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문명의 ‘기둥’을 흔드나
  • 조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09.05.1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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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가지 중심 사상의 붕괴에 직면한 서구 사회의 미래와 전망

서구 문명은 역사상 어느 문명보다도 번성했다. 지구촌 많은 사람이 이 문명의 혜택을 받았고, 그 문명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서구 문명의 태생지에서는 이 문명이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

영국의 기업가이자 <80/20법칙> 등을 펴내며 경제·경영 분야 저자로 이름을 날린 리처드 코치와 영국 하원의원·문화언론체육부장관을 지낸 크리스 스미스가, 2천년을 이어온 서구의 문명과 가치관이 과연 미래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혹은 아예 존재 자체가 멸망할지에 대해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했다. 

저자는 서구 문명의 주요한 가치관으로 크리스트교, 낙관주의, 과학, 성장, 자유주의 그리고 개인주의를 꼽았다. 이 여섯 가지 가치관이 맞물려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전세계 역사를 끌어왔는데, 머지않아 “서구 사회가 생태적으로 자멸하거나” 아니면 “여섯 가지 서구 가치관을 핵심으로 하지 않는 또 다른 문명으로 변형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서구는 지리적으로 유럽과 북아메리카, 호주와 뉴질랜드이다. 유럽 문명을 뿌리로 한 국가들로 동유럽도 포함되나 주로 의미하는 서구는 서유럽과 미국이다. 자멸은 내부적인 요인으로, 스스로 멸망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지난 세기부터 싹트기 시작해 최근 20∼30년 사이 뚜렷해진 서구 사회의 부정적 경향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서구 사회는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내부 분열과 결함 드러나면서 자신감 상실

▲ 그린피스 대원이 프랑스 파리 자유의 여신상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현재의 서구 사람들이 이전 세대보다 못해서가 아니다. 도덕적인 행동이 쇠퇴하기는커녕 오히려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소수 집단이나 여성에 대한 차별은 줄었고, 빈민에 대한 원조는 늘었다. 아동과 동물에 대한 학대도 줄었고, 환경에 대한 관심은 늘었다. 인종차별과 민족주의는 줄었고, 자선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늘었다.

그러나 그 모든 성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서구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다. 저자는 “진정한 위협은 내부의 분열과 결함이다. 서구를 특별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 요소를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냉소와 비관론, 무심함이 가득할 뿐이다. 이대로라면 집단적인 자멸은 불 보듯 빤한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한 여섯 가지 중심 사상의 붕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은 죽었다’라는 사상이 출현하는 등 크리스트교 내의 분열은 오늘날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분열의 축도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서구의 특징으로 두드러졌던 낙관주의는 비관주의로 변했고, 신과 인간의 박애가 이루는 조화를 파괴했다. 또한, 인간의 자율성과 선 그리고 서구 문명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일련의 사회적 격변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 인해 깨져버렸다. 셋째, 서구 문명이 다른 문명들보다 훨씬 우위에 있게 만들어주었던 ‘과학의 성공’은 오늘날 부정적 영향을 안겨주고 있다. 환경오염뿐만 아니라 온실 효과와 오존층 파괴로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으며, 핵무기와 생화학무기를 확산시켰다. 넷째, 약 2백년 전부터 급속도로 성장했던 서구의 경제는 안전한 삶을 보장하며 인구를 늘리고 생활 수준도 크게 향상시켰지만, 최근의 금융 위기에서 보았듯이 지구에 막대한 손상을 초래하고 있기도 하다. 다섯째, 서구 사회를 구성해온 자유주의 원칙과 제도는 서구 시민들로부터도 과거에 비해 훨씬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계급사회에 종말을 안겼던 서구의 중심적 특징인 개인주의가 개인적 성공에 대한 피해의식과 냉소주의로 귀결되고 있다.

서구 문명은 많은 것을 소망했고 많은 것을 이룩했다. 그러나 서구 문명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저자는 걸어가기가 좀더 쉬운 한쪽 길을 따라 내려가면 냉소주의와 지독한 이기주의, 무관심, 권력의 재집중, 공격성 등이 놓여 있다고 말했다. 이 길은 무정부주의에서부터 신파시즘, 환경 파괴, 미국이라는 새로운 제국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를 보이는데, 모두 서구 문명을 종말로 인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저자는 다른 한쪽 길을 따라 내려가면 용기의 회복, 이성, 연민, 평등 등 스스로 발견하고 인정한 속성들로 한데 뭉친 사회와 문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면서 혁신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서구 문명이 “언젠가 때가 되면 모든 인류를 매혹시킬 만한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충분히 인도적이고 풍요로운 문명을 창조”하게 되기를 기대했다.

이 책은 저자가 서구 중심주의나 서구인으로서 보수적 태도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는지, ‘자멸’을 논하면서도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부각시키는 듯한 혐의가 짙다. 하지만 전체 인류를 위해 새로운 신념과 새로운 행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비서구적’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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