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전도사’장영희의 남겨진 꿈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9.05.19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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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으로서 암 투병을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채 활발하게 후학들을 가르치고 집필 활동을 해온 장영희 교수. 그녀는 꿈을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낼 ‘찬란한 유산'을 남겼다

ⓒ시사저널 박은숙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앤 여왕이 부정의 누명을 쓰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은 “5월이군요”였다. 햇볕이 너무 밝아서, 바람이 너무 향기로워서, 나뭇잎이 너무 푸르러서, 꽃이 너무 흐드러져서, 그래서 세상살이가 더욱 암울하고 버겁게 느껴지는 이 아름다운 5월. 새삼 내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며, 본능으로 사는 벌레가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의 ‘변신’을 꿈꾸어 본다.’(2004년 5월 조선일보 칼럼 중에서)

고(故) 장영희 교수는 그렇게 5년 후 자신의 모습을 예견했다. 이 아름다운 5월에 장교수는 기어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고단한 57년의 작업을 마무리하고 이제야 그녀는 진정한 휴식을 얻은 셈이다.

1952년 생으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소아마비로 두 다리와 오른쪽 팔에 마비가 왔고, 그로 인해 평생을 목발에 의지해야 했다. 이 땅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혹한 일인지 알면서도, 장교수는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았다. “두 다리가 불편했기에 오히려 나는 책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라며 좋아했고, “남보다 느리게 걷기에 슬라이드 필름처럼 더 많은 세상이 보였다”라며 현재의 삶에 만족할 줄 알았다. 장애인 문학지 <솟대문학>의 발행인인 방귀희 작가는 “그는 이 땅을 살아가는 장애인들에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희망이었다”라고 말한다.

2001년 덜컥 유방암 선고를 받았다. 수술 끝에 다행히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확률이 10%도 안 된다던 척추로의 전이가 왔다. 2004년 다시 척추암 선고를 받았다. 당시 장명수 한국일보 고문이 “하나님, 정말 너무 하시네요”라고 외쳤던 원망은 주변의 안타까움을 절절히 대변해준다. 하지만 정작 장교수 자신은 “난 참 바보같이 그런 것도 몰랐다”라고 조용히 미소지었다.

2005년 3월 그토록 사랑했던 대학 강단에 다시 복귀했다. 많은 이가 “역시 희망의 메신저”라고 경탄했다. 하지만 장교수의 몸은 이때부터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장교수라고 그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다만, 그는 일로써 암과 싸워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장교수는 무서운 속도로 일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그런 장교수를 보며 ‘안심’을 얻었지만, 그 자신은  그다지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스스로 절감하고는 마음이 급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장교수의 서강대 동료 교수이자 오랜 신앙 친구인 류해욱 신부는 가족 외에는 유일하게 장교수의 마지막을 함께한 지인이었다.

“5월4일이었다. 일 때문에 지방에 있는데, 어머님(장교수의 모친)이 급하게 나를 찾으셨다. 곧바로 서울 마포구 연남동 집으로 달려갔는데, 상황이 심각했다. 어머니가 굉장히 강한 분이신데, 그분이 그렇게 우시는 걸 처음 봤다. 나를 보시더니 딱 두 마디 하시더라. ‘신부님, 이제 어떻게 하죠?’. 그리고 한참 있으시다가 ‘뾰족한 수가 없네요’라고. 누워 있는 장교수를 봤다. 이미 말씀은 하실 수가 없는 상태였지만, 그 눈빛으로 나에게 인사를 했다. 천주교에 ‘병자성사’라는 게 있다. 솔직히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편안히 하느님 곁으로 가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갑작스러운 죽음만큼이나 장교수의 마지막을 전하는 일부 언론 보도 역시 다소 혼선이 빚어졌다. 류신부와 유족측은 이를 정확히 바로잡고 싶어 했다.

어머니와의 여행·소설 집필 등 계획

▲ 2005년 5월 서울 교보문고에서 독자 사인회 행사에 참석한 고 장영희 교수(맨 오른쪽). ⓒ뉴시스

류신부는 “장교수가 어느 정도 운명을 예감하고 담담히 준비한 것은 영면하기 두 달 전부터였다. 그때부터 장교수는 책(<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마지막 교정 작업에 주력하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e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라고 밝혔다.

장교수는 제자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평소 “내 장례식장이 제자들로 넘쳐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류신부와 자신의 장례 미사에 대해 의논을 하면서도 양해를 구했다. “친구도 좋지만 이왕이면 제자가 해줬으면 한다”라는 바람이었다. 장교수의 제자 가운데 신부가 된 이가 2명이 있었다. 하지만 때마침 그 두 제자들은 모두 영국 유학 중이었다. 류신부는 “내가 하겠다”라고 했다.

