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룡’들 숨 고르기 길어지는 이유 있다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9.09.2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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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3년 앞두고 선두 달렸던 역대 대권 주자들 어김없이 낙마…차기 후보들 “전철 밟을라” 조심조심 독주 중인 박근혜 전 대표측 “지금은 가만히 있겠다” 예민한 반응

▲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박근혜 전 대표·정운찬 총리 후보자·정몽준 대표·유시민 전 장관·손학규 전 대표·정동영 의원(왼쪽부터). ⓒ시사저널 사진팀


명절 화젯거리에 ‘대권’의 향방은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이다. 잠재적 대권 주자들도 추석 민심을 겨냥해 움직이곤 했다. 최근 개헌론을 연구했던 ‘헌법연구자문위원회’의 한 위원이 ‘이원정부제’를 채택한 뒷얘기로 “당초 위원회의 대세는 ‘의원내각제’였으나, 대통령을 직접 내 손으로 뽑고 싶어 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반영하기 위해 절충안으로 이원정부제를 선택했다”라고 귀띔할 정도로 대통령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관심은 지대하다.

아직 대선을 3년여 앞두고 있지만, ‘잠룡’들은 이미 꿈틀대고 있다. 잠룡은 말 그대로 수면 아래에서 잠잠히 기회를 엿보며 ‘용’으로 승천할 것을 꿈꾸는 차기 대권 주자들이다. 그래서 다양하고 폭넓게 후보군이 거론된다. 여권만 해도 ‘부동의 선두’ 박근혜 전 대표가 버티고 있지만, 최근에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고, 정몽준 의원이 한나라당 대표에 오르면서 ‘양정(兩鄭)’씨가 급부상하는 모습이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문수 경기지사 역시 잠룡으로 평가된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 홍준표 전 원내대표, 강재섭 전 대표, 원희룡 의원, 이완구 충남지사 등도 거론된다.

야권은 좀 더 다양하다. 우선 민주당에서 정세균 대표와 손학규 전 대표, 추미애·천정배 의원, 한명숙 전 총리, 김근태 전 의장 등의 이름이 다양하게 나온다. 당 밖에서는 주로 ‘친노’ 그룹을 중심으로 유시민 전 장관, 강금실 전 장관, 이해찬 전 총리, 문재인 전 실장 등이 두루 거명된다. 정동영 의원과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도 범야권 후보군으로 평가된다. 자유선진당에서는 이회창 총재가 여전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비정치인으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오르내리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단연 독보적인 선두는 박근혜 전 대표이다. 지난 8월 <시사저널>이 ‘가장 잠재력 있는 차기 대권 주자’를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박 전 대표가 45.8%를 얻어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유시민 전 장관(4.8%)이, 3위는 정몽준  대표(3.5%)가 각각 차지했다. 박 전 대표는 지난해 본지 조사에서도 42.2%로 역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여권에서도 “이래서야 제대로 된 경쟁 구도가 만들어지겠는가”라는 우려가 나올 정도이다. 주로 ‘친이(이명박)계’의 목소리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에 대해 현재 가장 경계심을 보이고 있는 쪽은 바로 ‘친박(박근혜)계’라는 점이 주목된다. 친박계측은 박 전 대표가 대권 주자 1위로 계속 단독 질주하는 상황을 반갑게만 보지 않는다. 친박계의 한 핵심 인사는 최근 박 전 대표와의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은 때가 아니다. 언론에서 너무 박 전 대표를 미리부터 내세우려 한다. 아직 대선은 3년이나 남았다”라고 손사래를 쳤다. 또 다른 한 인사는 “대선은 그야말로 마라톤이다. 42.195km를 뛰면서 처음부터 선두로 치고나간 주자가 골인점을 1위로 통과한 것을 보았는가. 막판 스퍼트가 중요하다”라고 불안한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지금 스퍼트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은 다른 잠룡들도 다 마찬가지다. 일부 지방에 칩거하거나, 민생 탐방에 나서는 등 애써 서울과 멀리하거나, 혹은 주변에 대권의 ‘대’자도 입에 못 오르내리게 단속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손학규 전 대표는 지난 9월16일 <시사저널> 기자와 만나서도 끝내 정치 얘기는 입을 다물었다. 재·보선에도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뉘앙스이다. 정동영 의원 역시 9월24일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대권에 대한 언급은 애써 피했다. 하지만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적자’라는 강한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정운찬 총리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대권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절대 ‘오버페이스’ 하지 않고, 철저하게 잠룡으로서의 조용한 처신에 충실하려는 대권 주자들의 태도는 바로 역대 선거 결과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1987년 16년 만에 대통령직선제가 부활된 이후 네 번의 대선이 치러졌다. 대선 승리를 통해 대권을 잡은 대통령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치지만, 대중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또 ‘차기 대권 주자’로 향하게 된다. 집권 초반이든 후반이든 상관없다. 집권 2년차 추석 정국인 지금, 차기 대권 주자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표출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역대도 마찬가지였다. 초반에 인기 선두를 달리며 이미 머릿속에는 대권을 그리고 있던 잠룡들이 많았다. 하지만 초반 전력 질주는 역시 중도 낙오로 이어지곤 했다. 역대 정권의 집권 2년차 추석 정국 당시 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거론되었던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이런 공식은 뚜렷하게 성립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대선의 추억’으로 되돌아가보자.

