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에는 엄하고 기술에는 강하다
  • 교토·이철현 경제전문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2.0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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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식 기업의 성공 비결 / 기술 모듈화·고객 분산·수익 위주 조직 구성 등으로 위기 대비

▲ 한 일본 소비자가 닌텐도 소프트웨어 매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 교토식 기업 사전에     ‘재무 레버리지 효과’라는 단어는 없다

기업은 전략 사업이나 수익성 높은 부문에 투자하기 위해 돈을 빌린다. 부채가 지렛대 역할을 해 이익을 늘리는 재무 레버리지 효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경기 확장기에는 레버리지 효과가 작용해 차입금이 많은 기업의 실적이 좋다. 하지만 레버리지 비율이 높을수록 위험은 커진다. 교토식 기업은 빚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기업 규모와 상관없이 하나같이 자기자본비율이 높다. 교세라는 75.1%(1월29일 기준)나 된다. 유동자산이 9천7백억 엔이 넘고 언제든지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자산이 4천6백억 엔이나 된다. 무라타와 롬의 자기자본비율은 각각 83.4%와 86%이다. 무라타와 롬은 3천2백억 엔이 넘는 현금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소규모 벤처기업인 삼코의 자기자본비율도 73%가 넘는다. 니치콘은 30년 무차입 경영으로 유명하다. 최근 자기자본비율이 77.2%나 된다. 

자기자본비율이 높다 보니 자기 돈으로 신규 투자를 벌인다. 경쟁 업체보다 신기술과 신제품 개발에 앞서 나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교토식 기업은 경기 변동에 따라 영업 실적이 주춤하더라도 파산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다. 닌텐도는 ‘생산과 판매가 3년 동안 중단되어도 살 수 있다’라고 장담한다. 무라타는 ‘엔화 환율이 1달러당 40엔까지 내려가도 생존할 수 있다’라고 평가받는다.

▒  경영 최우선 과제는 ‘리스크 분산’

▲ 일에 몰두하고 있는 반도체 장비·소재 제조 업체 삼코의 직원.

교토에서는 한 번 사업에 실패하면 재기하기가 힘들다. 교토 내 기업들은 지역 공동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파산이라도 하면 공동체 전체가 타격을 입는다. 파산 위험을 무릎쓰고 고도 성장을 꾀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기업 경영의 최우선 과제는 리스크 분산이다. 교토식 기업은 기술, 고객, 조직 운영 측면에서 철저하게 리스크를 분산한다.

전기전자 산업에서는 신기술이나 신제품에 대한 수요가 생기기 시작하면 기존 제품은 시장에서 빠르게 철수한다. 고객의 취향이 변하거나 새 시장이 형성되면 최종 제품을 제조하는 업체는 바로 타격을 받는다. 이와 달리 최종 제품 제작에 필요한 요소 기술을 가진 업체에는 경기 변동에 따른 피해가 없다. 새 제품이 나오더라도 요소 기술이나 부품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롬의 사토 겐이치로 사장은 “최종 제품은 시대에 따라 판매량이 변하지만 전자부품은 최종 제품이 무엇이든 간에 사용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교토식 기업은 가급적 최종 제품 시장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교세라가 지난해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업체 산요와 레이저프린터 제조업체 미타를 인수한 것은 예외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텔레비전, 비디오, 휴대전화 같은 최종 제품의 판매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고정 비용이 많이 든다. 그만큼 기업은 리스크에 노출된다.

기술은 철저하게 모듈화한다. 모듈을 조합해 새 부품이나 장치를 공급해 수요 변화에 대응한다. 신제품 개발에 늘 새 방식으로 대응하거나 개별 처리하다 보면 제품 개발 속도가 늦어지고 중복 비용이 발생한다. 모듈화는 작은 단위로 세분화한 여러 가지 조형물을 마련해두고 조합하는 기술 경영 방식이다. 사용 빈도가 높고 가장 기초적인 기능을 제공하는 모듈을 축적하고 개별 모듈을 선택적으로 조합해 시장 변화에 대응한다.

