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간 ‘아름다운 기업’ 형제는 왜 갈라섰나
  • 이형구 (아주경제 산업팀장) ()
  • 승인 2009.08.0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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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아시아나그룹, ‘형제 승계’ 전통 깨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7월28일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아시아경제


지난 7월28일 오후 금호석유화학을 출입하는 몇몇 기자들은 익명의 e메일 한 통씩을 받았다. “평소 아름다운 기업을 주장하던 박삼구 회장이 오늘 점심 때쯤 박찬구 회장을 금호석유화학 대표이사에서 해임시켰다는 소식을 들었다”라는 내용이었다. e메일 내용은 이어 “박삼구 회장이 이날 오전 일방적으로 이사회를 열어 본인이 직접 긴급 발의로 대표이사 해임을 건의하고 본인 앞에서 기명 투표로 진행시켰다. 아무래도 요즘 박찬구 회장이 금호석유 주식 산 것과 동시에 65세 경영권 승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까 본인(박삼구 회장)의 장기 집권을 위해 일방적으로 동생을 쳐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내용상 박찬구 회장측 인물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이 e메일로, 그동안 줄곧 설로만 떠돌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형제 불화설은 ‘설’이 아니라 ‘사실’임이 드러났다. 의외의 경로를 통해 예상보다 빨리 박찬구 회장의 해임 소식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이날 오후 5시 긴급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박삼구·찬구 회장의 동반 퇴진과 전문경영인이며 항공부문 부회장인 아시아나항공 박찬법 부회장에게 그룹 회장을 맡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국내 기업 중에서는 두산그룹과 함께 형제 승계라는 독특한 전통을 이어왔다. 창업주인 고(故) 박인천 회장에 이어 장남인 고 박성용 회장, 차남인 고 박정구 회장을 거쳐 3남인 박삼구 회장(64)이 4대 회장을 맡아왔다. 또, 2세 형제들이 가구별로 동일한 지분을 확보해 가족회의를 통해 그룹의 중요 사항을 결정해 왔다. 전통대로라면 박삼구 회장이 물러난 이후에 4남인 박찬구 화학부문 회장(61)이 그룹 회장을 맡는 것이 순서이다. 그러나 이번에 박삼구·찬구 회장이 동시에 물러나고 전문경영인인 박찬법 아시아나항공 부회장에게 그룹 회장을 맡기기로 하면서 ‘전통’이 깨지게 되었다.

1984년 고 박인천 창업주의 타계 이후 25년간 유지되어 오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형제 경영이 깨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3년 전 6조원의 거금을 들여 사들인 대우건설을 그룹의 유동성 위기 때문에 되팔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금호아시아나가 지난 6월28일 대우건설을 되팔기로 한 이후 박찬구 회장 부자가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대폭 사들이면서 대주주 지분 균등 비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10.01%의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갖고 있던 박찬구 회장 부자는 금호산업 지분을 판 자금을 동원해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18.47%까지 늘렸다. 이 과정에서 역시 10.01%의 지분을 보유했던 박삼구 회장 부자도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11.77%까지 늘렸다.

당시 그룹측은 이같은 지분 구조 변동에 대해 금호석유화학을 중심으로 단일 지주회사 체제로 가기 위한 준비라고 밝혔지만, 이때부터 경영권을 둘러싸고 형제간에 불화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그룹 안팎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박삼구 회장, 퇴진 고별사에서 동생 찬구의 해임 배경 밝혀

그렇다면 박찬구 회장은 왜 금호산업 지분을 매각하고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사들였을까. 이에 대해 금호석유화학 주변에서는 대우건설 재매각에 따른 리스크로 그룹 전체가 흔들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금호산업 지분을 팔아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매입하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즉, 금호산업과 아시아나항공 등 그룹의 주력사가 대우건설 인수·재매각에 따른 리스크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대우건설 매각 이후 그룹의 실질적 지주회사로 떠오른 금호석유화학의 경영권을 안정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박찬구 회장과 가까운 인사들의 논리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그룹의 유동성 위기와 대우건설 재매각을 불러온 박삼구 회장의 경영 능력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박찬구 회장의 금호석유화학 주식 매집에 대해 금호아시아나그룹측 인사는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생각한 돌발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실제로 박삼구 회장도 7월28일 가진 퇴진 기자회견과 그룹 인트라넷에 올린 고별사에서 “(박찬구 회장이) 본인의 이해관계를 따지고 경영에 반하는 행위를 여러 가지 해 그룹 경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박찬구 전 대표이사가 그룹의 정상적인 운영에 지장을 초래하고 그룹 경영의 근간을 뒤흔들어 그룹의 발전과 장래를 위해 해임 조치를 단행하게 된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같은 박삼구 회장의 생각에 고 박정구 회장의 일가 등 다른 형제의 가족들도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룹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기자회견 전날 있은 가족회의에서는 창업주 박인천 회장의 2남 고 박정구 회장의 미망인 등 가족들이 박찬구 회장의 돌출 행동을 강도 높게 비판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 박성용 회장 일가와 고 박정구 회장 일가 등 다른 가족들이 캐스팅보트가 될 만한 지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번 경영권 분쟁에서 누가 가족의 지지를 얻는가 하는가는 금호석유화학의 경영권 행방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박찬구 회장과 아들 박준경 금호타이어 부장은 금호석유화학의 지분 18.2%를 보유한 최대 주주이다. 그러나 박삼구 회장과 아들 박세창 상무의 지분도 11.77%로 적지 않다. 여기에 고 박정구 회장의 장남인 박철완 아시아나항공 부장의 지분 11.77%와 고 박성용 회장의 장남 박재영씨의 지분 4.65%를 더하면 박삼구 회장측의 지분은 28.18%로 박찬구 회장측의 지분보다 10% 가까이 많아진다. 실제로 28일 금호석유화학 이사회에서도 박삼구 회장은 자신의 지분과 박철완 부장과 박재영씨 등 가족들 지분을 더해 이를 바탕으로 이사회를 열고 박찬구 회장을 해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삼구 회장이 일단 승기를 잡은 셈이다.

이처럼 금호아시아나그룹 오너 일가 사이에서 박찬구 회장이 코너에 몰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징후를 보였다는 것이 금호아시아나그룹 관계자들의 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 7월13일 고 박정구 금호아시아나그룹 전 회장 7주기 추모식이다. 이날 추모식장에 박찬구 회장은 가장 늦게 도착해 박삼구 회장과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 가장 먼저 선영을 떠나 박찬구 회장과 가족들 사이에 불화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평소 우애 좋은 형제 경영을 자랑했던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찾아온 이번 위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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