장교수는 “너무 형식적, 겉치레식으로 되는 장례식은 싫다”라며 사랑했던 한 제자에게 e메일로 그런 뜻을 알렸다. 조사를 이 제자에게 부탁한 것이다. 운구 또한 제자들이 들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장교수는 하나하나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함께 암 투병을 하며 친언니처럼 의지하던 화가 김점선씨가 3월22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유가족측은 “언니처럼 따랐던 김화백이 가셨다는 소식을 접하자 삶의 집념을 놓지 않았던 언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라고 전했다. 3월30일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마지막 원고를 넘기고 그녀는 급격히 기력을 잃었다. 병원에 입원했다. 그렇게 3월은 가고 4월이 오고 있었다.

장교수에게 4월은 역시 잔인했다.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속에서도 그녀는 병상에서 마지막 원고 교정 작업을 다 했다. 이때부터는 주변과의 연락도 끊기 시작했다. 초인적인 힘으로 책 교정 작업을 마치던 날, 그녀는 새로운 작업을 위해 다시 노트북을 꺼내들었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라는 그 애절한 편지는 그렇게 이 세상에 남겨졌다. “원래는 어머니부터 형제·조카들까지 가족 모두에게 메시지를 남기려고 무던히 애썼다. 하지만 정신이 너무 혼미해져서 쓰다 쉬다를 한없이 반복하다가 어머니께 네 줄, 언니에게 한 줄 남기고는 끝내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라고 유족은 울먹였다. 

▲ 장교수의 장례 미사가 5월13일 서강대 성이냐시오 성당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유가족인 오빠 장병우씨(오른쪽)가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장교수가 끝내 이루지 못한 소원 중의 하나가 어머니 이길자씨(83)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다. 그녀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업어서 학교에 등·하교를 시키고, 행여 화장실이 불편할까 두 시간에 한 번씩 학교를 들락거리면서 마음을 졸였던 어머니이다. 장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기동력 없는 딸이 발붙일 한 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 걸고 ‘운명에 반항’하여 싸운 분”이었다.

어쩌면 4월 말 병원에서 나와 연남동 어머니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냈던 그 마지막 열흘은 장교수가 간절히 원했던 가족과 보내는 마지막 여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빠 장병우씨는 “동생은 퇴원한 뒤 평소 사랑했던 형제·조카들과 함께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었다. 이후 반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다”라고 전했다. 유가족이 전하는 대로 장교수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은 5월3일의 짧은 한마디 “엄마…”였다.
류신부는 “내가 웬만해서는 장교수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일을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유일하게 말린 것이 바로  교과서 집필이었다. 가족들 전부가 말렸다. 2007년부터 2년간 그녀는 교과서 집필에 너무 많은 것을 쏟았다. 장교수가 그렇게 교과서에 집착했던 것은 부친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었다”라고 밝혔다.

장교수의 부친은 고 장왕록 서울대 명예교수이다. 국내 번역문학의 태두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1994년 사고로 갑자기 운명하셨다. 장교수의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특히 당시는 장교수가 부친을 도와 함께 영어 교과서 공동 집필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장교수는 슬픔을 추스르면서 집필 마무리 작업을 혼자서 마저 다 했다. 그리고 출판사에 부친과 공동 저자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출판사측은 고인을 저자로 올릴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때 장교수가 못내 섭섭해했다”라고 전했다.

이후부터 교과서는 장교수에게 단순한 작업 그 이상이었다. 아버지와의 약속이었다. 샘터사 김성구 대표는 “당초 출판사측에서 장교수의 건강이 염려된 나머지 집필을 맡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장교수는 교과서 집필만큼은 반드시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것이 건강이 더 악화된 원인이 된 듯하다”라고 아쉬워했다. 장교수는 평소 이에 대해 “돈 때문도 명예 때문도 아니다. 다만, ‘장영희 교과서’의 맥이 끊기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더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동문 모임·야학 활동에도 혼신

▲ 고 장영희 교수의 안장식이 5월13일 천안공원묘원에서 열렸다. ⓒ시사저널 임준선

‘신은 인간의 계획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다. 올가을 나는 계획이 참 많았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2004년 9월 조선일보 칼럼 중에서)

장교수가 떠나간 지금. 그녀가 마지막까지 삶에 대해 애착을 버리지 않았던 그 이유가 우리를 더 가슴 아프게 한다. 장교수는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을 이루고 난 뒤 그가 꼭 하고자 했던 진짜 ‘마지막’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신은 그녀를 너무 빨리 욕심냈다. 

‘이 세상에서 나는 그다지 잘나지도 또 못나지도 않은 평균적인 삶을 살았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다지 길지도 않은 짧지도 않은 평균 수명을 채우고 가리라. 종족 보존의 의무도 못 지켜 닮은꼴 자식 하나도 남겨두지 못했는데 악착같이 장영희의 흔적을 남기고 가리라.’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장교수가 끔찍이도 사랑했던 대상은 모교인 서강대였다. 스스로를 ‘뼛속까지 서강인’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장교수가 서울사대부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1970년대 당시 우리의 자화상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학 진학이 불가능했던 때였다. 장교수의 부친은 각 대학들을 찾아다니며 “제발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달라”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때 이런 부친을 오히려 의아해하며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느냐. 입학시험은 다리가 아닌 머리로 치른다”라며 응시를 흔쾌히 허락했던 이가 당시 서강대 영문학과장이던 미국인 신부 제롬 E 브루닉 교수(1980년 작고)였다.

