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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발끝, ‘섹시 코드’가 점령하고 있다

이철현 기자 ㅣ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7.14(Tue) 17:2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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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즘(Sexism)이 불현듯 일상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섹시라는 코드가 갖가지 상품군에 노골적으로 투영되면서 한국의 소비 행태를 규정하고 있다. 언어학자 정혜경씨가 저서 <섹시즘(Sexism)-남자들에 갇힌 여자>에서 성 차별이라고 정의한 섹시즘은 차치하자. 음악, 영상, 뮤지컬, 광고 같은 문화 상품에서부터 의류, 구두, 화장품 같은 패션 제품까지 성적 매력을 강조한 문화 코드를 섹시즘이라 정의한다면, 한국은 지금 섹시즘에 중독되어 있다. 여성 패션지 <나일론>의 구정란 편집장은 “섹시 코드는 패션이나 문화 상품에서 늘 있었다. 다만, 소비의 양태가 섹시 코드 상품이 각광을 받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지금 한국의 소비 문화를 정의하는 코드는 섹시즘의 일상화이다”라고 말했다.

   
▲ 캘빈클라인 광고(왼쪽)와 추파춥스 광고(오른쪽).

미국계 부동산서비스 업체에서 일하는 김명아씨(26)는 키 1백68cm에 운동으로 다져진 늘씬한 신체 조건을 갖춘 탓에 직장 동료나 지인으로부터 섹시하다는 칭찬을 자주 듣는다. 김씨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섹시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불쾌했다.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런 소리를 함부로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그가 2003년 어학 연수를 위해 캐나다 벤쿠버에 머물면서 ‘섹시하다’는 말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캐나다인은 여성을 칭찬할 때 ‘섹시’ 내지는 ‘핫(hot)’이라고 표현했다. 음탕이나 문란이라는 의미 대신 성적 매력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자 오씨는 섹시하다는 표현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캐나다에서 귀국한 지 5년쯤 지난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섹시하다는 말이 여성의 매력을 칭찬하는 일상의 표현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이제 섹시는 한국 여성이 지니고 싶은 미적 가치로 바뀐 것이다. 

섹시 코드가 일상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매체이다. 갖가지 매체에 등장하는 대상은 대중의 동일시 욕구를 자극한다. 한껏 부풀어 오른 가슴, 터져 나올 것 같은 엉덩이, 길게 뻗은 다리, 또렷하게 갈라진 복근을 영화, TV, 광고, 인터넷, 모바일 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접하는 대중은 그 성적 매력을 닮고 싶다는 욕구를 축적하게 된다. 영화나 뮤지컬이 인간 감성에 호소하는 예술 장르라는 것을 감안하면 성이라는 감성적 가치를 자극하려는 시도는 당연하다.

각종 매체가 일상화에 기여…정보통신기술도 상품화 가속화

배우 김민선씨가 영화 <오감도>에서 드러내는 알몸은 영화가 담고자 하는 메시지를 표현하는 콜라주이겠지만 그 자체로 독립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공연하는 배우 김무열씨의 엉덩이는 작품이 주는 메시지와 버무려져서 날 선 감정을 자극한다. 전통적으로 상품 소비를 자극하는 광고에서도 국내외 스타가 섹시함을 한껏 뽐낸다. 패션마케팅업체 APR에이전시의 박효진 사장은 “의류, 구두, 화장품 같은 패션 제품의 마케팅 컨셉트는 섹시이다. 성적 매력을 당당하게 내보이고 싶은 욕구가 패션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섹시한 모델을 기용하고 그 모델이 가진 섹시함을 강조하는 형태로 광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보통신기술(ICT)은 섹시 코드의 상품화를 가속한다. 모바일 네트워크로 전송되는 문화 상품 가운데 가장 상업화에 성공한 것은 화보이다. 사업 초기, 마약 복용이나 음주 운전으로 막장까지 간 여배우가 재기하기 위해서, 또 별 다른 재주가 없어 내세울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는 삼류 모델이나 레이싱 걸이 남성의 관음증과 영합해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실리콘 성형으로 자연스럽지 못하게 부푼 가슴이나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드러낸 연예인의 나신이 식상해지자 화보 업계는 스포츠 스타나 혼혈 패션모델까지 모델로 기용하고 표현 양식을 정제했다. 그러다 보니 인라인스케이터 궉채이, 당구선수 차유람, 배구선수 한지연, 혼혈 모델 제시카 고메즈의 화보가 화제를 일으키며 다운로드되고 있다. 섹시 코드에 대한 거부감은 인터넷 탓에 희석된다. 인터넷 음란사이트나 P2P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되는 음란물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아지고 성이 주는 학습된 거부감에 내성이 생기면서 웬만한 노출 수위는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섹시함이 균형을 이루어야”

