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 30조, 먹힐까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9.03.10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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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대…규모 및 사용처 놓고 전문가 의견 분분

▲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이 3월5일 서울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한국은행은 지난해 9월부터 22조원을 시중 은행에 쏟아부었다. 은행을 거쳐 기업과 가계에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동성 경색 현상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은행들은 신용도가 높거나 담보가 충분한 소수 고객만 골라 ‘선별 대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중 유동성 부족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금융 정책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정부·여당은 재정정책 위주로 경기 부양책 기조를 바꾸고 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추가 경정 예산, 이른바 ‘슈퍼 추경’을 편성해 정부가 기업과 가계에 유동성을 직접 공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여은정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추진되고 있는 추가 경정 예산안은 은행 대신 정부가 직접 기업에 신용을 공급하고 보증을 확대해 신용 경색을 완화하려 하는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번 추경 예산으로 영세민이나 중소기업 등 그동안 소외되었던 계층이 대거 혜택을 볼 것으로 예상된다. 신용 경색 현상도 나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 86.9% “추경 예산 편성 필요하다”…재정 적자 확대 우려도

정부·여당 안팎에서 거론되는 추경 예산은 규모와 사용처 측면에서 파격적이다.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예산 규모는 30조원 안팎으로 예상되고 있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편성된 13조9천억원의 두 배이다. 정부는 추경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린다. 최용호 예산실 예산총괄과 사무관은 “추경 액수나 사용처에 대해 아직까지 결정된 것이 없다. 부처별로 논의하고 있는 단계라 최종 결론은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미 정부가 30조원 수준에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고 있다. 류근찬 자유선진당 정책위의장은 지난 3월5일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나라당과 정부가 당정 협의를 거쳐 추경과 관련한 규모와 내용을 협의할 예정이다. 우리가 확보한 자료를 보면 전체적으로 30조원 수준으로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전문가 사이에 추경 예산의 필요성에 대한 이견은 없다. 미디어법 통과를 놓고 첨예한 대치를 보였던 여야는 추경 예산의 도입을 수긍하는 눈치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 3월4일 대학 교수, 경제연구소 관계자, 기업 최고경영자 등 경제 전문가 1백3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정부의 재정 지출 확대 방향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이 이번 설문의 골자이다. 응답자 86.9%가 추경 편성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추경을 편성할 필요가 없다’라는 응답은 13.1%에 그쳤다. 추경 편성 시기에 대해서도 84.6%가 ‘상반기’라고 응답했다.

강민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금융시장 위축과 침체된 민간 소비 및 투자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유효 수요 창출이 시급하다”라고 말했다. 올해 본 예산은 성장률을 4%로 가정해 편성했다. 마이너스 성장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올해 본 예산 규모는 적합하지 않다.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은 올해 성장률을 -2%로 수정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4%로 하향 조정했다. 강민우 수석연구원은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 채무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성장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50조7천억원의 추가 지출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슈퍼 추경’으로 늘어난 재정 지출 규모는 국내총생산의 34.1%에 불과하다. 올해 경제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두 번째로 낮다. 국가 채무는 외환위기 이래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41.2%에 불과하다. 경제개발기구 회원국의 국가 채무 평균이 82.5%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의 국가 채무 수준은 낮은 편이다. 강수석연구원은 “추가 경정 예산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한다. 우선적으로 신용 경색 완화를 추진하면서 단기 경기 부양과 장기 성장 잠재력 확충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수석연구원은 “단기 부양을 위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일자리 창출, 저소득층 지원을 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성장 잠재력 확충에 필요한 그린 에너지 산업 등 첨단 산업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최근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국내총생산 5%에 해당하는 50조원의 추가 재정 적자는 감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추경 재원도 증세보다는 국채 발행으로 충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윤교수는 “최근 안전 자산에 대한 민간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우선 민간에 국채를 매각한 뒤, 나머지 물량을 은행이나 연기금이 소화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과다한 추경 예산으로 인한 재정 적자 확대를 우려한다. 슈퍼 추경을 제안한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한구 한나라당 예결특위원장은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서 “추경 예산은 단기 침체에 대한 대책으로 현재 상황과는 맞지 않다. 재정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돈을 풀어야 한다는 접근은 무책임한 자세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추경 예산은 미래 성장 산업이나 2개 이상의 산업을 접목한 융합 산업 등 파급 효과가 큰 곳에 투입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건설·조선·금융 산업의 경우 현재 상당수 거품이 낀 상태이다. 추가 자금을 투입해도 경기 부양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한구 위원장은 “국내총생산을 끌어올릴 수 있는 곳 위주로 선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단기적 경기 부양과 장기적 성장 잠재력 확충 병행해야

고영선 KDI 재정사회개발연구부장은 “한꺼번에 거액을 쏟아부었다가 경기 침체가 정기화될 경우 재정 건전성에 부담이 될 수 있다. 무조건 풀기보다는 지원이 필요한 곳을 선별해서 선택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미 채권시장은 정부의 슈퍼 추경 편성을 앞두고 조용한 랠리를 거듭하고 있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지난 2월 국고채 3년 금리가 0.23% 포인트 상승했다.

국채 장외 거래량 또한 전월 대비 27% 증가한 1백60조9천억원을 기록했다. 지난 2005년 1월 이후 최대치이다. 성인모 한국금융투자협회 채권부 부장은 “추경에 따른 국고채 발행 물량 증가 우려와 원·달러 환율 상승 영향으로 국채 중심의 단기 트레이딩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변동성이 심한 장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정부·여당은 ‘슈퍼 추경’에 대한 여론의 향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경기 부양을 위해서는 추경 규모가 클수록 유리하지만 자칫 예산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거나 사용처의 우선순위가 적절하지 않다는 여론이 불거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도 지난 3월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서 “추경은 소요 측면에서 보면 규모가 클수록 좋지만 너무 크면 재정 건전성을 위협하므로 적절한 조화점을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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