▲ 1989년 이종찬, 1994년 박찬종, 1999년 이회창, 2004년 고건(왼쪽부터)은 각각 대권 주자 1위를 달렸으나 모두 낙마했다. ⓒ시사저널 사진팀

▒ 1989년 추석 정국 

1989년 추석 정국은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로, 세 야당을 이끌던 김대중(DJ)·김영삼(YS)·김종필(JP) 총재 등 이른바 ‘3김씨’가 위력을 발휘하던 때였다. 당시 제왕적 총재로 군림한 3김씨는 이미 대권 주자였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여론조사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시사저널>이 매년 실시한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여론조사는 당시 정치인들의 대중적 인기도를 측정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를 제공했다. 1989년 10월 본지의 창간기념 특집 여론조사에서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정치 지도자로 누구를 생각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에 1~3위로 꼽힌 정치인은 이종찬 민정당 의원, 박찬종 무소속 의원, 이기택 민주당 부총재였다. 또한 ‘한국을 움직이는 영향력 있는 인물’ 10위 안에 노태우 대통령과 3김씨를 제외한 정치인 중에는 유일하게 박철언 정무1장관이 포함되었다. 

이 조사 결과로 볼 때 당시 국민들이 생각한 차기 대권 주자로는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장관과 함께 이종찬 의원, 박찬종 의원, 이기택 부총재 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3김씨’의 존재는 여전히 한국 정치의 현실이었고, 그중에서도 제1 야당 총재였던 DJ가 여론조사에서 한 발짝 앞서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당시 거론되었던 4명의 잠룡과 유력 대권 주자 DJ는 모두 1992년 12월 대선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특히 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 점쳐졌던 박장관과 이의원은 1990년 3당 합당에 의해 여권 대선 주자로 변신한 YS에 밀려 모두 낙마했다. 이때부터 ‘여론조사 1위 잠룡은 낙마한다’라는 징크스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 1994년 추석 정국 

YS 정권 2년차였던 1994년 10월. 1997년 12월 대선을 3년여 앞둔 상황에서 가장 잠재력 있는 대권 주자로는 박찬종 신민당 대표가 꼽혔다. 그는 1992년 대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1백50만표 이상을 득표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1994년 10월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박대표는 ‘차세대 지도자’를 묻는 질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2, 3위는 각각 김덕룡 민자당 의원과 이부영 민주당 최고위원이었다. 

박대표는 비단 이때뿐만 아니라 YS 정권 내내 잠재력 있는 대권 주자 순위에서 줄곧 선두를 달렸다. 하지만  막상 1997년 여당의 대권 후보를 결정할 무렵, 그는 이미 오버페이스 상태였다. 1994년 추석 정국 때는 언급도 되지 않았던 이회창·이인제 등에 추월당해 대선 출마의 꿈을 접어야 했다. 김덕룡 의원 역시 ‘YS 후계자’ 1순위로 여겨졌으나, 중도에 낙마하고 말았다. 야권에서 ‘잠룡’으로 가장 주목되었던 이부영 최고위원도 같은 운명이었다. DJ의 정계 복귀 선언과 함께 대권의 꿈을 접어야 했다.

▒ 1999년 추석 정국

1999년 10월 <시사저널>은 여론조사를 통해 좀 더 직접적으로 ‘차기 대권에 누가 가장 유력하다고 보는가’라고 물었다. 1위는 단연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였다. 2위는 이인제 민주당 최고위원이었다. 두 사람은 1997년 대선에 출마해 DJ에게 밀려 나란히 2, 3위로 낙선했다. 두 사람은 낙선 직후 대권 재도전을 선언했고, 이때부터 실제 2002년 대선 직전까지 둘은 가장 유력한 여야의 대권 주자였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모두 대권 쟁취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총재는 2002년 대선 직전까지 5년간 거의 한 번도 대권 주자 순위에서 선두를 놓쳐본 적이 없이 질주했으나, 막상 대선에서는 노무현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최고위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군에서 부동의 선두를 유지했으나, 막판 경선에서 노후보에게 추월당했다. 반면, 노후보는 잠룡 순위에서 10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기회를 노렸고, 결국 막판 대역전극에 성공했다.

▒ 2004년 추석 정국

2004년 9월 <시사저널>이 추석 특집으로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차기 대통령감’을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 결과 1위는 고건 전 총리였다. 2위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차지했다. 당시 다른 여론조사 기관에서의 조사 결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 전 총리의 인기는 이때부터 2006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신중하던 고 전 총리도 높은 인기에 고무된 채, 이후 본격적인 대권 행보를 펼쳐나갔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 중도 낙마였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야권의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였다. 일부 성급한 언론에서는 고건-박근혜의 대결을 기정사실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2007년 대선은 정동영-이명박 대결 구도로 바뀌었다. 2004년 추석 여론조사에서 3위를 차지했던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1위 고 전 총리를 추월했고, 4위였던 이명박 서울시장이 2위 박대표를 역시 막판에 앞지른 것이다.

이처럼 역대 대선의 추억은 잠룡들에게 뚜렷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박 전 대표를 비롯한 지금의 잠룡들이 섣불리 앞으로 먼저 치고 나가기보다는 뒤에서 숨 고르기에 더 치중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명확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의 태도를 바꿀 분수령은 역시 내년 지방선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에 따라서 본격적으로 잠룡들이 신발끈을 고쳐 매고 전력 질주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올해보다는 내년 추석이 훨씬 더 시끄러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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