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너무 순수해서 눈부셨다
  • 방귀희 (솟대문학 발행인)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09.05.19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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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희 <솟대문학> 발행인의 ‘장영희 회고’ / 장애인 문학인으로서 나의 중요한 ‘역할 모델’

▲ 고 장영희 교수의 영정 앞에서 슬퍼하고 있는 장교수의 첫째 여동생. ⓒ시사저널 임준선

요즘 우울증에 빠졌다. 나도 꼭 죽을 것만 같다. 등줄기가 뻑적지근하면서 허리가 쑤신다. 고 장영희 교수가 떠난 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동일시라고 한다. 마치 나를 장영희라는 인물인 양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장영희를 동일시하는 것은 그만큼 그녀를 닮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은 역할 모델이 있는데 나의 역할 모델은 장영희이다.

우선 우리는 같은 세대를 산 여성이고 장애인이다. 게다가 문학이라는 공통 과제를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절대로 앞지를 수 없다. 그녀는 너무나도 완벽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집안, 학벌, 사회적 인지도, 미모, 성격 등 뭐 하나 빠질 것이 없다. 사람들 눈에는 그녀의 장애가 커다랗게 보일지 몰라도 내 눈에는 그녀의 장애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면으로만 접하던 장영희 교수와 처음으로 접속을 한 것은 방송 출연을 섭외하기 위해서였다. 10여 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전화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차가웠다. 첫 섭외는 실패했다. 거절 이유는 강의 때문이라고 했는데 강의를 우선순위에 두는 그녀에게 신뢰심이 생겼다.

장영희 교수는 장애인계에서 모시고 싶은 인물 1위이다. 위원장이 되어달라, 이사가 되어달라, 심지어 단체장으로 추대를 하겠다고 해도 모두 거절을 했다. 그런 거절에 오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장애인이라고 해서 장애인계에서 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비장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워 이기는 것이 장애인들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 문제를 문학적으로 표현해서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나도 그녀의 명성으로 도움을 받고 싶어 <솟대문학>에 참여해줄 것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보내준 <솟대문학>은 잘 받았어요.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지만 관심은 갖고 있을게요. 그런데 문학에 왜 장애인, 비장애인 구분이 필요해요?”

난 그녀에게 장애인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완곡하게 설명을 했다. 그녀도 내 말에 동감을 하는 듯했다. 그녀는 연신 “아, 그래요?” 하면서 장애 문인의 현실에 안타까워했다.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안식년이라 곧 미국에 가요.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요.” 이렇게 해서 그녀와의 1막은 끝이 났다.

의연한 그 모습 너무도 커 보여

▲ 추도사를 읽는 장교수의 제자들. ⓒ시사저널 임준선

장교수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신문에서였다. 그녀가 집필하고 있던 고정란에서 장영희는 절필을 선언했다. 유방암 때문에 연재를 잠시 쉬어야겠다는 내용인데, 그녀는 무서운 암 진단을 마치 휴가증을 받은 듯이 가볍게 생각했다. 나 같으면 인생 다 끝났다고 모든 것을 포기했을 텐데 장영희는 역시 달랐다. 너무나도 의연했다. 그녀가 정말 커 보였다.

장영희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삶에 의욕을 보였다. KBS 3라디오에 장영희 칼럼을 부탁했을 때 흔쾌히 응해주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내용인데 그녀의 칼럼은 사람들의 정곡을 찌르면서도 날카롭지 않은 호소력이 있었다. 내용이 너무 좋다고 하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교수님은 스타세요. 방송에 자주 나오시니까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죠?”

“아유, 스타는 무슨 스타. 장애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어서 방송국에서 전화 오면 요즘은 거절하지 않아요.”

목발을 짚고 오느라고 콧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면서 수줍어했다. 나는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장애를 갖고 사회 명사가 되어서 주류 사회에서 장애인을 대변해주고 있는 그녀가 있어 든든했다.

또다시 찾아온 척추암에 대해 말할 때도 그녀는 담담했다. “내가 좀 둔한가 봐. 허리가 그렇게 아파도 장애 때문에 허리에 무리가 갔나 보다 하고 그냥 참았지 뭐야.” 나는 온갖 신이란 신을 다 원망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녀는 자기가 둔하다고 자기 탓을 했다.

투병을 하면서도 그녀는 더 넓고 더 깊은 인간미를 발산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암과 싸우고 있는 장영희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KBS에서 가장 잘나가는 한석준 아나운서가 어느 날 내게 물었다. “방작가님, 장영희 교수 아시죠? 어제 그분 책을 읽었는데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했어요. 꼭 한 번 만나뵙고 싶어요” 하면서 책에서 읽었던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한석준 아나운서가 교수님 팬이래요. 한 번 뵙고 싶데요. 한석준 아나운서, 굉장히 잘생겼어요.”

전화였지만 그녀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잘생긴 것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하면서 몹시 쑥스러워했다. 그녀는 정말 무공해 여성이었다. 너무나 순수해서 눈이 부셨다.

내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전화를 한 것은 지난해 1월이었다. <솟대문학> 행사에 초대를 하고 싶어서 건 전화였다. 그녀 목소리가 경쾌했다. 나는 일부러 건강에 대한 안부를 묻지 않았다. 암이란 사실 자체를 마치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요. 내가 꼭 한 번은 가보려고 했었는데, 어쩌죠? 지금 투약 중이어서 외출이 금지됐어요. 미안해요. 다음 <솟대문학> 행사 때 꼭 갈게요. 장애인 분들이 문학을 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인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정말 장해요. 방귀희씨.”

그녀가 처음으로 내게 칭찬을 해주었다. 그 말이 어찌나 고맙던지 순간 코끝이 찡해왔다.

그녀가 다시 활동을 시작하기를 기대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녀가 세 번째로 찾아온 암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부고 소식을 인터넷 검색을 하다 발견한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이 많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언젠가는 장영희 교수와 손을 잡고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해보리라는 꿈이 깨지고 말았다.

나의 짝사랑은 이렇게 슬프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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