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동안의 고독’ 마침내 빗장 풀렸다
  • 뤼순·김세원 편집위원 ()
  • 승인 2009.09.0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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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수감됐던 뤼순 감옥 현장 취재

▲ 1907년 완공된 뤼순 감옥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2천명을 수감할 수 있는 중국 동북 지역 최대의 감옥이었다. 오른쪽은 안중근 의사.


중국 랴오닝 성 다롄 시 뤼순 구 샹양(向陽) 거리에 있는 뤼순 일아(日俄) 구지(舊地) 박물관. 이곳이 바로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고 체포되어 다음 해인 1910년 3월26일 순국할 때까지 5개월간 수감되었던 뤼순 감옥이다.

막바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23일 찾은 뤼순 감옥은 쇠창살이 둘러쳐진 4m 높이의 붉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낡은 서양식 본관 건물 내로 들어서자 옛 모습 그대로 쇠창살 문이 남아 있는 감방들과 좁은 통로가 미로처럼 연결된 채 음산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중국 본토와 만주 지역을 연결하는 발해 만의 전략적 요충지인 뤼순은 러일 전쟁 당시 해상 격전지였다. 뤼순 감옥은 1902년 뤼순을 차지했던 러시아가 짓기 시작해 1904년 러일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증축해 1907년 완공했다. 2백53개의 감방, 15개의 부설 공장을 가진 뤼순 감옥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동시에 2천명을 수감할 수 있는 중국 동북 지역 최대의 감옥이었다.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항일 인사가 이곳에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고 최후를 마쳤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3년 동안에만 7백여 명의 항일 투사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고문실, 노역실, 사형장 등으로 연결된 감방 통로를 따라 걷는 동안 일제 강점기 머나먼 이국에서 억울하게 스러져간 독립투사들의 신음과 비명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 듯했다.

뤼순 감옥에서 안의사가 자취를 남긴 현장은 수감되었던 방과 처형장이다. 당국은 국사범으로 분류되었던 안의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간수부장 당직실 바로 옆에 별도의 독방을 설치했다. 한국어와 중국어, 영어, 일어 등 4개 국어로 안의사가 수감되었던 곳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다. 6㎡ 남짓한 방 안에는 안의사가 사용했던 벼루와 먹, 책상, 의자, 침구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안의사는 이 방에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탈고했고, 2백여 점의 유묵을 남겼다. 자서전을 집필한 후 자신의 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 집필에 나섰으나 사형 집행이 앞당겨지면서 완성하지는 못했다.

안의사의 교수형이 집행된 20㎡ 규모의 처형장은 나중에 감옥의 세탁장으로 사용되었다가 복원되었다. 주변 벽면은 쑨원(孫文)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 지도자들이 안의사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며 추모한 글들의 필사본들로 채워져 있다. 교수형을 당할 때 앉았던 나무 의자와 올무는 물론 교수대에 올랐던 7개의 계단, 음습한 처형장을 밝히고 있는 백열전구 등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안의사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내온 한복을 입고 교수형대에 섰다. 그의 나이 불과 31세였다. 안의사는 “나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잠시 묻었다가 독립이 되면 조국 땅에 묻어달라”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일제는 안의사의 유해를 유가족에 인도하기를 거부했다. 그의 유해는 아직도 뤼순 땅 어딘가에 묻힌 채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다. 

▲ 각종 고문 기구들이 있는 뤼순 감옥 내 고문실. 사람 모양의 고문틀 위에 놓인 천은 비명이 새나가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기 위해 썼던 것인데, 지금까지도 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다(왼쪽). 오른쪽은 사형을 집행한 교수형장.

우리 항일 독립운동가 추모관과 전시관도 마련해

중국 정부는 뤼순 감옥을 항일운동의 주요 국가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해왔지만 그동안 해군 기지가 있는 뤼순의 군사 기밀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외국인의 방문을 불허해왔다. 그러나 올해부터 외국인 개방을 허용한 데 이어 우리 항일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추모관과 전시관 건립을 허용해 일제의 탄압에 항거했던 독립투사들의 애국혼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본관 건물에서 오른쪽으로 2백m가량 떨어진 곳에 나란히 위치한 추모관과 전시관은 당초 ‘순국 중국인 항일지사 전시관’이 들어섰던 자리로 2007년 11월 중국 당국이 이 전시관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비게 된 공간이었다.

100㎡ 남짓한 추모관에는 푸른빛이 도는 백두산 천지를 담은 대형 화면을 배경으로 안의사의 흉상이 모셔져 있다. 좌우 벽면에는 그가 뤼순 감옥에서 남긴 2백여 점의 필사 유묵들로 가득 채워져 비장미가 느껴진다. 추모관 오른쪽에 마련된 6백㎡ 규모의 전시관에는 안의사뿐 아니라 뤼순 감옥에 투옥되었다 옥사한 단재 신채호 선생과 우당 이회영 선생,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했던 유상근·최흥식 선생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는 네 개의 소규모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발길을 돌려 뤼순 감옥에서 1km 떨어진 황허(黃河) 거리에 위치한 일본 관동법원 구지(舊址)를 찾았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사살하고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어 1909년 11월3일 뤼순으로 압송된 안의사는 1910년 2월14일 이곳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요동반도의 권익을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뒤 만주 일대를 통치할 기구로 관동도독부를 뤼순에 설치하고 산하에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을 두었다. 사실상 일본 영토인 뤼순에서 일본은 자국의 의지대로 안의사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자 했다.

일본 패망 뒤 인민병원으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은 1999년 한때 철거 위기에 몰렸다. 그때 한국의 민간단체인 여순순국선열재단이 다롄 시 당국에 건의해 문화재로 지정받은 뒤 건물을 매입해 전시관으로 만들었다. 11개 전시장에는 각 법정과 각종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일부분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 의군 참모총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 한 것이나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안의사는 여섯 차례 공판에서 세계를 향해 대한 독립의 정당성과 항구적 동양 평화를 위한 자신의 사상을 웅변했다.

심리 과정에서 안의사는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 시해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동양 평화 교란 등 15가지로 제시해 대한 독립의 정당성과 일본이 조선을 부당하게 침략한 사실을 전세계에 알렸다. 안의사의 재판을 지켜본 영국 <그래픽>의 찰스 머리모 기자는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으며,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입을 통해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라고 평가했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 변론을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 관선 변호사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안의사는 항소를 포기하고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의 집필을 시작했다. 동양평화론 집필을 마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유보하겠다던 일본이 약속을 어기고 조기 집행을 강행해 본론과 결론 부분은 고등법원장과의 대화를 통한 속기록으로 남겼다.

“우리 대부분은 안의사를 이토를 저격한 순국열사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안의사는 위대한 정치사상가이자 학교를 두 개나 세운 육영 사업가였으며 명필이었고 독실한 신앙인(가톨릭)이었습니다. 안의사는 이미 한 세기 전에 오늘날의 유럽연합과 같은 지역 경제공동체를 동북아시아에 만들 것을 제창하였습니다. 동양평화론에는 당시 뤼순을 동양 평화의 근거지로 만들고 한·중·일 공동 군대를 편성하며 동양 3국의 국민이 1전씩 걷어서 동양평화 유지기금을 조성하고 공동은행을 만들어 공용 화폐를 발행하자는 주장이 나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선각자적인 제안이었지요.”

여순순국선열재단의 박귀언 이사는 “안의사의 의거 100주년을 맞아 늦은 감은 있지만 안의사의 삶과 업적, 사상이 재조명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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