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 어린 밥 시중 아내 사랑 덕에 살았다”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9.09.08 16:4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0시간 췌장암 수술 후 완치…“직장까지 와 간병”

ⓒ시사저널 임준선

췌장암은 최악의 암으로 꼽힌다. 명확한 증세가 없기 때문에 조기 발견이 어렵다. 우연히 발견하더라도 때가 늦어 손을 쓸 방도가 거의 없다.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환자를 행운아로 여길 정도이다. 딱 부러진 치료법도 마땅치 않아 췌장암을 ‘대책 없는 암’이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췌장암에 걸리면 환자는 공포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고속도로 김제톨게이트 영업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병근씨(55)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술 후 지난 5년 동안 공포에 시달리던 그를 구해낸 것은 부인의 사랑이었다. 김씨는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이 나를 살렸다. 다시 얻은 인생 동안 보답하며 살겠다”라며 부인에 대해 감사를 표시했다.

2003년 말, 김씨는 연일 회식 자리를 가졌다. 한밤중에 병원 응급실을 찾았던 그날 저녁에도 폭음했다. 그는 “소주에 고기 안주를 먹었다. 입가심으로 냉면을 먹었다. 처음에는 냉면에 체한 줄 알았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배가 살살 아파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전주가 집인데, 밤 12시쯤 동네 병원을 찾았다. 초음파검사를 마친 의사는 담관이 막힌 것 같다고 했다. 응급 처치를 했지만 낫지 않으면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라며 5년 전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해냈다.

며칠 전부터 전조가 있기는 했다. 몸이 가렵고 얼굴에 황달이 생겼다. 췌장암의 일반적인 증세가 황달과 복통이다. 그렇다고 이런 증세로 미루어 췌장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김씨는 “매년 정기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해에도 담도와 췌장에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럼에도 황달이 생겨서 놀랐다”라며 초기 증세를 설명했다.

놀란 마음에 전북대병원을 찾아 CT와 MRI 등 여러 검사를 받았다. 의사로부터 암 판정을 받았다. 김씨는 “암 크기가 아주 작다고 했다. 수술로 톡 떼어내면 된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사실은 심각한 상태였다. 의사가 선의로 한 말이었다”라고 말했다.

김씨의 부인은 남편의 병세가 중하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받았던 충격을 “눈앞이 캄캄했다”라고 표현한 부인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가족 친지가 모여 의논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보기로 했다. 그는 “서울대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다. 결과는 암울했다. 집에 돌아가서 평소에 먹고 싶었던 음식을 즐기라고 했다. 사실상 시한부 판정을 받은 셈이었다. 그런데 나는 암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 서울대병원 김선회 외과 교수로부터 수술을 받았다. 4~6시간 걸릴 것이라던 수술이 10시간을 넘겨서야 끝났다. 담낭, 십이지장, 췌장 머리 부위를 제거하는 큰 수술이었다. 이후 한 달 동안 방사선치료를 받았고, 6개월 동안 항암치료도 받았다”라며 투병 생활의 기억을 털어놓았다. 약 75kg이던 몸무게가 투병 기간 동안 20kg 가까이 빠졌다. 하루에 1kg씩 줄어들던 체중계 눈금은 60kg 이하를 가리켰다. 항암제 부작용으로 구토가 심했다. 밥맛도 없어서 하루 세 끼가 암만큼 두려운 공포였다.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아내가 나를 쫓아다니며 밥을 먹였다. 나는 심하게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았다. 아내는 신경질을 다 받아내며 내 입에 밥을 떠먹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내는 나를 쫓아다니며 건강을 챙긴다”라며 기자에게 부인을 소개했다. 그의 부인은 김씨와 같은 직장에 있다. 부인은 남편 직장에서까지 남편을 보살핀다. 이미 오랜 습관이 되어버렸다. 

