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나라 사이 여전히 깊은 강 흐른다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9.07.1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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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러시아 방문해 첫 정상회담 핵무기 감축 합의…다른 성과는 없어

▲ 7월7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이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크렘린궁을 둘러보고 있다. ⓒ이타르타스 통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7월6일 크렘린궁에서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사람은 초면이 아니다. 지난 4월 런던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 때 만났으니 구면인 셈이다. 두 정상은 첫날 회담에서 양국의 전략 핵무기를 4분의 1로 감축하고 이란과 북한 같은 위험 지역으로 핵무기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로 합의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필요한 수천t의 항공화물을 러시아 영공을 통해 수송하기로 하는 데도 의견 일치를 보았다. 오바마는 방문 2일째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와도 만났다. 이 회담에서는 덕담만 오갔을 뿐 가시적 성과는 없었다.

얼핏 보면 제법 결실을 거둔 회담이다. 그러나 양국이 합의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가 핵무기 감축과 미미한 분야의 협력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 이상 합의할 것은 없다는 얘기도 된다.

오바마는 회담 도중 푸틴 총리를 ‘대통령’이라고 호칭했다가 황급히 총리로 바로잡았다. 워싱턴에서 모스크바까지 장시간의 비행에 따른 여독과 빡빡한 회담 일정 탓으로 돌릴 수도 있으나, 오바마의 실수는 두 나라가 안고 있는 이견(異見)의 심도를 상징한다. 푸틴은 러시아의 실세이다. 직함이 총리일 뿐 실질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따져보면 오바마가 푸틴을 대통령으로 호칭한 것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악의 없는 해프닝으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오바마와 푸틴이 건너야 할 깊은 강을 생각하면 두 나라의 관계는 시베리아의 동토만큼이나 얼어 있다.

오바마는 러시아로 가면서 이번 회담을 통해 양국 관계를 ‘재설정’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러시아 분석가의 논평이 흥미롭다. 재설정 버튼을 누르면 화면은 일단 캄캄해졌다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양국 관계의 앞날을 암시하는 말이다. 양국은 정상회담의 실패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은 입장이지만 한 번의 회담으로 바람직한 관계를 복원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도 같은 심정이다. 

양국 관계 복원 노력하겠다고 했지만 러시아측은 ‘냉담’

오바마와 메드베데프는 좋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오바마는 47세, 메드베데프는 43세인 신세대 지도자인데다 둘 다 변호사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대화는 화기애애하고 야심적이었다. 메드베데프의 말을 빌리면 ‘좀더 효율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좀더 현대적인 관계’로 상호 관계를 재설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다. 러시아인의 절반은 미국을 적으로 간주하고, 미국은 러시아의 부활에 별 관심이 없다. 러시아에 있어서 미국은 모방의 대상이자 분개의 표적이다.

미국에 대해 러시아가 갖고 있는 원한의 뿌리는 1991년 소련 해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마셜 플랜 같은 정책적 지원을 통해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미국은 외면했다. 오히려 체첸 반군들을 지원했다. 이에 반해 러시아는 2001년 9·11 테러 당시 미국을 힘껏 도왔다. 그 이후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클린턴과 부시의 배신이었다. 나토를 러시아 국경으로 확대하고 폴란드와 체코에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해 러시아를 포위하는 ‘음모’가 선물이었다. 

 미국은 러시아에 많은 빚을 졌고 이것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이것이 러시아인들의 인식이다. 지난 20년간 미국이 러시아에 해준 것은 안보상의 위협뿐이었고, 러시아는 이것을 결코 잊지 못한다. 러시아인의 심정을 더 솔직히 표현하면, 소련이 망한 후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러시아를 ‘경멸’했다. 북한의 핵 문제에서 미국이 러시아의 도움을 간청할 때 “그것은 당신들의 문제이다”라는 투로 시큰둥한 태도를 보인 것도, 푸틴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철회한 것도 이러한 불쾌한 감정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소원한 관계는 지난해 8월 그루지야 전쟁으로 더 악화되었다. 러시아는 미국의 사주로 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본다. 이 때문인지 러시아는 그루지야 다음으로 미국을 제2의 주적으로 여긴다. 지난해 대통령에 당선된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미국이 그루지야 전쟁을 구실로 나토 함정을 흑해 깊숙이 침투시키고 동유럽에 미사일 방어기지를 건설했다고 비난했다. 미사일 문제가 불거졌을 때, 당시 푸틴 대통령은 부시를 ‘21세기의 나치’라고 매도했다.

러시아 교과서에는 미국이 적대적 국가로 기술되어 있다. 서구를 동맹으로 간주하는 개혁 정책을 편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까지 비판을 받는 판이다. 러시아인들의 눈에는 미국이 하는 모든 일이 러시아를 못살게 하기 위한 것으로 비친다. 러시아의 반미 감정에는 열등감도 들어 있다. 냉전 시절 쌍벽을 이루던 두 강대국의 하나가 지금 같은 신세가 된 데 대한 회한과 미국의 경멸에 대한 분노가 혼합되어 있다.

지금 러시아가 원하는 것은 옛 소련의 부활이 아니다. 다만, 러시아의 안보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영향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가 관련되어 있다. 러시아는 두 나라를 미국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완충지대로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미국은 양국을 나토에 가입시키고자 한다. 러시아로서는 더 물러설 수 없다. 푸틴이 지난해 “러시아는 강대국 대열에 진입하든지 사라지든지 양자택일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생결단의 심정이 엿보인다.      

오바마는 고약한 시기에 모스크바에 갔다. 경제 위기에 시달리는 러시아로서는 미국 대통령에게 환대를 베풀 기분이 아니다. 오바마가 도착하기 하루 전 러시아가 코카서스에서 최대의 군사 훈련을 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러시아가 아주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미국과 러시아가 진솔한 전략적 대화를 갖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협상을 벌이는 것이다. 키신저 재단의 러시아 전문가 톰 그레이엄은 “러시아가 요구하는 것은 미국이 하기 싫어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미국이 러시아에 바라는 것 또한 “하기 싫은 것(don’ts)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불신이 깊어 진지하게 대화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절실하다. 

러시아의 피해 의식과 상처 치유해 주어야

오바마의 방문이 하나의 계기는 될 수 있다. 푸틴의 한 측근은 “이 사나이(guy)를 한번 다뤄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미리 선을 그었다. 나토의 확대나 미사일 방어 문제에 관한 한 어떠한 협상이나 거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다수의 러시아 전문가들은 양국 관계가 이전보다 더 위험한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푸틴은 반미 감정을 러시아 재건을 위한 자산으로 삼을 정도로 이를 갈고 있다.  

오바마의 마력이 이 원한을 얼마나 녹일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한 가지 희망은 미국과 어떤 합의를 하든 그로 인한 혜택이 러시아에 더 많이 돌아간다는 인식이 크렘린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푸틴이 아무리 악을 써도 냉전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러시아를 재건할 수 없다는 현실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한 반체제 인사는 오바마를 복제(clone)할 수만 있다면 양국 관계에 돌파구가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다는 냄새가 난다.

재설정 버튼은 치열한 토론과 상호 양보를 전제로 한다. 미국이 소련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를 만만하게 취급한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는 현재 부상을 입고 쇠약해진 북극곰이다. 그래도 여전히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공격력을 갖추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 곰이 기진맥진해 스스로 쓰러지기를 바라는 것은 전략이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양국에 공통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재설정 버튼을 눌러 컴퓨터를 재부팅한다 하더라도 과거에 저장된 메모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어느 데이터를 삭제할지 어느 측도 진지한 검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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