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내린 게릴라들 ‘건국’ 꿈꾼다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9.09.01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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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 점령 풀면 2년 내 가능한 일”

▲ 8월8일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대통령(왼쪽 세 번째)이 파타의 지도자 겸 총사령관에 선출되어 파타 조직원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등장한 이후 속도를 내기 시작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총리인 살람 파이야드는 8월26일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이스라엘과의 협상 진전에 관계없이 2년 안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지도자가 국가 건설 계획을 밝히기는 처음이다.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의 첫 과제는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 사태를 종식시키는 것이다. 그는 “이 일은 가능한 것이고 2년 내에 반드시 해야 한다”라고 다짐했다.

이번 계획은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인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 파타(Fatah)가 최근 정상적인 정치 단체로 진화하는 의미심장한 움직임을 보인 것과 때를 같이해 발표되었다. 파타는 최근 이스라엘 점령지 가자 지구에서 6차 총회를 개최했다. 레바논과 요르단의 무장 조직으로 구성된 이들이 이스라엘이 관할하는 영토에서 총회를 개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스라엘이 이들의 점령지 출입을 허용한 것도 이례적이고 초유의 일이다.

이번 총회에서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창설자 야세르 아라파트가 죽은 후 지리멸렬해진 조직을 추스르고 향후 진로를 모색하는 것이 주요 안건이었다. 2천명의 대표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모든 형태의 저항을 계속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총회에서 채택된 모든 문서에서 ‘무력 항쟁’이라는 말이 빠졌다. 이번 대회에서 파타 지도자 겸 총사령관으로 선출된 마무드 아바스는 점령 사태를 종식하기 위한 모든 옵션이 열려 있기는 하지만, 향후 대이스라엘 전략에서는 협상을 우선한다고 선언했다.

팔레스타인의 파격적 움직임에 대해 이스라엘은 일단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나 미국, 영국 등 서방 강대국들이 이스라엘의 호응을 강력히 촉구함으로써 중동 평화 구도에 일대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이번 계획을 발표한 파이야드 총리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경제학자이자 중립 노선의 정치 지도자로서 서방은 물론 이스라엘에서도 상당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팔레스타인 국가는 가자 지구와 웨스트 뱅크를 국토로 삼고 동(東) 예루살렘에 수도를 두게 된다. 이 안은 그동안 미국이 강하게 밀어붙인 ‘2개국 안’(Two states solution)과 거의 일치한다. 이스라엘이 이에 반대하자 오바마 행정부는 무조건 이스라엘을 지지하던 지금까지의 정책을 수정할 수 있다고 압박했다. 국제 여론도 오바마의 노선에 힘을 실어주었다. 심지어 연예계와 일부 소비자들은 이스라엘 제품을 보이콧하는 운동까지 벌이면서 이스라엘의 양보를 촉구했다. 

이스라엘은 인종 차별 정책으로도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은 요르단 계곡과 지중해 사이의 영토를 42년간 지배해왔다. 이 지역에는 6백만명의 유대인과 5백만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3백50만명의 유대인과 50만명의 팔레스타인인은 1967년 이스라엘에 점령된 땅에 거주한다. 이들은 같은 땅에 살면서도 상이한 법적 대우를 받는다. 팔레스타인인은 국가가 없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는 반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사람과 동등한 법적 보호를 받는다. 두 민족이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공생하도록 하는 것이 2개국 안의 본질이자 중동 평화의 핵심이다.

2개국 안이 실현되려면 이스라엘이 1967년 이전 국경으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에 자주 독립권을 허용하는 한편 인종 차별을 금지한 모든 국제 협약을 준수해야 한다. 이스라엘 강경파들이 이에 반대하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중동 평화의 길이 이것밖에 없다는 현실을 이스라엘도 결국은 수락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우세하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팔레스타인 저항 조직이 평화 지향적인 변신을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파타는 2006년 선거에서 팔레스타인의 또 다른 이슬람계 게릴라 조직인 하마스(Hamas)에 처음으로 패배하면서 팔레스타인 대표권을 상실했다. 그 여파로 가자 지구에서도 설 땅을 잃었다. 이때부터 파타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자성론이 일었다.

무장 조직 파타, 체질 바꿔 국제 규범에 맞는 정당 지향

파타가 체질 변화를 보인 것은 오랜 자기 갈등의 과정을 거친 결과이다. 지금 파타 주변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조짐은 한둘이 아니다. 우선 카키 복장과 온갖 군사적 장신구들이 사라졌다. 옷은 실무용 평상복으로, 군사 표식들은 간단한 ID 카드로 바뀌었다. 상명 하달식 명령들은 민주적 지침으로 대체되고 현지에서 인기가 높은 젊은 지도자들에게 권한이 이양되었다. 이스라엘 감옥에 투옥된 죄수들에게는 100명으로 구성된 혁명평의회에 20명의 대표단을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투옥된 게릴라 한 명은 파타의 집행기구인 중앙위원회에 참석할 수 있는 최고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파타가 겪은 지난 20년의 방황을 감안하면 이런 변화에는 격세지감이 있다. 파타는 지난번 총회에서 전통적 저항운동보다는 과격한 살육을 선호하는 게릴라들이 득세하는 바람에 내홍을 겪었다. 과격파들은 그동안 팔레스타인을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이번 총회에서는 이변이 생겼다. 중앙위원회의 선출위원 19명 중 14명이 초선 위원들이다. 이들은 주로 1987년 점령지에서 일어난 반(反) 이스라엘 봉기의 주역들이다. 정통파가 주도권을 잡았다는 뜻이다. 지도부의 나이도 젊어지고 대표하는 지역도 변했다. 옛 지도부의 고루한 리더십이 실패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더구나 팔레스타인에서 총회를 개최한 것은 팔레스타인의 미래를 규정한 오슬로 협정에 반대하던 강경파들이 물러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타의 새 지도부가 직면한 또 다른 도전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에서의 권력 배분이다. 당직과 각료를 어떻게 나누고 재임 기간은 어느 정도로 하느냐는 것 등이 당면 문제이다. 이런 일이 잘 안 되면 새 지도부도 와해될 수 있다. 일부에서는 파타 지도자들이 각료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당직과 각료를 동시에 맡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다.

아바스는 취임 수락 연설에서 초기 지도부가 팔레스타인의 초석을 다졌다며 신구 지도부 간 화해를 시도했다. 파타 총회는 그밖에도 저항운동의 정신을 훼손한 지도부의 부패와 권력 남용을 규탄했다. 특히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태동한 이후 빚어진 각종 추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연사마다 팔레스타인 운동의 취약점이 지도부의 권력욕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했다. 정식 국가로 탄생되었을 때의 요직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와 일부 인사들의 부패는 팔레스타인의 이미지를 많이 손상시켰다. 

파타가 정상적인 정당이 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이들은 일단 이스라엘과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원칙은 표방했으나 여의치 않을 경우 다시 지하로 들어갈 각오도 하고 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 전 교수이며 팔레스타인 특파원인 다우드 쿠타브는 자신의 칼럼에서 어느 경우든 이번 6차 총회의 분위기는 무장 저항운동보다는 국제 규범에 맞는 정당이 되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분석하고, 이는 잘하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스라엘이 국제 여론에 굴복하고 팔레스타인의 두 경쟁 조직 파타와 하마스가 내부 타협을 이룰 경우 중동의 지평선에 떠오를 평화의 서광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도 좋은 조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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