“갑상선질환 앓으면서도 남편 뒷수발해줘”

몇 년 전, 투병 중에 김씨는 함양톨게이트 영업소로 발령을 받았다. 그의 부인도 그를 따랐다. 톨게이트 부근에 방을 얻어 남편을 보살폈다. 부인은 당시 갑상선질환을 앓고 있던 환자였다. 김씨는 “그 영업소 소장으로 근무하는 7개월 동안 아내가 늘 곁에 있었다.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아내는 나에게 세 끼를 챙겨 먹이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옆에 앉아 있던 그의 부인이 말을 받았다. 그녀는 “다행히 아들 둘은 20대로 다 컸다. 그래도 남자 애들이 식사를 제대로 챙겨 먹었겠는가. 하지만, 남편 건강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아이들은 현재 직장인이 되었다. 아버지가 암인 데다 언제 직장을 그만두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자식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암 치료를 받으면 체력이 떨어진다. 면역력도 급락한다. 평소 걸리지 않던 감기에 잘 걸린다. 김씨도 감기를 달고 살았다. 그는 “툭하면 감기에 걸렸다. 콧물만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등줄기에서 통증을 느낄 정도의 몸살도 앓았다. 한여름에도 긴소매 셔츠를 입고 마스크를 하고 다녀야 했다. 아내가 따뜻한 물로 족욕을 해주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랜 기간 빠뜨리지 않았다. 몇 년 후에는 감기에 걸려도 가볍게 지나갈 정도로 호전되었다. 지금은 감기를 모르고 산다”라며 부인 눈을 쳐다보았다.

김씨를 수술했던 김선회 서울대병원 외과 교수는 “입원 당시 심한 황달이 있었다. 약 2cm 정도 췌두부암이 담관과 췌장 주위에 퍼져 있었다. 다행히 림프절이나 간에 전이는 없었다. 2004년 1월9일 위플(whipple)수술로 필요 부위를 떼어냈다. 지난 4월 진단한 결과로는 췌장암 재발 증거가 없는 상태이다”라며 사실상 완치 판정을 내렸다.

발병 후부터 김씨는 다소 까다로운 생활을 한다. 하루 한 갑 반을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좋아하던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식생활에도 변화를 주었다. 예전부터 좋아하던 청국장을 더 가까이 한다. 음식에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육류 섭취를 확 줄였다. 운동도 테니스에서 걷기와 등산으로 바꾸었다.

김씨는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 운동을 찾았다. 매일 아내와 함께 천변(川邊)을 5km 정도 걷는다. 1주일에 한두 번은 등산을 한다. 두 시간 정도 맑은 공기를 마시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런 운동을 하니 체력이 좋아진 것을 느낀다. 면역력도 좋아졌고, 더부룩하던 소화 기능도 회복되었다”라며 발병 이후 달라진 생활을 설명했다.

‘헌신적인 간병’이라는 말에 그의 부인은 손사래를 치며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고 싶었을 뿐이다. 몸부림을 해도 죽는다면 하늘의 뜻이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만 말했다. 급하고 무뚝뚝한 김씨는 슬그머니 부인 손을 잡았다. 


▲ 김병근씨와 그의 부인(오른쪽).
1. 사랑이 있었다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다. 직업 특성상 발령이 잦아 지방 근무가 많다. 그때마다 아내는 따라다니며 끼니를 챙겼다. 지금은 아예 직장 생활을 같이할 정도이다.

2. 위기의식을 가졌다

가족이 위기의식을 느꼈다. 환자가 신경 쓸 일을 만들지 않는다. 환자는 물론 가족이 투병에 집중할 수 있다. 

3. 생활이 엄격해졌다.

사회생활하면서 술과 담배를 피할 수 없다. 그래도 발병 후 철저하게 금주하고 금연했다. 조미료가 섞인 음식을 피하다 보니 외식을 거의 하지 않는다.

4.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급한 성격만큼 짜증을 잘 냈다. 발병 후에는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며 지낸다. 감사하는 마음가짐은 암이 가장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