서강대 영문과에서 장교수와 함께 약 20년 가까이 교수를 지냈던 신숙원 건양대 부총장은 “장교수는 누구보다 학교와 제자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대단했다”라고 밝혔다. 신부총장은 “고인은 평소 ‘예전에는 서강대 영문과의 전통이 대단했는데, 요즘에는 좀 정체된 느낌이 든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장교수가 무엇보다 헌신적으로 공을 들였던 것은 동문들을 규합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빛내는 업적을 동문들과 연결해서 많이 하려고 노력했고, 또 시도도 했다. 4년 전부터 ‘하나되는 영문 동문’의 직접 기획을 도맡아 하고, 영화·연극의 연출도 하고 유명 인사들 섭외도 하고 상당히 많은 공을 들였다. 그뿐인가. 장교수는 서강대에서 운영하는 야학 활동도 열심히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도 이미 몸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라고 전했다.

내년이 서강대 50주년이 된다고 한다. 물론 영문과도 50주년이 된다. 장교수는 이 50주년 행사에 대한 많은 계획과 구상을 갖고 있었다. 신부총장은 “크게 화보도 만들고 학술대회도 하고 그런 계획들을 꿈꾸고 있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에세이스트와 번역가로 워낙 유명했던 장교수였지만, 생전에 소설을 꼭 한 번 써보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부친이 번역했던 펄 벅의 소설을 읽으며 그 자신도 그런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늘 무궁무진한 소설의 시놉시스가 가득 찼을 법하다. 하지만 이제 그 꿈은 그냥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장교수는 생전에 스스로에 대해 “나는 엄격하고 투쟁적인 사람이다. 근성이 있고 헌신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도꼭지 틀어놓은 듯 울기도 잘하고 순진하게 속기도 잘 속는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샘터사 김성구 대표는 “한 번도 미소를 띠지 않은 고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유머를 굉장히 좋아한다. 5월13일 장지에서 마지막 입관을 할 때 고인이 남긴 책들을 관 옆에 같이 넣는 것을 보고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 유머를 즐겼던 고인의 성격 같으면 아마도 이를 보고 ‘왜 그걸 넣나. 저승까지 가서 또 교정·교열을 봐야 하는데’라고 하셨을 것 같다”라고 전했다.

“전원에서 어머니와 여생 보내려 했다”

실제 장교수는 웃음을 잃지 않았고, 늘 생활 속에서 웃고자 했다. 20여 년간 써오던 나무 목발을 가벼운 알루미늄으로 바꾼 날 그녀는 발레리나가 된 듯 우아해진 느낌이라며 거실을 휘젓고 다녔다고 한다. 암이 재발한 후 수업 도중에 넘어지는 바람에 학생들이 모두 깜짝 놀랐는데 장교수는 오히려 ‘책상이 여기 왜 있니?’라고 농담을 해 학생들을 웃게 만들곤 했다.

‘길고 가늘게 사느니 굵고 짧게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데 화끈하고 굵게, 그렇지만 짧게 살다 가느니 보통밖에 안 되게, 보일 듯 말 듯 가늘게 살아도 오래 살고 싶다.’ (수필집 <내 생애 단 한 번> 중에서)

류신부는 언론에 알려진 장교수의 모습이 자신이 아는 것과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장교수가 지독한 일벌레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장교수는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게으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일을 할 때는 정말 미친 듯이 열심히, 그러나 어느 순간 일을 놓으면 그때부터는 완전 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유롭게 쉬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류신부는 장교수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계획을 소개했다. 진짜 마지막으로 꿈꾼 그녀만의 계획을.
“장교수가 암 투병과 완치 등의 여정을 겪으면서 한 번은 내게 지방 시골의 한 조그만 땅을 보여줬다. 그녀는 자신의 소박한 꿈을 내게 얘기했다. 여기에 조그만 집을 짓고 어머니와 둘이서 나머지 여생을 편안히 보내고 싶다고. 내가 ‘이렇게 조그만 땅에 어떻게 집을 짓나’ 했더니, ‘작은가? 이 정도면 됐지 뭐’라며 웃더라. 장교수는 어느 정도 자신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을 했다 싶으면, 딱 손을 놓고 마지막 여생을 그야말로 누구보다 편안히 아주 자유롭게 쉬고자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죽음이 다소 빨리 찾아오는 바람에 후반부 계획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그녀는 결국 일만 하다 가는 형국이 되었다.” 고단한 삶을 살았던 인간 장영희를 느끼게 하는 가슴 아픈 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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