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 대통령의 서거 뒤, 봉하마을의 48시간
  • 김해·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09.05.2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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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공동취재단
 
봉하마을의 유일한 슈퍼인 봉하쉼터의 출입문은 체인이 걸린 채 굳게 닫혀있다. 노 전 대통령이 담배를 물며 촌부의 복장으로 앉아 ‘노간지’라는 별명을 얻었던 사진의 배경이 된 곳이다. 노 전 대통령의 분향소는 봉하쉼터의 왼쪽 편, 봉하 마을회관 앞에 차려졌다. 서거 첫 날인 5월23일에는 규모가 작아 조문객들이 장례준비위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조촐한 분향소를 보고 한 조문객은 “동네이장의 장례도 이것보다는 낫다”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둘째 날 새로 만들어진 분향소는 보다 큰 규모로 조성되었다.

지금 봉하마을은 엄숙함과 슬픔 그리고 분노가 교차하고 있다. 지난 5월23일 오후 6시30분,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인 민주당 안희정 최고위원과 이병완 전 비서실장이 선두에 서서 노 전 대통령의 유해가 안치된 관을 운구하자 양 옆으로 늘어서있던 사람들은 오열했다. 일부는 “노무현”을 외쳤고 일부는 “대통령님”을 부르며 주저앉아 울었다. 갑작스런 서거에 봉하마을도 바빴다. 유해가 봉하마을로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분향소도 설치해야 했고 조문객들을 맞이하기 위한 천막도 준비해야 했다.

23일 오전 6시40분,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6시30분 그의 유해는 봉하마을로 되돌아와 마을회관에 안치되었다.  12시간만의 귀향이었다. 유해가 안치된 후 조문을 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점점 늘어갔다. 일반 국민들의 분향은 밤 9시부터 이루어진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보다 먼저 분향소를 찾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정치인이었다. 정치인 노무현을 지지했던 사람과 비판했던 사람이 속속 봉화를 찾았다. 민주당 지도부는 박대당했다. 정세균 대표를 비롯해 민주당 지도부가 봉하마을에 들어서자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민주당이 여기를 왜 오느냐”라며 분노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반성하십시오”라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노회찬 대표, 심상정 전 대표, 조승수 의원 등 진보신당 지도부가 봉하마을을 찾을 때도 거친 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노대통령을 향해 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노회찬 대표에 대한 반감이 컸다. 반면 강기갑 대표와 권영길 의원 등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그나마 쓴소리를 덜 들으며 입장해 대조를 이루었다.

지금 봉하마을은 보수 세력에 대한 반감이 크다. 그럴 수밖에 없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때도, 퇴임 이후에도 보수 세력으로부터 숱하게 공격받았다. 봉하마을에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보수 세력에 의한 것이라는 공감대가 흐른다.

▲ ⓒ연합뉴스

우리 사회에서 주류인 보수 세력은 봉하마을에서 비주류이고 수난을 당하고 있다. 운구가 도착한 뒤 30분이 지난 오후 7시, 이명박 대통령의 조화가 빈소에 도착했지만 조문객들에 의해서 박살이 났다. 그리고 불과 얼마 뒤 봉하마을 입구 쪽에 소동이 일어났다. 노 전 대통령과 대통령 선거에서 싸웠던 자유선진당의 이회창 총재가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미니버스를 타고 도착한 이 총재가 버스에 내리자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가로막고 거세게 항의했다. “사람 죽여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조문이냐”, “살인자는 물러가라”라는 말에 이 총재는 걸음을 내딛지도 못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야 했다. 그 버스를 향해 물병과 계란이 날아들었다.

9시40분에는 박살 난 조화를 대신해 한승수 총리가 직접 봉하마을로 들어서다 조문을 거부당한 채 버스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24일 오후 1시30분에 도착한 김형오 국회의장은 물병을 맞았고 물세례를 받아 우산을 쓰며 마을 입구의 경비동으로 대피해야 했다. 국회의장실 관계자와 몸싸움을 벌이던 노 전 대통령의 한 지지자는 분을 못 이긴 채 서럽게 울며 주저앉았다. 결국 이날 조문을 할 수 없었던 김의장은 다음 날인 5일 새벽 5시경에 기습적으로 조문을 하고 급하게 빠져나갔다.  노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등졌던 정동영 의원도 23일 밤 봉하마을을 찾았지만 지지자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정의원은 24일 오전에서야 겨우 조문을 끝낼 수 있었다.

