했던 원로 인사가 대부분 포함될 것이라는 전언이다.

지난해 12월10일 원로 초청 22명 명단에 포함되어 청와대를 방문한 바 있던 한 정치권의 원로 인사는 “원로들의 조언을 듣고 싶다고 청해놓고, 정작 이대통령이 더 많은 말을 하더라. 그 자리에 참석한 원로들도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별 말을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제대로 된 원로회의 기구를 만들려면 이대통령은 원로들의 조언에 좀더 많은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정치권과 원로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원로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신현확 전 총리, 강원룡 목사 등을 꼽고 있다. 김추기경은 흔들림 없이 중심을 지켰다는 점에서, 신 전 총리는 대통령에게 거침없이 할 말은 하는 등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에서, 또 강목사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나 부름을 마다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시사저널 우태윤
역대 정권에서 큰 편향 없이 자문 활동을 활발히 하는 원로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나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고 중도이다. 어떤 때는 진보적인 성향을 보일 때도 있고, 또 꼭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는 보수적이 되기도 한다. 원로란 그런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정권 저 정권 모두 자문에 응하는 것을 욕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원로가 좌다, 우다 해서 갈라져서야 되겠는가. 그런 면에서 나는 고 강원룡 목사 같은 분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느 정권이나 부름을 마다하지 않고 나가서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원로들이 너무 정파와 이념에 따라 갈라지는 현상이 심하기는 하다.

참여정부 이래로 좀 심화되는 면이 있다. 과거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때는 정말 사심 없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원로들이 직접 거리로 나가 데모도 하고, 거침없이 정권을 비판하기도 했는데, 이젠 국민이 원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원로들을 활용하려 한 역대 정권들의 책임도 있다. 

현재 원로라고 자처하는 분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가끔 보면 원로라고 자처하기에 부족한 분들이 많다. 나 역시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지만, 막상 나가면 대통령에게 참고될 만한 충고나 직언을 안 한다. 또, 그럴 만한 분들은 아예 안 나간다. 훌륭한 원로들도 많았다. 사심 없이 대통령을 돕겠다 해서 나갔는데, 상처만 받는 경우도 많았다. 정권의 목적에 의해 원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요즘 같은 난국에 진정한 원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사회 각계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 찾았으면 한다. 대통령과 친한, 대통령이 대하기에 편한 사람들만 찾아서는 안 된다. 한쪽에 휩쓸리고 편 가르니까 그것이 싫어서 아예 나서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이현재 전 총리나 한승헌 전 감사원장 같은 분들이 대표적이다. 집 밖으로 안 나오려 한다. 정말 국가를 위해 사심 없이 조언을 할 만한 분들은 많다. 그분들의 목소리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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