조직도 잘게 쪼개 수익 위주로 운영한다. 교세라의 아메바 경영이나 무라타의 3차원 매트릭스 조직이 이에 해당한다. 교세라는 8~9명 단위로 묶어 독립채산제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한다. 무성 생식하는 아메바처럼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쪼개고 합칠 수 있어 아메바 경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교세라의 창업자 이와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의 발상이다. 무라타는 3천개 매트릭스 단위 조직으로 세분해 조직을 운영한다. 개별 단위 조직은 공정별로 비용을 관리하고 설비 투자의 경제성을 평가한다. 단위 조직 사이에 제품이나 서비스를 거래할 때도 내부 가격을 책정해 단위 조직별로 실적을 평가한다. 옴론은 회사를 5개 컴퍼니로 나누었다. 다테이시 요시오 옴론 사장은 ‘속도와 혁신이라는 벤처기업의 강점과 경영 자원이 풍부한 대기업의 장점을 조합하고자 컴퍼니 제도를 도입했다’라고 밝혔다. 

교토식 기업은 고객도 분산한다. 특정 고객에 의존하는 것을 꺼린다. 가능한 한 많은 고객과 거래하면서 개방적인 관계를 형성하려 애쓴다. 도쿄에 본사를 둔 일본 대기업은 경쟁 업체에 자사 정보가 새는 것을 꺼려 믿을 수 있는 하청 기업과만 거래하려는 성향이 있다. 대기업은 주문 물량이 많고 신용도가 높아 일본 내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하청 기업이 되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교토식 기업은 그 유혹을 뿌리쳤다. 국내외 가리지 않고 고객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다닌다. 도세는 닌텐도와 거래하는 게임 개발업체로는 드물게 닌텐도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다. 국내외 70여 개 업체로부터 게임 개발 의뢰를 받는다. 도세는 오히려 제휴 업체들을 규합해 새 사업 모델을 만들기도 한다. 코플록의 고객은 기업, 연구소, 대학을 비롯해 국내외 6천3백개가 넘는다. 최대 고객이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미미하다. 고지마 히사토시 콜플록 사장이 세운 영업 방침이다. 특정 고객과 거래에서 매출액의 10% 이상이 발생하면 고지마 사장이 직접 관리한다. 고지마 사장은 “경영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특정 거래처에 대한 의존은 피한다”라고 말했다. 

▲ 삼코는 박막성형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특허 기술만 100여 건에 달한다.

▒  일본은 좁다. 세계 시장을 공략하라

교토에는 도쿄와 달리 내수 시장이 없다. 교토 인구는 1백50만명을 넘지 못한다. 도쿄에 본사를 둔 대기업이 교토식 기업 제품을 사지 않으면 내수 판매는 포기해야 한다. 교토식 기업은 도쿄 기업이 쌓은 시장 진입 장벽을 뚫기보다 일찌감치 해외 시장에 눈을 돌렸다. 또, 내수 시장을 기웃거리다가 도쿄에 본사를 둔 대기업의 하청업체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했다. 역사나 문화 측면에서 도쿄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교토인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교토식 기업 다수는 해외 거래처와 거래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은 창업 초기 혼자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인스트루먼트로부터 세라믹축전기 제작 주문을 받아오면서 도약하기 시작했다. 나가모리 시게노부 니혼덴산 사장도 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3M 수주에 성공했다. IBM과의 계약까지 성사되면서 니혼덴산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무라타는 1960년 일본 기업으로는 최초로 모토로라 및 제너럴일렉트릭과 계약에 성공했다. 롬은 1961년 미국 실리콘벨리에 반도체 개발업체를 설립했다. 다케타 잇페이 니치콘 사장은 입사 4년차에 미국 시장 개척에 나서 니치콘을 전해축전지 시장 1위에 올려놓았다. 다케타 사장은 “일본 국내만 상대해서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맞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교토식 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일본 시장을 공략했다. 세계 시장에서 제품 경쟁력을 인정받았으므로 일본 기업들도 교토식 기업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교토식 기업은 전세계 시장을 일본·미국·유럽·아시아로 구분한다. 개별 시장의 실적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비슷하다. 특정 시장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 일본 내 판매 실적이 무라타의 영업이익에 기여하는 비율은 18%를 넘지 않는다. 미국·유럽·아시아 시장 실적이 10% 안팎을 기록한다. 호리바의 매출도 미국 18.1%, 유럽 31%, 아시아 14.4%로 분산되어 있다. 니혼덴산이 지난 1월29일 발표한 2008년 회계연도 실적 보고서에 따르면, 해외 영업 실적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68.7%나 되었다. 일본 국내 시장 매출은 31.3%에 불과했다. 

