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흐름을 바꾸다
  • 한상봉 (가톨릭 언론 <지금 거기> 편집장) ()
  • 승인 2009.02.24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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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김수환 추기경 발자취 주교단 이끌며 정의·인권 위해 헌신

ⓒ평화방송

 1951년 9월15일, 이날 나는 주님의 부르심에서 ‘세상에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겠노라’라고 결정적인 대답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역사의 한복판에서 사제가 되면서 ‘세상에서는 죽겠노라’라고 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겠노라’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곧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세상 속에서 살아갈 것을 예감했다. 예수 역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유대 땅에서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기쁜 소식’(복음)을 선포했으며, 그 결과 로마와 유다의 지배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믿었던 예수는 세상 속에 살되,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함으로써 죽어서도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이었다.

1922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수환 추기경은 일제 식민지와 광복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역사 현실 한가운데서 자신의 사명을 찾아가야 했다. 이런 그에게 결정적인 사상적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사제 서품 이후 떠난 1956년 독일 유학이었다. 그는 뮌스터 대학에서 1963년까지 회프너 추기경에게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배웠다. 이 시기는 가톨릭교회가 커다란 변혁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1958년에 요한 23세 교황이 즉위하고, 이듬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요한 23세는 파시즘에 동조한 혐의를 받았던 비오 12세 교황의 그늘에서 벗어나 세상 안에서 봉사할 의무가 있는 ‘교회의 쇄신’을 촉구했다. 교황은 ‘어머니와 교사’라는 회칙을 통해 권위로 세상을 가르치는 것보다 가련한 인생들을 어머니처럼 품어내는 자비를 강조했다.  

귀국 후, 가톨릭시보사 사장을 맡았을 때는 이미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년)가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그는 시시각각 들어오는 공의회 소식을 접할 수 있었고, 봉건적 사고방식과 틀에서 벗어나려는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한국 교회에 전달할 수 있었다. 교회는 권력의 위계가 아니라 봉사의 수단이며, 인간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는 것,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함으로써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공의회가 끝나는 시점을 따라서 1966년에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그가 1968년 서울대교구장이 되고 1969년 추기경에 임명된 것은 한국 교회의 전격적인 세대 교체를 의미했다.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교회의 관심을 소외층에게 머무르게 인도

광복 이후 줄곧 한국 교회의 수장이었던 노기남 대주교는 친일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미 군정을 전후해 교회의 정치 세력화에 몰두해 ‘정치 주교’라는 딱지가 붙어 있던 인물이었다. 노기남 대주교로 상징되는 이 당시 교회 지도층은 극렬한 반공주의와 내세 지향적 신앙이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정치 권력의 획득을 통해 교회의 안위를 보장받고자 했다. 그 결실 중 하나로서 장면 총리를 정점으로 하는 민주당 정권이 군사 정권으로 대체되면서, 끝 모를 소강 상태에 빠져 있던 한국 교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으로 상징되는 젊은 세대의 등장은 바티칸공의회만큼이나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그 역사의 전면에서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두봉·윤공희 주교 등 새로운 이름을 한국 역사 안에서 의미 있게 새기게 된다. 이들은 이후 주교단에서 줄곧 소수였지만, 세계 교회와 한국 사회의 절박한 요구를 받아들였으며, 무엇보다 추기경이 함께함으로써 힘을 받을 수 있었다. ‘군사 정권 아래서’ 서울대교구장이 된 김수환 추기경은 <가톨릭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 매스컴이나 사회의 관심은 한 개인에 대한 기대라기보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기대였다”라고 말했으며, “어려운 고비 때마다 ‘교회만은’ 하는 바람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고 응답했다. 그가 교구장 착좌시 내세운 사목 표어가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관심이 단순히 신자들뿐 아니라 고통받고 신음하고 소외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머무를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히 한국 교회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그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1968년에 이미 중남미 주교회의는 메델린에서 “민중을 불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양심의 의무이다”라고 천명했으며, “세계 평화를 위해 결정적으로 현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민중의 교회로 가는 길을 선택한 중남미 주교회의의 결정은 중남미에 만연한 군사 독재 정권 지배라는 상황에서 나왔으며, 동일한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 교회에 적극적으로 소개되었다. 1969년은 박정희 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강행하고, 유신 체제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이끄는 천주교 주교단은 위수령과 휴업령 그리고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상황에서 1972년을 ‘정의 평화의 해’로 선포하고, 주교회의 안에 ‘사회정의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김수환 추기경을 추대했다. 이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1971년 성탄절 메시지를 통해 “이 법은 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국민의 양심적인 외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라고 물으며 ‘국가 보위에 관한 특례조치법’의 반민주적 성격에  대해 비판했다. 

유신 정권과 교회의 대립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이다. 원주교구장인 지학순 주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으며, 지주교는 ‘양심선언’을 통해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월17일에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선언해 다시 감옥에 갇혔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등장한 것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다.

무력한 이들에 대한 연민 깊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당시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이 “첫째 우리 교회가 서 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지상의 여기, 이곳의 현실 한가운데라는 것, 둘째 우리가 현실로부터 초연해지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올바르지도 않거니와 현실이 우리를 초연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는 것, 셋째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바로 여기 이곳의 현실 속에서만 비로소 그 참된 의미를 가지며 소망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1993년 지학순 주교가 선종했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장례 미사에서, “지학순 주교가 유신 독재에 항거한 동기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또 “이분은 고통받는 이가 누구이든지, 신자·비신자 관계없이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며, 특히 가난과 고통이 본인의 탓이라기보다 억압 정치와 구조악에서 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에 대한 지주교의 의분은 불과 같았고, 정의를 위해 개혁을 위해 결연히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곧 김수환 추기경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이후 행보는 무력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연민의 시선과 함께했으며, 그 연민은 때로는 정치적 항거로, 사회적 관심으로,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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