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의 ‘큰손’ 후원금도 ‘문어발’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9.04.0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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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차, 친인척·회사 직원 통해 여야 가리지 않고 후원

▲ 허태열 한나라당 의원(왼쪽)이 박연차 회장의 지인 등 4명으로부터 모두 2천만원의 후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시사저널 유장훈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은 철저히 ‘숨은 손’을 자처했다. 권력 뒤의 음지에서 정치권과 사정기관에 엄청난 거액을 뿌려댔다. 그는 양지에서는 결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웠다.

박회장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 집중적으로 거액의 정치 후원금을 기부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현 정부 들어 박회장은 확실히 몸을 사렸다.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정치 후원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회장 대신에 ‘분신’격인 정승영 정산개발 대표와 박영석 태광엠티씨 대표가 나섰다. 정대표와 박대표는 자신과 친인척, 휴켐스 직원들 및 박회장 지인들과 함께 지난 한 해 동안 여야 의원 7명에게 총 8천만원의 기부금을 낸 사실이 <시사저널> 취재 결과 확인되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3월26일 공개한 ‘2008년 국회의원 후원금 3백만원 초과 고액 기부자’ 명단을 면밀히 분석한 끝에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신분 드러내지 않고 거액 뿌려

정승영 대표는 지난해 3월28일 민주당의 김우남 의원(제주 을)에게 5백만원, 또 3월31일 한나라당의 김정권 의원(경남 김해 갑)에게 역시 5백만원 등, 총 1천만원을 기부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대표의 친동생인 정 아무개씨도 역시 한나라당 안홍준 의원(경남 마산 을)과 김정권 의원에게 3월28일과 31일 각각 5백만원씩을 기부했다. <시사저널>은 제1001호(2008년 12월30일자 ‘박연차의 자금 관리인이 여야 의원 3명 후원했다’)에서 이같은 사실을 단독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를 추가로 확인한 결과, ‘숨은 1인치’는 또 있었다. 단순히 기부자의 명단만 보아서는 도저히 박회장과 관련이 있는 인사라고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의 일반 인사를 동원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8건이나 더 발견되었다.

박영석 대표는 4월7일 한나라당의 허태열 의원(부산 북·강서 을)에게 5백만원을 기부한 한 것으로 드러났다. 허의원의 후원자 명단에는 박대표 외에도 의심이 가는 인사가 세 명 더 있었다. 이들은 4월7일 박대표와 나란히 각각 5백만원씩을 기부했다. 김 아무개씨는 김해시 골프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박회장과 박대표는 이 협회의 고문으로 있다. 김씨는 “심부름 한 번 한 것 가지고 자꾸 힘들게 하지 말라”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부산에서 사업을 하는 서 아무개씨는 “10년 넘게 사업을 하면서 박대표 등과 잘 안다”라면서도 ‘박대표 부탁으로 (허의원에게) 후원한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대답하기 곤란하다”라고 답했다. 같은 날 역시 5백만원을 기부한 노 아무개씨는 정승영 대표의 친인척으로 의심된다. 그는 기자의 확인 질문에 “대답하기 싫다”라고 말했다. 박대표와 그 지인 등 4명이 허의원에게 총 2천만원을 동시에 기부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순간이다.

휴켐스 직원 세 명, 동시에 두 의원에게 5백만원 기부

이에 대해서 허의원은 “박대표와는 부산고 동문이고, 10년 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혀 만난 적이 없다. 박회장과 상관없이 냈다고 들었다. 그 사람이 자의적으로 낸 후원금을 갖고 내가 ‘왜 냈느냐’고 따질 수는 없지 않나”라고 해명했다.

휴켐스 직원인 박 아무개씨는 민주당 우윤근 의원(전남 광양)과 이강래 의원(전북 남원·순창)에게 3월28일 각각 5백만원씩을 기부했다. 같은 회사 직원인 임 아무개씨는 민주당 서갑원 의원(전남 순천)과 우의원에게 3월28일 각각 5백만원씩을 기부했다. 역시 휴켐스 직원인 최 아무개씨는 3월28일 민주당의 서의원과 이의원에게 각각 5백만원씩을 기부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또 다른 노 아무개씨는 정승영 대표가 후원금을 낸 날에 민주당의 김우남 의원에게도 똑같이 5백만원을 기부해서 눈길을 끌었다. 노씨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개인적으로는 김의원을 잘 모른다. 집안 어른이 정치에 관심이 많으셔서 후원하게 되었다. 정대표와는 친인척지간이다”라고 밝혔다.

문제는 이들의 경우 거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 회사 일반 직원이거나 친인척지간이라는 점이다. 그냥 공개된 자료 내용만 보아서는 전혀 구분하기 어렵다. 이들의 경우는 명단 자료를 유심히 검토하던 중에 다소 의심이 드는 인사들에게 전화로 확인한 결과 그 신분이 밝혀진 것이다.

특히 휴켐스 직원 세 명은 동시에 두 명의 의원에게 각각 5백만원씩을 기부하고 있다. 직업란에 ‘회사원’으로 기재되어 있는 일반 직원이 하루에 1천만원이라는 거액을 정치인에게 선뜻 기부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특히 이들 중에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 한 정황도 드러났다.

최씨는 서의원 기부자 명단에는 ‘회사원’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이의원 기부자 명단에는 ‘변호사’로 나와 있었다. 이에 대해 최씨는 “잘못 기재한 것 같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변호사로 잘못 기재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회사원의 신분으로 어떻게 한꺼번에 1천만원이나 기부할 수 있었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즉답을 피했다. 박씨 역시 우의원 기부자 명단과 이의원 기부자 명단에 표기한 생년월일이 각각 달랐다. 하지만 모두 동일 인물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 박연차 회장의 측근 및 직원, 지인들에게 후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김정권·안홍준·김우남·서갑원·이강래·우윤근 의원(왼쪽 위에서부터 시계 방향). ⓒ(왼쪽부터 시계방향) 시사저널자료, 시사저널 임영무, 시사저널 이종현, 시사저널 유장훈, 시사저널 이종현, 시사저널 이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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