섹시 코드는 진화하고 있다. 음탕함이 지면에 흠뻑 배인 음란물과 달리 문화 상품과 패션 제품 광고에서 노출되는 섹시 코드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워지고 있다. 박효진 사장은 “배우 신민아씨는 큰 키와 늘씬한 다리가 돋보이는 몸매를 갖고 있으나 앳된 얼굴을 지녀 부담스럽지 않은 섹시미를 표현할 수 있다. 신씨가 캘빈클라인 청바지 모델에 기용된 것은 이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배우 송혜교씨가 청바지 브랜드 리바이스레이디스 모델로 기용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송혜교씨가 지닌 청순미는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잘록한 허리선과 결합하면서 세련된 섹시함을 표현한다. 걸그룹 소녀시대는 현란한 색채의 스키니 진을 입고 춤추지만 난잡해 보이지 않는다. 2집 앨범에 수록된 <소원을 말해봐>라는 곡에 맞춰 선보이는 마린룩이라는 복장은 군복을 여성적으로 해석해 정제된 섹시함을 발휘한다.
패션 제품 마케팅 전문가나 광고인은 자사 제품에 담긴 섹시 코드를 표현하는 데 국내 스타를 기용한다. 이제 ‘스타마케팅’이라는 컨셉트까지 자리 잡았다. 국내 스타는 섹시 코드를 표현하는 데 외국 모델에 못 미친다. 키, 가슴, 다리, 엉덩이처럼 섹시 코드를 표현하는 신체 부위가 서양 모델처럼 도드라지지 않는 탓이다. 그럼에도 광고인은 국내 스타를 선호한다. 패션 스타일리스트 김성일씨는 이것을 동일시의 욕구라고 해석한다. 김씨는 “(국내 스타들은) TV나 광고에서 자주 접하면서 친숙해진데다 검은 머리와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이질적이고 낯선 서양 모델보다 대중의 동일시 욕구를 훨씬 크게 자극한다”라고 말했다. 최근 MBC 드라마 <내조의 여왕>에서 나온 김남주씨가 입은 옷, 가방, 헤어스타일이 유행했다. 김씨는 드라마 <내조의 여왕>에서 아줌마 연기를 펼쳤다. ‘아줌마도 김남주처럼 꾸미면 매력적일 수 있다’라는 환상이 생기자 너도나도 김남주 따라 하기를 부추겼다.

지금도 섹시 코드로 무장한 광고나 문화 상품은 길거리에 나선 한국 여성들을 벗기고 있다. 섹시미를 한껏 발산하는 모델처럼 몸매를 가꾸고 옷을 입으면 섹시해질 수 있다는 환상이 패션을 지배한다. 서울 강남이나 신촌, 홍익대학교 앞에는 가슴골을 드러내고 허벅지와 엉덩이선을 강조한 핫팬츠가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같은 옷과 분위기이지만 어떤 이는 섹시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패션 스타일리스트 김성일씨는 저서 <아이 러브 스타일>에서 그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한다. 김씨는 ‘진정으로 섹시하기 위해서는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섹시함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단아함과 단정함이라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기저에 두고 세밀한 부문에서 섹시함으로 처리해야 음탕이나 문란이라는 섹시 코드가 주는 부정적 인상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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