▒  잘할 수 있는 곳에 집중하라

교토식 기업은 자신 있는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제품 경쟁력을 갖추려 한다. 경쟁 업체보다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으면 미련을 두지 않는다. 신규 사업에 진출할 때에도 이미 보유하고 있는 세계 최고의 기술에 기초한다. 기존 기술을 조합하거나 확장하는 수준에서 진입할 수 있으면 신규 시장 진출을 고려한다. 일단 시장에 진입하면 경쟁 업체를 압도한다. 기술, 제품 경쟁력, 연구·개발, 시장 점유율 면에서 경쟁 업체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다 보니 교토식 기업은 핵심 부품의 표준을 정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설정한 표준은 경쟁 우위 요소로 작용해 교토식 기업의 시장 지위를 강화한다. 

무라타는 세라믹필터 시장 80%와 세라믹 축전지 시장 50%를 장악하고 있다. 무라타가 제품 출하를 중단하면 전세계 컴퓨터 70%가 멈춘다. 니혼덴산은 하드드라이브 스핀들모터, 초정밀 모터, 팬용 모터 부문 시장 세계 1위이다. 스핀들모터 시장 점유율은 70%나 된다.

니혼덴산이 공장 가동을 멈추면 전세계 휴대전화 10억대의 조립이 중단된다. 롬은 플로피디스크용 주문형 대규모 집적회로(LSI) 시장 67%를 차지한다. 호리바는 엔진 배기가스 계측기 시장 80%를 장악하고 있다. 전세계 공장은 교토식 기업이 납품한 자동화 설비로 교토식 기업이 생산한 부품을 조립해 최종 제품을 완성하고 있다. 

▒  잘나갈 때 다음을 준비하라 

▲ 교토의 역사. 일본 문화유산의 보고라고 일컬어지는 교토는 경제의 노른자위이기도 하다. ⓒ일본관광청

교세라는 친환경 에너지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일찌감치 태양 에너지 발전 시장에 진입했다. 마코토 카와무라 교세라 사장은 지난 3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엄혹한 경제 환경에서도 대체 에너지 자원으로 수요가 늘고 있는 태양 에너지 발전 사업에 주력해 주문을 늘리겠다”라고 말했다.

무라타도 2015년 매출액 1조 엔 돌파를 목표로 삼고 에너지·전력·바이오·환경 시장에 주목하고 있다. 화석 연료 의존도가 줄면서 연료전지와 변환장치 수요가 늘어나는 점에 착안해 그에 맞게 제품 전략을 조정하고 있다. 오염원을 탐지하는 환경 보호 기술을 개발하는가 하면 바이오테크놀로지까지 넘보고 있다. 호리바는 태양전지 제조 장비에 들어가는 매스플로우 제어기를 생산하고 있다. 교토식 기업은 연구·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산업 판도를 바꿀 기술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보다 차세대 기술을 앞서 개발해 미래 기술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뜻이 깔려 있다.

사사 히로시 씨(28)는 도요타 시로 유명한 아이치 출신으로 교토식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교토로 이사했다. 그는 “교토인은 일본인답지 않다”라고 말했다. 교토식 기업인은 주변과 조화를 꾀하기보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조직 구성원 전체가 개인 비전을 회사 발전에 연동시킨다. 혁신과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는다. 그러다 보니 사원들은 활력이 넘치고, 고된 업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지금까지 거둔 성취는 교토식 기업인의 자신감으로 표출된다. 자신감은 전세계 어느 기업과도 협력하거나 경쟁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사사 씨는 “교토식 기업이 자랑하는 기술력과 경쟁력의 비밀은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교토인의 개성에 숨겨져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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