보수 정치인뿐만이 아니다. 보수언론인 조선·중앙·동아일보 기자들은 조심스럽게 취재해야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 모든 기자들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검찰 수사와 관련한 언론보도에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MBC도 한겨레, 경향도 다 필요 없다”라며 지지자들은 기자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때마다 문성근씨가 나서서 중재를 해야 했다. 분노하던 몇몇 지지자들은 기자석을 찾아와 “조·중·동 기자들은 장례식을 치를 동안 무릎 꿇고 반성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며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천호선 전 대변인이 만류했지만 쉽지 않았다. 마을회관의 스피커에서는 수시로 "노 전 대통령의 가시는 길을 편안히 보내드리자. 그리고 기자들이 취재를 할 수 있도록 조문객 여러분들이 배려를 해 달라"라는 방송이 나왔다.

반면 노사모는 서거 둘째 날인 5월24일 오후 2시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방송을 했다.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온 것 같다”라며 2시30분까지 조·중·동 기자가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조·중·동 기자들의 비표번호를 알리며 “이 번호의 비표를 가진 기자를 발견할 경우 조문객들의 협조를 구한다”라고 당부했다. 한 보수 신문의 기자는 취재에 어려움을 겪자 다른 매체의 비표를 빌려 사용하기도 했다. 실제로 한 보수언론의 기자가 비표번호 때문에 봉하마을 외곽으로 물러나는 일도 벌어졌다.

방송도 수난을 겪었다. 특히 KBS가 그랬다. 분향소가 설치된 첫 날인 23일 저녁, 조문객들의 식사 장소에서 리포팅을 하려던 KBS 기자가 거센 항의를 받고 철수해야 했다. KBS 중계차는 24일 새벽 1시10분경 노사모의 강한 요구로 분향소에서 철수했다. 보도 내용이 문제였다. 그동안 쌓였던 KBS에 대한 불만이 이날 폭발한 셈이었다. KBS 중계차는 분향소에서 1.5km가량 떨어진 봉하마을의 입구 쪽으로 이동했고 KBS 로고가 새겨진 차량은 도로에서 10m 정도 아래쪽의 임시주차장으로 숨어야 했다. KBS 카메라 기자들이 무거운 ENG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언론에 대한 불신은 외신에도 불똥이 튀었다. 방송을 준비하던 NHK도 조문객의 항의를 받았다. 한 조문객이 “여기는 너희가 올 데가 아니다”라며 거친 반응을 보이자 주위 사람들이 제지하기도 했다. 일본 언론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도하면서 대부분 “노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 한일관계가 순조롭지 못했다”라는 평가를 덧붙이고 있었다.

▲ ⓒ사진공동취재단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일부 충돌이 벌어지고 있지만 전체적인 분향소 안팎 분위기는 차분하면서 진지하다. 조문객이 가장 많이 몰려든 5월24일 하루에만 공식적으로 집계된 조문객이 13만 명이다. 하지만 봉하마을을 찾는 조문객은 주 진입로 외에도 뒷길이나 논 사이를 가로지르는 시멘트길 등으로 입장하는 경우도 많아 실제 조문객 수는 공식 집계보다 많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장례준비위측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다음날인 24일에 조문객이 가장 많이 몰릴 것으로 예상하고 2만명 분의 음식을 준비했지만 이미 점심시간에 동이 나버렸다. 모자란 음식 때문에 자원봉사자들의 경우 식사 한 끼 못한 채 활동해야 했다. 농협의 지원으로 추가적인 음식을 지원받았지만 그것조차 4시30분경에 중단되고 말았다. 6시가 넘어서야 다시 국밥을 조문객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차량통제가 시작되는 봉하마을 진입 국도부터 분향소까지의 거리는 대략 3km이다. 전직 대통령의 분향소에 친구끼리, 혹은 연인끼리, 그리고 가족끼리 30~40분의 먼 거리를 걸어서 몰려드는 장면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찾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 24일 오후 2시경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강한 소나기가 내렸다. 준비한 천막 사이로도 물이 샐 정도로 강한 빗발이었다. 조문은 잠시 중단되었다. 하지만 잠깐의 조문을 하기 위해 줄을 선 조문객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40여분 동안 계속된 빗줄기속에서 우산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과 함께 쓰면서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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